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6일 토요일

의무교육 2100년… 로마제국에 나라 잃어도 학교만은 지켜냈다

 보통 나라들은 국가가 망하면 100년도 안 되어 역사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500년 이상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석 랍비가 북쪽 마을을 시찰하기 위해 두 랍비를 시찰관으로 보냈다. 두 랍비가 그 마을에 가서 말했다.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물어볼 일이 있소.” 그러자 그 마을의 경찰서장이 나왔다. “아니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이번에는 수비대장이 나왔다. 그러자 두 랍비가 말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것은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란 말이오. 경찰이나 군인은 마을을 파괴할 뿐이오. 교육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유대 전쟁 당시 유대인 1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가 망해도 유대교와 전통이 계승된다면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텔아비브 인근에 율법 학교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교육을 통해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림은 로마군에 패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유대 전쟁 당시 유대인 1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가 망해도 유대교와 전통이 계승된다면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텔아비브 인근에 율법 학교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교육을 통해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림은 로마군에 패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성경 읽기 위해 의무교육 시작



그리스에서 독립을 쟁취한 고대 이스라엘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년 재위) 여왕이다. 살로메는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왕은 그간 적대했던 바리새파를 산헤드린(최고 법원)에 받아들여 화해하며 그들의 구전 율법을 법률에 포함했다. 여왕은 국민 단결을 위해서는 먼저 신앙심을 고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앙심을 위해서는 모두가 성경을 읽고 익혀야 했으나, 많은 국민이 문맹이었다. 여왕은 가정 예배를 이끄는 남자들만이라도 모두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은 3000년 전부터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율법 학교 중심이어서 일반 서민들이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는 부족했다. 살로메 여왕은 전국 각지에 초등학교를 세워 남자들 모두에게 무료 의무교육을 했다. 세계 최초 공교육이자 의무교육이었다. 문맹이 98% 이상이었던 고대에 글을 읽고 쓴 유대인들이 상업과 교역, 금융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925년 히브리 대학교를 설립했다. 사진은 1935년 히브리대 물리학 수업 장면. /위키피디아
이스라엘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925년 히브리 대학교를 설립했다. 사진은 1935년 히브리대 물리학 수업 장면. /위키피디아

이렇게 유대인은 기원전부터 의무교육을 시행한 민족이다. 그런데 초등교육뿐 아니라 율법 학교 등 고등교육에 대한 무상교육도 그즈음 시작되었다. 이는 기원전 1세기 랍비 힐렐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랍비가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반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반은 율법 학교 수업료로 냈다. 그런데 하루는 한 푼도 벌지 못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붕 위 채광창에 엎드려 교실 안을 훔쳐보며 공부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선생님이 교실이 왜 이렇게 어둡냐며 천장을 보니 채광창을 막고 있는 힐렐의 몸 위에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학생들이 힐렐을 데려다 난로가에서 언 몸을 녹여주었다. 그 뒤 율법 학교도 무상교육이 실시되었다.

이후 힐렐은 최고 율법학자가 되었다. 하루는 이방인이 찾아와 “내가 이렇게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 내용 전부를 내게 가르쳐보시오”라고 말하자 힐렐이 서슴없이 답했다. “당신이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른바 ‘황금률’이라 부르는 말씀이다.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통찰력이 뛰어난 그는 유대 전쟁이 결국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랍비는 유대 민족이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자신이 직접 로마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함께 탈출 계획을 짰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스승의 시체를 성 외곽에 매장하여 성 안에 흑사병이 돌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제자들은 랍비가 든 관을 메고 성을 빠져나와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했다. 랍비는 장군을 만나 그가 머지않아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 하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에 내심 놀라며 예언이 이루어지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다.


같은 해 로마 황제 네로가 자살했다. 그 뒤 정치 군인 세 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를 군대가 황제로 추대했다. 랍비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69년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 대해 놀라며, 후임 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유대 교육이 소멸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유대인 포로들이 콜로세움 세워

로마제국이 가장 고전한 전쟁이 로마-유대 전쟁이었다. 오죽했으면 승전 후 이를 기념하여 최초의 개선문을 만들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 유대인 270만명이 있었는데, 전쟁 중 110만명이 사망했고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이 9만7000명이었다. 이 유대인 포로들이 건설한 게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전쟁으로 열심당,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때 유대교는 사두개파의 전멸로 제사장이 없어져 평신도들이 지키는 종교가 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사제 없이 공부를 많이 한 학자, 곧 랍비가 이끄는 전통이 섰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텔아비브 인근 야브네에 율법 학교를 세우고 매년 랍비를 길러내 세계 각지의 유대인 마을에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이후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이었다. 벤 자카이는 비록 나라는 망해 없어졌지만 학교를 통해 유대교와 전통이 계승된다면 유대 민족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생활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정체성, 곧 민족혼을 잃어버리지 않고 2000년 이상 간직할 수 있었다. 그만큼 교육의 힘은 무섭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히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대학 설립을 위해 모금 활동에 나섰다. 사진은 아인슈타인(왼쪽)과 하임 바이츠만 박사. 훗날 바이츠만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위키피디아







[아인슈타인·바이츠만… 이스라엘 건국 전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학 설립]

‘밸푸어 선언’이 1917년에 있었다. 이는 1차대전이 끝나면 유대인들의 나라를 팔레스타인에 세울 수 있도록 영국이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땅에 학교부터 세운 것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된 하임 바이츠만은 세계를 돌며 자금을 모아 테크니온 공대(1924년 개교)와 히브리 대학(1925년 개교)을 설립했다. 교육이 앞으로 탄생할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1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5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 인구는 65만명이었고, 아랍연합 인구는 1억4000만명이었다. 이스라엘군과 민간인들은 기적적으로 신생 조국을 지켜냈다. 테크니온 공대 졸업생들이 빵집 등 일터의 지하 공장에서 몰래 무기를 만들어 전쟁에 대비해온 덕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3년 만에 이스라엘 인구가 2배로 늘어났다. 이후 3차례나 더 중동전쟁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막아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방위산업을 근간으로 하는 벤처 기업들이 탄생해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했다. 오늘날에도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가 이스라엘의 교육과 산업을 이끌고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2000년 이상 역사적으로 증명해온 민족이 유대인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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