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실험은 앞에서 언급했던 두 종류의 실험처럼 만만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모든 실험 장치를 엄청나게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의 과학 기술로는 전자 규모의 초미세 실험 기구를 만들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실험은 실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3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은 어려운 공부를 싫어하는 법. 1960년대 미국 명문대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도 신입생들이 물리학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고민 끝에 내놓은 해결책은 이 대학의 스타 교수 리처드 파인만에게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물리학 강좌를 맡긴 것. 1961~1963년까지 진행된 파인만의 강의는 정작 학부생들보다도 대학원생이나 심지어 교수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최고 천재로 불리는 파인만의 카리스마 가득한 강의에 사람들은 매료됐고, 동료들은 이 역사적인 강의를 책으로 남겨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파인만에게 집필을 종용했다. 말은 청산유수여도 글 쓰는 건 질색했던 파인만은 난색을 표시했지만 결국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교재를 집필했다. 이렇게 해서 1963년에서 1965년 사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세 권이 빛을 보게 됐다.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이만. 1960년대 초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그의 강의를 정리한 책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다.
거의 50년이 지났지만 ‘물리학 강의’는 여전히 최고의 물리학 교재(물론 초보자가 읽을 수준은 아니다)로 파인만의 개성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물리학 강의’ 1권은 고전역학, 2권은 전자기학, 3권은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다. 3권은 셋 가운데 가장 얇지만 현대물리학의 핵심 개념을 담고 있다.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냐
3권에서 파인만은 양자역학이 기존의 고전역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을 논리로 설명하려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 1장 ‘양자적 행동’에서 파인만은 전자의 이중슬릿(double-slit)실험으로 양자역학의 기괴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총알실험이다. 슬릿이 두 개 나 있는 방탄벽을 향해 멋대로 기관총을 쏘면 총알 일부는 구멍을 지나 뒤쪽 나무판에 박힌다. 이때 구멍1은 그냥 두고 구멍2를 막으면 나무판에 박힌 총알의 분포는 총구와 구멍1을 잇는 선상을 정점으로 해서 퍼져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구멍1을 막고 구멍2를 연 상태로 총을 쏘면 총알은 마찬가지로 총구와 구멍2를 잇는 선상을 정점으로 분포한다. 두 구멍을 다 열고 총을 쏘면 총알의 분포는 당연히 앞의 두 분포를 합친 패턴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같은 구조에서 총알이 아니라 수면파를 일으켜보자. 틈이 한 쪽만 열렸을 때는 위의 총알과 비슷한 패턴을 보이지만 두 틈이 다 열릴 경우 스크린에는 독특한 파동의 패턴이 비친다. 각각 틈을 통과하며 회절하는 파동이 간섭하면서 진폭이 보강되거나 상쇄되기 때문이다. 이때 스크린에 닿은 파동의 세기, 즉 에너지는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제 기관총 대신 전자총을 쏘아보자. 틈이 하나만 열려있을 때는 스크린에 도달하는 전자의 분포 패턴이 총알의 경우와 비슷하다. 총알의 크기를 엄청나게 줄인 게 전자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틈을 둘 다 열고 전자총을 쏘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마치 수면파일 때 같은 간섭패턴이 스크린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자가 분포하는 밀도(확률)는 파동의 간섭으로 인한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 즉 입자인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하는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파동-입자 이중성의 진정 심오한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다. 즉 전자총을 섬세하게 조정해 1초에 전자가 하나만 나오게 만든 뒤 튀어나온 전자가 스크린에서 검출되는 위치를 기록하면 처음에는 제멋대로 점이 찍히는 것 같지만 점차 간섭패턴 무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자들은 분명히 서로 독립적으로 그것도 시간 차이를 두고, 즉 한 측정이 끝난 뒤에야 전자총에서 다음 전자가 튀어나왔는데 어떻게 이런 마술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전자가 어떤 구멍을 통해 나왔는지 측정하는 순간 간섭패턴은 사라진다는 것. 즉 전자가 어떤 구멍을 통과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모를 때만 파동처럼 행동한다.
