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 Violinist Sarah Chang

"내 연주는 내가 평가… 언론評은 안봐 가르치는 건 못하지만 뭔가 기여하고파"


▲ 아홉 살 때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작품을 담은 첫 앨범 ‘데뷔’를 비롯 사라 장의 음악적 성장을 보여주는 앨범들


'뼈 부러졌을 때도 연주 둔해질까봐 약 안먹었어요" "연주 여행이 좋아… 한 곳에만 머물면 미칠 것 같아" 2~3년 뒤까지 연주 일정 꽉 짜인 삶…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 엄마에 투정도
▲ 사라 장은“모든 공연 하나하나가 다 특별한 광채를 띤다”고 했다. 그는“같은 곡이라도 연주할 때마다 이전과는 다르게 연주하고 싶은 부분이 있고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어야 좋은 연주가 된다”고 했다.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28·한국명 장영주)은 무대 위에서 싱싱하게 빛났다.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Op.26을 연주하던 사라 장은 여유 있고 자신감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네 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여덟 살에 데뷔하고 아홉 살 때 음반을 냈던 천재소녀는 20년 동안 세계무대를 누비며 성장해 이젠 세계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연주경연대회에 나가 또래들과 경쟁해본 적이 없다. 열 살도 되기 전에 그의 재능을 발견한 거장들의 탄성과 지원 속에 곧장 정상을 향해 행진했다. 그는 한해 100~150회의 연주를 소화해내고 있고, 2012년까지 연주일정이 잡혀 있다.

사라 장은 3일 오전 울산 현대중공업을 찾아가 조선소를 견학했다. 붉은 재킷에 검은색 스키니 진을 입은 사라 장은 거대한 조선소를 돌아보며 몇번이나 "근사하다(cool!)"고 탄성을 질렀다.

"연주 때문에 세계 곳곳을 다니지만 사실 어딜 가도 콘서트 홀, 호텔, 식당 외엔 잘 안 가게 되거든요. 그러니 많이 돌아다녀도 거기 뭐가 있는지 잘 몰라요. 울산은 이번에 처음 왔거든요. 외할아버지께서 '거기까지 갔으면 조선소를 꼭 돌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연주 직전엔 어떤 준비를 합니까?

"연습을 조금 하고 낮잠을 자요. 저에겐 잠이 재충전이에요. 급하면 분장실에서 잠깐 잘 때도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커피는 안 마셔요. 감기에 걸리거나 아프더라도 연주할 땐 약을 안 먹어요. 어렸을 때 파리의 호텔방에서 발등에 물건이 떨어져 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약 안 먹고 그냥 연주했어요. 의사들은 걱정하지만 약을 먹으면 아무래도 좀 둔해질 수 있거든요."

―연주 일정을 갑자기 취소해본 적이 있어요?

"20년 연주생활 하면서 외할머니 장례식 때 딱 한 번이요. 취소하려면 할 수는 있어요. 하기 싫어서 취소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그래서 연주자에겐 자기단련이 굉장히 중요해요."

―20대 후반에 벌써 20년 경력 연주자가 됐어요. 너무 빨리 달렸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감사하게 생각해요. 음악세상(사라 장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은 굉장히 작은데 그중 최고 수준인 사람들은 늘 같아요. 최고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거의 바뀌지 않거든요. 제가 데뷔했을 때 만났던 지휘자 주빈 메타, 쿠르트 마주어, 샤를르 뒤투와 등 거장들이 여전히 활동해요. 일찍 시작한 덕분에 그분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어서 진짜 영광이지요.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도 알아요."

―얼마나 멀리 갈 건가요?

"손이 괜찮고 몸이 괜찮으면 할 수 있으니까요."

―한 50년 정도요?

"그건 좀 끔찍하고요. 제가 연주를 하며 행복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어 제 머릿속에 들어 있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지요."

평생 연주하며 사는 삶에 두려움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열두 살 때 이스라엘로 연주여행을 갔다. 당시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초청한 연주자나 지휘자를 호텔 대신 자신들이 소유한 근사한 저택에 묵게 했다. 그곳에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주쳤다.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날 저녁 공연을 위해 콘서트 홀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사라의 어머니가 공연까진 시간이 충분하니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들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마지못해 식탁에 앉았으나 빵과 수프를 먹으면서도 계속 초조해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로스트로포비치가 "오늘 갑자기 손님이 오는 바람에 연습을 하나도 못 했다"고 했다.

그날 밤 사라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낯선 저택의 적막한 어둠 속에서 사라는 건너편 침대에 누운 엄마를 불렀다.

