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암흑물질, 아기 우주 나이 알려주나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프랭크 클로우즈 명예교수의 책 ‘Antimatter(반물질)’을 번역하다 고민스런 상황에 빠졌다. 책에서 우주 나이를 ‘fourteen billion years’라고 쓰고 있는데 무심코 ‘140억 년’이라고 번역했다가 문득 ‘이건 아니지’란 생각이 들었다. 우주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건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도 알고 있는 상식인데 140억 년이라고 번역했다가는 책에 대한 신뢰도만 떨어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37억 년으로 고쳐놓고 보니 또 좀 찜찜하다. 저명한 물리학자가 우주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걸 모르고 140억 년이라고 썼을 리는 없지 않은가. 혹시 137억 년이라는 게 실은 평균값일 뿐 ± 오차범위가 너무 커서 큰 의미는 없는 숫자라 일부러 140억 년이라고 쓴 건 아닐까. 이런 고민거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괴롭히다가 문득 137억 년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는 걸 깨달았다.

저자가 그렇게 쓴 건 어떤 의도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숫자 단위의 표기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어권은 천 단위로 숫자를 세기 때문에 137억 년을 글로 나타내려면 ‘thirteen billion seven hundred million years’로 써야하는데 얼마나 번거로운가. 물론 논문이라면 ‘13.7 billion years’라고 쓰면 되겠지만 대중과학서적에서 이런 표기는 좀 불친절한 표기방식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만 단위로 끊어서 숫자를 세므로 어차피 억 단위까지 표기할 바에야 좀 더 정확한 수치를 쓰는 게 올바른 번역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번역 원고 파일을 다시 열어 우주 나이를 또 고쳤다. 물론 140억 년으로 돌아간 건 아니고 138억 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올해 3월 21일 유럽우주기구(ESA)가 최신 우주배경복사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주나이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 해상도 3배, 감도 10배 높아
ESA는 2009년 5월 플랑크(Planck)위성을 쏘아 올려 지구에서 150만km 떨어진 궤도에 안착시킨 뒤 마이크로파 범위(진동수 30GHz~857GHz)에서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했다. 15개월 반에 걸쳐 모은 데이터를 해석해 한 장의 지도로 만든 것이 이번에 발표한 우주배경복사 지도다. 연구자들은 관련 논문 29편을 학술지 ‘천문학&천체물리학’에 제출했다고 한다.

우주배경복사 지도가 대중에게 익숙한 이유는 과거 미우주항공국(NASA)이 주도한 COBE위성과 WMAP위성이 관측한 데이터로 만든 지도가 여러 차례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지도는 지금까지 가장 정밀했던 WMAP의 지도보다도 우주배경복사 분포를 훨씬 자세히 표시하고 있단다. 검출기의 성능이 해상도는 3배, 감도는 10배나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데이터를 해석하면서 우주 나이를 비롯해 몇 가지 값이 업데이트됐고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과제도 나왔다고 한다.

플랑크위성의 관측 데이터로 만든 우주배경복사지도(왼쪽 위). 분석 결과 좌반구에 비해 우반구의 온도 요동(붉을수록 평균온도보다 높고 파랄수록 낮다)이 더 심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오른쪽 아래).유럽우주국(ESA)제공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란 빅뱅이 일어나고 약 38만 년이 지난 초기 우주(아기 우주)에서 존재했던 빛(광자)의 잔해다. 당시 우주의 온도가 떨어져 약 2700도에 이르면서 플라스마 상태로 존재하던 양성자와 전자, 광자 가운데 양성자와 전자가 수소 원자를 만들며 안정화되고 빛은 자유를 얻었다. 그 뒤 우주가 팽창하면서 이 빛은 마이크로파 영역으로 바뀌었고, 현재 우주배경복사의 스펙트럼은 절대온도 2.7도의 흑체복사 스펙트럼과 일치한다.

