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국적의 유명한 물리학자 두 사람이 있다. ‘S=klogW’, 일명 볼츠만 방정식으로 유명한 통계역학의 아버지 루드비히 볼츠만과 양자역학을 상징하는 슈뢰딩거방정식을 만든 에르빈 슈뢰딩거다. 볼츠만은 1844년생이고 슈뢰딩거는 1887년생인데, 슈뢰딩거가 빈 대학에 입학하던 1906년 볼츠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리학과 신입생 슈뢰딩거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볼츠만의 강의를 들을 수없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18개월 뒤 이론물리학 교수로 새로 부임한 프리츠 하젠욀(Fritz Hasenöhrl)의 취임 강연을 듣고 전율하며 다시 물리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슈뢰딩거는 하젠욀을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모시기도 했다.
훗날 슈뢰딩거는 “다른 누구도 프리츠 하젠욀만큼 나에게 강한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 아버지만 빼고. 하젠욀에게는 기사도가 느껴졌다. 그의 다정함에 학생과의 격식이나 나이차는 더 이상 장벽이 되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볼츠만의 제자이자 슈뢰딩거의 스승인 하젠욀은 191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간 오스트리아 물리학계를 이끌었다.
1904년 원통의 흑체복사 과정을 분석하다가 E=(3/8)mc2이라는 결론을 얻은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프란츠 하젠욀. 최근 하젠욀의 논문이 재해석되면서 그의 업적이 재평가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898년 볼츠만은 라이덴의 저온물리학자 캄머링 온스가 1년간 일할 연구조교를 추천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자 하젠욀을 보낼 정도로 총애했다고 한다. 이듬해 빈에 돌아온 하젠욀은 사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했는데 1904년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움직이는 물체의 복사이론에 대하여’란 제목의 논문에서 하젠욀은 E=(3/8)mc²이라는 수식을 유도해 낸다. 아인슈타인이 E=mc²에 해당하는 결론을 내린 논문(아인슈타인은 “물체가 복사의 형태로 에너지 L을 내놓으면 그 질량은 L/c²만큼 줄어든다”라고 표현했다)보다 1년 앞선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논문에 참고문헌을 달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이 논문에서도 자신이 3개월 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만을 언급할 뿐 하젠욀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가 없다. 두 논문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같은 제목 논문 세 편 연달아 내
미국 하버포드대 천문학과의 스티븐 바운 교수는 ‘유럽물리학저널 H’ 1월 21일자 온라인판에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프리츠 하젠욀과 E=mc²’. 바운 교수는 천체물리학자이면서 과학사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이 논문에서 그는 하젠욀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전개시켰고 어떻게 틀렸기에 3/8이란 상수가 붙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에 대해 처음 생각한 이는 아인슈타인도, 하젠욀도 아니다. 전자를 발견한 J.J. 톰슨은 1881년 전자가 전기장의 영향을 받으면 질량이 늘어난다고 제안했고 뒤이어 막스 아브라함은 이 아이디어를 가다듬어 m=(4/3)E₀c²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즉 움직이는 전자는 자신의 전기장 에너지 E₀의 영향으로 질량이 m만큼 늘어난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하젠욀은 생각의 지평을 넓혀 당시 널리 연구되고 있던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 역시 질량에 상응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흑체란 복사선을 완전 흡수하는 물체인데, 흑체도 온도에 따라 복사를 내고 그 파장분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1900년 독일의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을 생각해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하젠욀도 사고실험을 통해 흑체복사와 질량의 관계를 연구했다. 하젠욀은 양 끝이 흑체인 속이 빈 원통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이를 정지한 관찰자가 바라본다고 가정했다. 이 경우 원통의 이동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의 파장은 짧아지고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의 파장은 길어진다(도플러 효과).
그는 이때 원통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게 하는데 필요한 일을 계산했고 복사 에너지가 질량과 E=(3/8)mc²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였다. 하젠욀은 이듬해 또 다른 사고실험을 통해 앞의 식을 수정해 그 관계가 E=(3/4)mc²라고 발표했다.
바운 교수는 하젠욀의 논문을 재해석하면서 상대론적 관점을 넣지 않을 경우 오류가 불가피함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1905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논문 역시 그렇게 명쾌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부피가 없는 가상의 점입자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빛을 내보내는 상황에 대해 고정 좌표계와 일정 속도로 이동하는 좌표계에서 바라볼 때(상대론적 도플러 효과) 차이를 교묘하게 계산해 E=mc²라는 관계를 발견했다. 즉 복사를 하면 점입자의 질량이 줄어든다는 것.
하젠욀은 원통의 흑체복사를, 아인슈타인은 점입자의 복사를 가정했고 둘 다 빛을 내는 대상과 관찰자(또는 좌표) 사이의 상대적인 움직임을 상정했다. 다만 해석에서 하젠욀은 고전역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고(빛의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상대론적인 방법론을 쓴 게 차이다.
●같은 저널에 몇 달 간격으로 실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하젠욀의 논문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젠욀의 첫 번째 논문은 1904년 ‘비엔나 회의보고서’에 실렸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논문은 1904년, 1905년 ‘물리학연감(Annalen der Physik)’에 실렸기 때문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과 E=mc² 논문 역시 당대 최고 물리학저널이었던 ‘물리학연감’에 실렸다. E=(3/4)mc²를 유도한 하젠욀의 1905년 논문은 아인슈타인의 논문보다 수개월 앞서 발표됐다. 게다가 하젠욀은 이 업적으로 오스트리아과학아카데미가 주는 ‘하이팅거상’까지 받았다.
하젠욀과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 비교. 하젠욀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원통 양 끝에서 흑체복사가 일어나는 과정을 상정했다. 이때 관찰자의 관점에서 원통의 움직임 방향으로 나오는 복사는 청색변이가 일어나고 반대 방향 복사는 적색편이가 일어난다. 따라서 원통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려면 외부에서 가하는 힘이 달라야 한다. 이 과정을 해석하면 E=(3/8)mc2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듬해 하젠욀은 오류를 수정해 E=(3/4)mc2라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한 좌표계(x, y, z)에서 고정된 점입자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오는 복사를 가정한 뒤 이 좌표계의 x축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이동하는 새로운 좌표계(ξ, η, ζ)를 설정한 뒤 두 좌표계에서 분석한 에너지의 변화를 비교해 E=mc2에 해당하는 관계식을 얻었다.
이번에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바운 교수와 함께 하젠욀 연구를 한 미국 프린스턴대 토스 로스만 교수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아인슈타인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실험의 설정을 봐도 뭔가 비슷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발견에 대한 자신의 우선권에 꽤 민감했다고 한다.
1907년 독일의 물리학자 요하네스 스타르크가 한 논문에서 E=mc²을 막스 플랑크의 발견이라고 언급하자 아인슈타인은 즉각 “관성질량과 에너지의 관계에 대한 나의 우선권을 당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좀 이상하군요”라고 항의했다. 스타르크는 플랑크의 논문을 다시 읽어본 뒤 이 논문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아인슈타인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1908년 물리학자 야콥 램은 아인슈타인에게 쓴 편지에서 하젠욀의 논문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봤지만 아인슈타인은 답장에서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아인슈타인 역시 자신의 1905년 논문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 설정한 점입자라는 가정을 하젠욀처럼 부피가 있는 입자로 바꿔 즉 일반화해 증명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E=mc²에 대한 진정한 일반화된 증명은 1911년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가 성공했다.
1911년 제1회 솔베이학회에는 당대 최고 물리학자가 모였다. 뒷줄 오른쪽 2번째에 아인슈타인, 8번째에 하젠욀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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