파인만은 “이 현상은 어떤 고전적인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며 “이것은 하나의 미스터리일 뿐이다. 세부적인 사항들을 어떻게든 알아낸다 해도 미스터리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책에서 파인만이 소개한 전자총 실험은 사실 실제로 수행된 게 아니다.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그의 말처럼 당시에는 이런 장치를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책에 묘사된 건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는 전자는 이런 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파인만의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다.
●나노기술로 장치 만들어
최근 미국 네브라스카-링컨대 물리학자들이 파인만의 사고실험을 완전하게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전자실험의 개념도로 슬릿이 하나만 열려있을 때(1 또는 2)는 입자로도 설명할 수 있는 패턴(P1 또는 P2)이 나오지만 둘 다 열려있을 때는 파동이어야만 가능한 패턴(P12)이 나온다. 새물리학저널 제공
연구자들이 사용한 전자총이 내보내는 전자의 에너지는 600eV(전자볼트)로 드브로이의 물질파 공식을 적용하면 파장이 50피코미터(피코는 1조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슬릿의 폭이 아주 좁아야 파동성을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집속이온빔밀링이라는 기술로 폭 62나노미터(나노는 10억분의 1)인 두 틈이 서로 272나노미터 떨어져 있는 이중슬릿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압전소자로 움직이는 가리개를 붙였다.
가운데가 창문처럼 뚫려있는 가리개가 이동하면 닫혀 있던 슬릿 가운데 슬릿1이 열리고 이어서 슬릿1과 2를 다 열고 다음에는 슬릿1이 닫히고 슬릿2만 열리고 끝으로 슬릿이 다시 닫힌다. 이때 전자총에서 나온 전자가 슬릿을 통과해 스크린에 도달하는 분포를 전자 입자 하나도 검출할 수 있는 고감도 검출기로 측정한 것.
왼쪽 사진은 가리개가 이동함에 따라 스크린에 기록되는 전자분포 패턴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슬릿이 둘 다 열려 있는 상태에서 전자를 하나씩 방출해 검출되는 위치를 기록하면 어느 순간 간섭 패턴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물리학저널 제공
위쪽 사진 중 왼쪽은 슬릿이 이동함에 따라 스크린에 검출된 전자 분포 패턴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 사진 왼쪽 위의 주황색이 가리개다. 맨 위에서부터 보면 가리개의 오른쪽 막힌 부분이 두 슬릿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스크린에 도달한 전자가 없다. 가리개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슬릿1이 열리고 스크린에 전자가 검출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리개가 이동하면서 슬릿2까지 열리기 시작하면서 스크린의 전자 분포 패턴이 파동의 간섭무늬를 보인다. 위에서 7번째 사진이 슬릿 두 개가 가리개 창 가운데 놓인 상태에서 전자가 검출된 경우로 가장 완벽한 파동성을 보인다. 그 뒤 가리개가 이동하면서 슬릿1이 닫히자 다시 입자로도 설명할 수 있는 연속적인 분포패턴이 나타난다.
연구자들은 다음으로 전자총의 세기를 극도로 줄여 1초에 전자 하나 꼴로 내보내게 했다. 그리고 두 슬릿이 열려있을 때 스크린에 닿은 전자 입자 하나하나를 검출해 위치를 표시했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위에서 두 번째부터 아래로 각각 전자 2개, 7개, 209개, 1004개, 6235개가 검출됐을 때 위치가 기록돼 있다. 209개일 때까지만 해도 무작위로 보이지만 1004개의 경우는 뭔가 줄무늬 패턴이 보이는 것 같고 6235개가 되자 간섭 패턴이 뚜렷이 드러난다. 마지막 데이터를 얻는데 약 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번 실험의 의의는 직업 물리학자들보다는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양자역학 세계의 본질과 신비를 멋지게 보여줬다는데 있을 것이다. 20여 년 전 필자가 학부에서 양자역학을 배울 때 수학적 어려움보다도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물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누군가가 양자역학은 본질적으로 직관에 반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만 해줬어도 맘 편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디에서인가 파인만이 말했던 것처럼.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양자역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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