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미·적분 창안 뉴턴이 데카르트를 버렸다


전 세계의 물리학도들이 절차탁마하는 많은 교과서에는 뉴턴의 다음과 같은 경구(警句)가 실려 있다. "나 자신에게 나라는 존재는 눈앞에 펼쳐진 진리의 바닷가에서 놀면서 이따금 좀 더 매끄러운 자갈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내면 즐거워하는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물리학을 창설한 위대한 뉴턴조차 순수한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했다는 고백에 숙연해지지 않을 뉴턴의 후학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인 저자 제임스 글릭(Gleick)은 "정작 뉴턴은 바닷가에 가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만치 뉴턴의 삶은 비밀에 휩싸였다. 일반인들에는 난해한 이론이 뉴턴을 접하는 장애물이었다면 학자들에게는 선입관이 장애물이 었다. '고매한 이론만큼이나 뉴턴의 영혼도 그러하리라'는 선입관 말이다. 저자 글릭은 현란하면서도 문명의 물줄기를 바꿔 놀 정도로 파괴력 있는 뉴턴의 이론에 함몰되지 않고 처절한 외로움과 야망으로 범벅이 된 뉴턴을 되살려 냈다. 때문에 뉴턴의 이론에 질려버린 이들이 감히 품지도 못했던 질문들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예컨대 당시 소수의 수학 엘리트만이 이해하는 미·적분을 뉴턴이 어떻게 창안하게 됐는지이다.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면 전개 과정은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1664년을 전후로 20대 초반의 청년 뉴턴이 깨트려야 했던 대상은 당시 철학·기하학의 거두였던 데카르트였다. 미·적분의 근간을 이루는 무한소(無限小)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뉴턴은 데카르트를 버려야 했다. 데카르트는 "우리는 무한에 관한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는 유한하므로 우리가 무한에 관한 어떤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0과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0과는 다른 무한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적분은 태어날 수 없었다. 뉴턴은 고민 끝에 데카르트를 떠났다. 시대의 근간을 떠나자 뉴턴에게는 신천지가 열렸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했던 천체들을 지상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됐다. 뉴턴의 신천지는 우주의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들은 반드시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 법칙이었다. 뉴턴은 경외의 대상이었던 해·달·목성 등을 모두 만유인력에 종속된 사물로 격하시켰다.

불과 20대에 도전한 파격이 온 세상을 흔들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인지 뉴턴의 파격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연금술에 매달렸다. 여기에는 신학적 열망도 컸다.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은 신학적으로는 영혼의 정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뉴턴은 신학에도 매달려 자신만의 체계를 세웠다. 사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국 국교회의 사제 서품을 받기도 했다. 그는 결국 기원 후 4세기에 확립됐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 연금술과 삼위일체 교리 부정은 모두 지탄의 대상이었다. 논증이 일으킬 사회적 파문 때문이었는지 뉴턴은 이런 결과물들을 절대 외부와 공유하지 않고 일기장 형식으로 자신 안에서만 일궈 나갔다. 글릭은 최근에서야 알려진 연금술사이자 이단 신학자인 뉴턴의 속내를 보여 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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