"엄마, 아까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습 안 했다고 걱정하는 거 들었지? 나도 80살이 될 때까지 저렇게 살아야 해?"

당시 70세 가까웠던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날 연주할 곡은 분명 수백 번도 더 연습하고 무대에서도 수십 번 연주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사라도 자신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일찍부터 발휘할 수 있는 인생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안정적이에요. 음악세상에선 2~3년 앞일까지 다 결정돼 있으니까요. 저는 14살 때 이미 17살 때 스케줄이 다 잡혀 있었어요. 요즘도 그래요. 아직 다 짓지도 못한 독일의 한 뮤직 홀 개관기념 공연 일정이 2012년에 잡혀 있거든요. 줄리어드가 아닌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미리 잡아 놓은 연주 일정 때문에 포기했어요. 저처럼 조직적이지 못한 사람에겐 일정이 꽉 잡혀 있는 쪽이 오히려 마음 편한 점도 있어요."

사라 장이 17세 무렵 3개월쯤 쉬고 싶다고 했더니,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3년 후인 스무 살 때 쉴 수 있도록 석 달간 일정을 비워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무대 위에 있으니까 늘 화려하게 살 것 같아요.

"제 사촌동생이 '누나는 무대에서 30분 연주하고 나머지 시간엔 놀고 전화하고 여행하는데 그게 무슨 직업이냐'고 그래요. 그 30분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연습하고 리허설을 하는데요. 여행이 좋긴 하지만 항상 돌아다니니까 시차 때문에 몸이 늘 힘들어요. 지금이야 제 가정이 따로 없으니까 괜찮지만 앞으론 좀 균형을 잡아야겠지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누군가를 만날 시간이나 있어요?

"어휴, 그래도 시간 낼 거 다 내고 만날 사람 다 만나요."(웃음)

사라 장은 잘 웃는다. 질문을 하면 일단 "깔깔깔" 하고 큰 소리로 웃은 후 천천히 대답한다. 그 웃음이 그에게 잠깐 생각할 여유를 주는 듯했다.
▲ 울산 현대예술관에서 연주를 앞두고 리허설을 준비하고 있는 사라 장. 매년 한 번은 한국에서 연주를 한다.
―여가엔 뭘 하나요?

"쇼핑을 제일 좋아해요. 옷, 구두, 액세서리를 많이 사요. 요즘엔 핸드백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바이올린 케이스를 핸드백 삼아서 그 안에 모든 걸 다 넣고 다니기 때문에 백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일곱 살 아래 남동생과 영화도 자주 보고요.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평소에 워낙 많이 돌아다니니까요. 시간이 나면 그냥 집으로 가요."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있어요?

"이번 서울 연주에서 입은 옷은 돌체 앤 가바나 것이고요. 베르사체도 좋아해요. 연주복엔 돈을 아끼지 않아요. 대신 평상복은 아무거나 싸구려를 사 입어요."

―책을 읽을 시간은 있어요?

"집에서 책을 읽다가 놔두고 연주여행을 가잖아요. 얼마 후 돌아와 보면 앞에 읽은 부분을 다 잊어버려서 또다시 읽어야 해요. 그러니 책 읽기도 어렵지요. 여행 중에 산 책은 읽고 나면 다른 사람 줘요. 인터넷도 좀 했는데 그걸 하니까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휴식시간이 다 없어지더라고요."

―8살 데뷔 후 모든 연주에 대해 관객과 비평가의 평가를 받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합니까?

"언론에 실리는 연주평을 잘 안 봐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아예 보지 못하게 하셨어요. 좋은 평을 들으면 잘난 척을 하게 되고 나쁜 평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잖아요. 사람들이 제게 뉴욕타임스에 실린 평을 봤느냐고 가끔 묻는데 저는 정말 몰라요. 안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컸거든요."

―그럼 연주를 하고 나서 평가를 어떻게 하지요?

"그날 밤 제 만족도로 평가해요. 제일 중요한 건 어느 도시에 가서 표가 매진된 콘서트 홀에서 연주를 하고 그 후 또 초청을 받아 매년 꾸준히 가는 것입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느끼는 팀워크도 중요하고요."

―무대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지요?

"너무 어릴 때 시작해서 그런가 봐요. 무대공포증을 느낄 단계를 건너뛰어버린 것 같아요. 수줍은 성격도 아니고요. 어딜 가든 콘서트 홀과 분장실은 다 비슷하거든요. 거기만 들어서면 금방 마음이 편해져요."
―어렸을 때부터 표정이 너무 여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거울 보고 표정 연습도 해요?

