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휠체어 탄 의사로 장애인 돕는 금메달감 인생

휠체어 탄 의사로 장애인 돕는 금메달감 인생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 26층 라운지. 휠체어에 앉은 40대 남성이 양손에 검은색 장갑을 낀 채 라운지에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로 이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사지마비를 딛고 미국 최고의 재활의학 전문의가 된 존스홉킨스대학 이승복(44) 교수다. 그는 물집이 크게 잡힌 왼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 손 때문에 인생의 밑바닥도 맛봤지만, 성공도 일궜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안 타고 일부러 장갑을 끼고 수동휠체어를 타는 것도 손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지요."

그가 "손 때문에 인생의 밑바닥을 맛봤다"고 하는 것은 체조하다 몸을 다친 까닭이다. 8살 때 약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에 이민 갔다. 우연히 TV에서 한 루마니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11살 때부터 체조를 배웠다. 부모는 "왜 힘들 게 운동을 하냐. 의사나 변호사가 돼라"고 뜯어말렸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고 싶다"며 체조에 열중했다.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10대 시절 그의 꿈이었다. 고3 때인 1983년, 미국인 코치가 "공중돌기를 더 연습하라"고 닦달하자, 오기가 나서 2회전 공중돌기를 시도하다 미처 손으로 몸을 떠받치지 못하고 등부터 땅에 떨어졌다.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목 아래를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부모 말 안 듣더니…" 하고 괴로워했다.

이씨는 "휠체어 탄 의사로 장애인을 돕는 것도 금메달감 인생"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매일 5시간씩 앉아서 공부하고 1~2시간 쉬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에 입학했고, 컬럼비아대를 거쳐 다트머스 의대에 진학했다. 이후 미국 명문 존스홉킨스대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되어 2005년 6월부터 매일 14~15명씩 척수마비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 교수는 "고교 시절 내 별명이 이름 앞 자를 딴 '수퍼 보이'(Super Boy)였는데, 사지마비를 이겨내고 의사가 되니까 남들이 '수퍼 보이'에서 '수퍼맨'으로 바꿔 부르더라"고 했다. 그는 "매사를 '올림픽 결승전'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장애인이 된 지 24년이 됐지만 아직도 불편해요. 특히 응급 환자를 볼 때, 곧바로 가까운 계단을 뛰어올라가면 되는 다른 의사들과 달리 저는 수십m 떨어진 엘리베이터까지 가야 하니 답답하지요. 그때마다 '남의 인생이 더 좋아 보이게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요.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면 더 답답했을 텐데 이만해도 감사한 일이죠."

이 교수는 2005년 자서전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황금나침반)를 펴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미국 국가대표팀 주치의였고, 2002년부터 작년 3월까지는 한국 태릉선수촌 주치의를 지냈다.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대, 한양대 의대생들에게 재활의학에 대한 특강도 해왔다. 그는 오는 20일 연세대에서 학생과 교직원 15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뒤 31일 미국으로 출국한다.

17일 서울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美 최고의 재활의학 전문의가 된 이승복씨가 자신에게 손이 어떤의미인지 얘기하고 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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