우주배경복사는 전체적으로 균일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도의 편차, 즉 요동이 있다. 이는 우주 초기 존재한 밀도의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오늘날 우주의 구조, 즉 별과 은하의 분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해상력이 높아지다 보니 이전 WMAP 데이터에서는 긴가민가했던 특이한 복사분포도 명확히 드러났다. 즉 온도의 요동이 우주에서 균일하게 분포해 있지 않다는 것. 즉 오른쪽 반구가 왼쪽 반구에 비해 온도의 요동이 더 심하다. 이런 현상은 우주는 어느 방향으로 봐도 편차가 없다는 기존의 우주론 모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한다.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한 위성 3종의 해상도를 비교한 그림. 플랑크위성은 이전 WMAP위성에 비해서 해상도가 3배나 높다. 유럽우주국(ESA)제공

연구자들은 고해상의 데이터를 해석해 다양한 결과를 얻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주나이가 기존 WMAP 관측 결과보다 수천만 년 더 늘어나 138억 년으로 추정됐다는 것. 이런 결과는 허블상수값이 67로 기존값(73)보다 꽤 작게 나온 것과 관계가 있다. 허블상수는 우주팽창속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에 이 값이 작아졌다는 건 우주팽창속도가 알려진 것보다 약간 느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주팽창속도가 약간 느려진 만큼 우주나이가 더 많아져야 오늘날 우주 크기를 설명할 수 있다.

한편 우주팽창속도값이 작아졌다는 건 우주팽창의 동력, 즉 척력인 암흑에너지의 비율이 줄어들어야 함을 뜻한다. 이번 발표에서 우주구성 성분 가운데 보통 물질의 비율이 기존의 4.5%에서 4.9%로 늘어나고 암흑물질이 22.7%에서 26.8%로 늘어난 반면 암흑에너지는 72.8%에서 68.3%로 줄어든 이유다. 물론 이번 데이터 역시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의 실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마리도 주지 못했다.

●고에너지 양전자의 기원은 암흑물질?
과학저널 ‘사이언스’ 4월 12일자에는 ‘알파자기분광계(AMS)’가 관측한 데이터를 해석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무려 2조원이나 투자돼 '쓸데없는 돈 낭비'라며 한 때 프로젝트가 중단되기도 했던 AMS는 다행히 2011년 5월 우주왕복선 인데버호에 실려 우주정거장에 무사히 설치됐고, 그 뒤 우주에서 오는 우주선(cosmic ray)을 검출해 데이터를 모았다.

AMS의 최대 강점은 내부에 지구 자기장의 3000배에 이르는 자기장이 형성돼 전하를 띤 입자의 이동궤적을 크게 휘게 할 수 있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즉 높은 에너지를 지닌 우주선 입자의 실체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는 것. 이번에 AMS연구그룹(347명)이 물리학저널 ‘피지컬리뷰레터스’에 발표한 연구결과도 이런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즉 우주에서 오는 전자와 그 반물질인 양전자의 비율을 관측한 결과 10GeV(기가전자볼트) 에너지에서는 양전자의 비율이 5%에 불과해지만 350GeV에서는 15%가 넘었다는 것. 즉 우주선의 에너지가 높을수록 반물질의 비율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양전자의 비율은 에너지가 높을수록 떨어져야 한다.

논문에는 ‘새로운 물리 현상’이라는 정도로 썼지만 연구자들은 이런 여분의 양전자가 암흑물질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고 기대하고 있다. 즉 유력한 가설에 따르면 암흑물질은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WIMP)’로 이뤄져 있는데, 두 입자가 부딪쳐 소멸하면서 고에너지의 전자-양전자 쌍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여기서 나온 양전자 가운데 우주여행에서 살아남은 것이 AMS에서 검출됐다는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프로젝트를 주도한 197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 MIT의 사무엘 팅 교수는 “AMS가 궁극적으로는 양전자의 근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유한성의 운명인 존재들이 100억 년이 넘는 시간과 100억 광년이 넘는 공간인 우주의 기원과 구조를 밝히려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이 과학자들이 ‘어른스러운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플랑크 위성의 결과에 대한 NASA의 찰스 로렌스 박사의 반응처럼.

“우리는 우주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아이디어가 있지만, 우주가 왜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이게 더 재미있지 않냐?”

Donga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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