"어휴,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해요. 연주하는 동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 해요. 연주자들 중엔 휴대전화나 기침 소리가 방해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런 거 못 들어요. 연주자는 불이 나도 상관 안 하고 그냥 계속해야 하는 거예요."

―운동선수든 가수든 대중의 우렁찬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아본 사람은 평생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요.

"엄청나게 놀라운 감정이에요. 너무 감사하고요. 특히 한국 청중들은 참 따뜻해요. 다른 곳보다 더 열렬해요. 그래서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막 더 하고 싶어져요. 음반 녹음을 해도 저는 무대에서 하는 것을 좋아해요. 청중의 에너지와 흥분을 느낄 때 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게 연주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그래서 음반 녹음도 가능하면 다 라이브(live)로 해요."

―음반 녹음과 무대는 어느 쪽이 재미있어요?

"저는 무대 연주가 좋아요. 그래도 레코딩은 어떤 순간을 잡아서 딱 고정시키는 좋은 작업이지요. 요즘은 음반 시장이 어려우니까 꼭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만 만들어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하기까지는 상당히 기다렸고 바흐는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녹음하고 싶다고 했는데,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어떤 곡은 줄리어드에서 어릴 때 배웠으니까 늘 연주할 수 있어요. 브람스와 모차르트는 좀 더 나이 들어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냥 연주했어요. 무대 위에 서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며 배우는 게 굉장히 소중하거든요."

―자신과 잘 맞는 작곡가가 있지요?

"브람스, 시벨리우스, 멘델스존을 좋아해요. 그러나 중요한 바이올린 곡들은 다 편하고 자신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악기가 그런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할 때 좋은가요?

"과르네리 델 제수를 쓰고 있는데, 아주 남성적인 악기예요. 깊고 강렬하고 어둡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곡들과 어울려요. 17세 때 제 걸 샀지요. 과르네리는 쓸 만한 게 100개 정도 남아 있다는데 대부분 박물관에 있대요."
―기술은 요즘이 더 발달했을 텐데 왜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지 못할까요?

"제 건 300년 됐거든요. 그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고 저도 생각해봤는데, 자연스럽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는 동안 생기는 효과가 아닌가 싶어요."

―레퍼토리는 어떻게 정합니까.

"성격과 그 시점의 감정 상태가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쇼스타코비치의 경우엔 극적이고 무겁고 우울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해요. 스탈린 체제에 살면서 몰래 썼던 작품이라 굉장히 답답한 부분도 있지요. 그런 걸 이해해야 하니까 여덟 살 때 연주하긴 어려워요. 바흐는 평화와 고요함이 좀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로스트로포비치가 70대가 돼서 녹음했다는 말을 듣고 제가 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좋아하는 연주를 하며 돈도 번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열 몇 살 때까지 바이올린 연주와 돈 번다는 것을 연결시켜본 적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어요. 물론 좋은 음악가는 돈 때문에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음악에 모든 걸 쏟아 부어도 시간이 부족한데 돈까지 걱정할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중요하긴 하니까 제가 신뢰하는 분들이 대신 관리해줘요."

―돈의 의미를 언제 깨달았어요?

"아주 어릴 땐 부모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니까 몰랐지요. 그땐 연주를 마치면 엄마가 평소 못 먹게 하던 콜라를 사주셨어요. 그게 너무 행복했어요. 하하… 그땐 보상이 콜라였어요. 그러다가 14~15세 되니까 엄마가 저보고 직접 결정하라고 했어요. 처음엔 레퍼토리, 다음엔 누구와 같이 연주할지, 그 다음엔 돈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게 하셨어요. 저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 제가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많은 연주자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연주여행을 줄이기도 하잖아요.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지금 이게 좋아요. 전엔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도 연주를 하다가 크리스마스 때 쉰 지 2~3년 되거든요. 처음엔 굉장히 좋았어요. 마치 생체시계가 정상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면 한군데 있다는 게 미치겠어요."

―연주 일정이 계속 잡혀 있으면 몸과 마음을 다음 작품에 맞게 빨리 전환시켜야 하지요?

"제 솔리스트 친구 중엔 그런 식으로 연주곡을 자꾸 바꾸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일 년에 몇 곡만 집중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제겐 별로 어렵지 않아요."

―여러 곡을 한꺼번에 준비하려면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돼요. 몇 년 전 런던에서 차이코프스키 곡을 연주하기로 했는데, 그 직후엔 바르토크 연주가 잡혀 있었어요. 바르토크는 손이 좀 많이 가는 작품인데다가 연주한 지 오래 돼서 호텔방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요. 5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왔어요. 같은 층에 묵던 지휘자가 제가 연습하는 걸 듣고 깜짝 놀라서 '우리가 바르토크를 하기로 했니? 나는 차이코프스키 악보만 가지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니라고 안심시켜줬지요."

