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간절한 꿈 있으면 간절한 노력 나온다"


 
경기고 진학 후 성적 곤두박질 쳐
고2 여름 엉덩이에 땀띠 나게 공부
지금도 피부 불그죽죽… 대중탕 못가
낙제판정 받은 지 1년 만에 전교 1등

고승덕(51) 국회의원은 학창시절 '외계인'으로 불릴 정도로 남달랐다. 지독한 노력가인 그는, 오한을 느낄 정도로 많은 천재들과 공부를 다퉜다. 남들이 3번 책을 보고 치는 시험을 10번 보는 인내로 공부했다. 1978년 당시 사법고시(20회) 최연소 합격, 이듬해 외무고시(차석), 행정고시(수석)에 차례로 합격했다. 그러나 지적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고시 3관왕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낯선 유학길을 택했다.

꿈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실현하기 어렵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간직하면 힘이 생긴다. 그는 꿈을 위해 나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판사, (국제)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쉬지 않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그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만났다.

■"인생은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구나"

그는 원체 천재형이 아니었다. IQ 공개를 꺼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배우면 금방 잊어버려 남들보다 더 공부해야 했다. 고교 시절, 친한 친구 10명과 똑같이 공부했는데 혼자 낙제점수를 받은 일도 있다. "난 남들보다 노력을 더 많이 해야지 남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학교(광주 무등중 졸) 다닐 때는 최상위권이었지만, 수재들만 득실거리는 경기고에 진학하자 성적이 곤두박질쳤어요. 사투리가 심해 놀림까지 받았습니다. 급기야 고2에 올라가자마자 '구제불능' 판정을 받았지요. 선생님께서 '그 성적으로 대학 못가니 공부는 단념하고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셨어요.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2 4월부터 죽어라 공부했다. "머리 좋고 집안 좋은 학급친구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러웠다"고 했다. 공부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해 여름방학을, 그의 표현대로라면, '죽어라' 공부했다. 엉덩이에 땀띠가 날 정도로 책상에 눌러 앉았다.

"요즘도 대중탕에 안 갑니다. 고교시절, 땀띠 때문에 엉덩이 살이 다 벗겨져 지금까지 피부가 불그죽죽해서요. 그때 '이렇게 절박하게 공부해야 되느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지 남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어린 마음에 '인생을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는 팔자구나'고 생각했죠."

고2 여름방학을 그렇게 보낸 후 2학기 첫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고3이 돼서는 결국 전교 1등을 했다. 고2 때 낙제판정을 받았다가 꼬박 1년 만에 전교 1등이 된 것이다.
■"공부도 전략이 필요하다"
어떻게 공부했을까. 무작정 책상머리에 앉았을까. 고 의원은 "지능이나 기억력이 별로라는 생각"에서 친구들이 3번 책을 볼 때 7~10번 봤다. "6번만 봐도 불안했다"고 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일찍 공부계획을 세워야 했고, 길게 시험준비를 했으며 공부량도 몇 곱절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막연하게 시험날짜만 쳐다보면 긴장감이 떨어지잖아요. 남아있는 시험기간이 석달쯤 된다고 치면, 구체적인 공부계획을 짜 '손(으로 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공부해야 될 목표가 분명하다면 시험과 상관없이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마치 공부할 시간이 많은 것처럼…."

공부방법도 인상적이다. 가장 쉬운 교재에서부터 고난도 교재까지 수준별로 봤다. 기본서적을 3번 정도 푼 뒤 차례로 어려운 문제를 골라 풀었다. 문제가 안 풀릴 때는 오래 끙끙대기보다 답지를 봤다. "솔직히 기초가 안 돼 문제와 답을 동시에 봤다"고 한다.

"계속해서 문제와 답을 번갈아 봤어요. 문제만 봐도 답이 생각날 때까지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대학시절 고시공부할 때도 문제와 답을 동시에 봤어요. 자연스레 공부진도가 빠를 수밖에 없는데, 그런 만큼 첫 단락부터 다시 반복학습을 할 수 있었지요. 어떤 시험이든지 시간만 충분하면 못 풀 문제는 없다고 봐요. 시험시간이 짧아 제대로 답을 못씁니다. 공부 승패는 짧은 시간에 정확한 답을 쓸 수 있는 능력이 결정합니다."

■"꿈을 찾는 자율형 인간이 되어라"

그는 고시 3관왕을 이룬 뒤 곧바로 법조계로 나가지 않았다. 사법연수원을 다니며 1982년 서울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뒤 당시 한국고등교육재단(故 최종현 SK회장 설립)의 도움으로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정치학 박사공부를 하던 도중 귀국, 1984년 9월 수원지법 판사임관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공부편력'이 도져 2년 뒤인 1987년 도미(渡美), 하버드대(석사)와 컬럼비아대(박사)를 졸업했다.

"고시 3관왕이 화려해 보이지만 새로운 도전에 목말랐어요. 대학동기들이 국내에서 승승장구할 때 청바지에다 가방을 둘러메고 학비걱정하며 낯선 외국에서 공부하는 자신이 불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부모 손을 빌린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도전을 택했다. 현재의 모습이 초라하지만 미래를 보았다. "간절한 꿈(목표)이 있으면 간절한 노력이 나온다고 믿었다"고 했다.

"누구나 간절히 되고자 하면 간절한 노력이 나옵니다. 자기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금방금방 잘 잊어먹습니다. 그러니 시험칠 때 고통을 많이 받았지요. 현실에 충실한 것도 성공에 도움이 안돼요. 좋고 입에 단 것만 찾는 현실이 미래를 보장하지 안잖아요. 미래가 가장 중요해요. 머릿속에 무엇을 담아두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돼요. 저는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꿈을 가지고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요."

그는 공부 잘하는 범생이에 머물지 않았다. 꿈을 꾸며 도전했다.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됐지만 새로운 도전을 계속했다. 국제변호사, 방송패널리스트, 펀드매니저, 투자 자문사 대표와 대학 교수가 됐다. 자원봉사에 관심이 많아 NGO를 만들었으며 혼탁한 정치판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이 됐다. 정치인이 된 그는 아직도 꿈을 꾼다.

"현재 '플러스 인생'이 미래를 가져다 주지 않아요. 10년 뒤 자신의 비전을 보고 준비한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꿈이 중요합니다. 꿈을 찾는 자율형 인간이 되세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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