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위선적인' 생각의 힘?


"공익을 위한 봉사" 자꾸 듣다 보면 어느새
머리에 박힌다 그렇게 행동이 바뀐다

미 국무부 법률고문에 지명된 해럴드 고(고홍주) 예일대 법대 학장이 지난주 상원 인준청문회에 나왔다. 그는 "공직에 봉사하는 것이 나의 일생에서 (미국에) 진 빚을 갚는 길"이라고 했다.

미국 엘리트들이 수시로 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참 어색했다. '이기적이라도 좋다. 공부만 잘해다오'라는 분위기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버드나 예일 등 명문 교육기관에 가면 이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혜이므로, 엘리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몇년 전 해럴드 고 학장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도 그는 이 메시지를 반복했다. 그는 "로스쿨의 첫 수업은 늘 '이기심이 아니라 봉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로 시작한다"고 했다. 고 학장이 학생들에게 강조한다는 구체적인 메시지는 더 흥미로웠다. 우선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좋지만 직접 기여할 수 없다면 돈을 많이 벌어 기부금이라도 내라"고 격려한다고 했다. 직장을 구할 땐 "연봉 몇백만원 차이를 기준으로 결정하지는 말라"고 조언한다. 정말로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일이 아니면 평생 재미있게 일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걸 명심하라는 뜻에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라이프스타일의 노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수입으로 최대치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 돈을 벌면 벌수록 기대는 더 높아진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면 포기하기 어렵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을 희생할 수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 높은 보수 받는 걸 경계하라고 했다.

그가 그날 인터뷰에서 한 말 중 마음에 남은 건 명문대 입학 자체가 성취일 순 없다는 깨달음을 안고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고 학장은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예일대에서 가르쳐왔다. 고 학장의 가족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성공한 가정교육 사례로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화려한 학벌을 자랑한다.

고 학장의 부친 고 고광림 박사와 모친 전혜성 박사(뉴 헤이븐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 그리고 4남2녀가 모두 미국에서 최고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 하버드와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 예일대학 등을 졸업했고 이들이 받은 박사학위만 10개가 넘는다. 고 학장의 형인 하워드 고(고경주) 하버드대 공중보건대 부학장도 이번에 보건부 차관보에 지명됐다.

고 학장은 하버드대 합격 직후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찬사가 쏟아지자 훌륭한 일을 한 듯해서 잠시 우쭐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나는 "대학 입학은 성취가 아니다. 그 학교에 진학해서 그 후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생보다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도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 더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믿고 살았다고 한다.

고 학장은 미국 로스쿨 중에서도 공직진출 비율이 높은 예일대 교수니까 당연히 이런 말을 하려니 싶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만나보고 나의 선입견이 깨졌다. 그들은 "하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공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박혀 늘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 결과 학점벌레가 되기보다는 더 큰 생각을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더라고 했다.

미국 명문대들이 공익과 봉사를 강조할 땐 솔직히 '위선적'이란 느낌이 먼저 들었다. 실제로는 죽기 살기로 경쟁하면서 포장만 근사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만히 두면 이기적으로 변하는 본성을 그렇게 끊임없이 단련하면 사회가 원하는 쓸 만한 인재가 태어난다. 결국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의 힘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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