―연주자들은 연주 자세에 영향을 주는 테니스 같은 운동은 안 한다면서요?

"저는 그냥 해요. 동생이 테니스를 좋아해서 같이 쳐요. 연주 전날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안 그래도 연주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는데 다른 문제까지 까다롭게 굴면 너무 피곤해져요."

―세계 정상급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물론 음악 애호가들과 교류하니까 인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한번은 유럽에 계시는 우리나라 대사님이 저를 위해 만찬을 열어주셨어요. 저보고 초대하고 싶은 사람을 정하라고 하셨어요. 대사관에서 제가 작성한 초청자 명단을 보더니 '정말 이 사람들이 다 온다고 했느냐'고 놀라면서 더 부르래요. 한자리에 모으기 어려운 분들이라고요. 현지 유력 언론사 사장 등 오케스트라 후원자들인데 연주 끝나면 늘 만나는 분들이지요."

―음악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해 하는 일이 있거나, 할 계획이 있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하려고 그래요. 지금 하는 건 주로 학교에 가는 겁니다. 오케스트라의 교육 프로그램이 많아요. 가는 도시마다 학교에 가서 연주하고 질문도 받고 세미나를 할 때도 있어요. 제 직업이 음악가니까 음악으로 기여를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가르치는 일은 잘 못 하겠더라고요.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줄 순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워요."

―2002년 평양에 가서 연주를 했지요?

"아무도 못 가는 그런 폐쇄된 사회에 예술가들은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지요. 처음엔 그쪽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잘 몰랐고 좀 무섭기도 했어요. 그런데 북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너무 잘하더라고요. 도대체 저걸 어디서 배웠나, 어떤 시스템으로 음악교육을 하기에 저렇게 잘하나 싶어서 학교도 좀 구경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었지요.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제2의 사라 장'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건가요.

"음악을 업으로 택한다는 건 전 생애를 바치는 일이니까 그걸 알고 준비해야 해요. 하지만 일단 택한 후엔 보람이 정말 커요. 행복을 주지요.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니까요. 연주는 할 때마다 늘 다르거든요."

사라 장(장영주)은…

어려서는 '천재'이자 '신동', 요즘은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바이올리니스트. 무대에 서면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애교 넘치는 발랄한 20대다.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은 잘 못하고 투표권은 행사해본 적이 없다.

투표하게 되면 정당보다는 인물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한다. 요리실력은 빵점. 먹는 것만 좋아한다. 그래도 떡볶이는 만들 줄 안다. 2~3일 간격으로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때문에 '하이힐 신고 공항에서 뛰는 것'이 몸매관리 비결이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다 보니 시차적응은 아예 하지 않고 산다. 바이올린이 워낙 예민한 악기라 성격이 까다로울 것 같지만 의외로 털털하다. 1980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Sarah Chang (born December 10, 1980) is a Korean-American violi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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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life

Chang was born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of Korean heritage. Min-Soo Chang, her father, is a violinist and Myoung Jun Chang, her mother, is a composer. Her family had moved to the United States in 1979 so that Chang's father could study for an advanced music degree at Temple University. Her mother was taking composition classes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Sarah liked to play one     -finger melodies on the piano at the age of 3 but asked her parents for a violin, started playing a rented one     -sixteenth-size violin at 4 and auditioned for the Juilliard School at 6 playing the Bruch Violin Concerto. She was admitted into the studio of the late Dorothy DeLay, violin teacher to some of the world's great violinists including Itzhak Perlman, Midori Goto, Gil Shaham, Shlomo Mintz and many others, including Chang's father Min-Soo Chang. She was also taught by Hyo Kang, a former student and assistant of DeLay. She kept attending grade school in the Philadelphia area and studied music on Saturdays at Juilliard.
Chang was recognized as a child prodigy early on and when she was 8,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audition with such names as Zubin Mehta and Riccardo Muti, who were working, respectively, with the New York Philharmonic and the Philadelphia Orchestra. Both gave her immediate engagements.
At 9, she was possibly the youngest violinist ever to record. Her first album, aptly entitled Debut, was recorded in 1989 when she was nine years old, but was not released by EMI Classics until 1992. It quickly reached the Billboard chart of classical best-sellers. Her teacher in an interview claimed that no one      had ever seen "anything like her."

C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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