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일요일

장욱진(張旭鎭)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부인 이순경 여사와 함께 한 화가. 장욱진
  

화가는 항상 이렇게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작업을 했다.

  
동경 유학생 출신의 모던 보이었지만 동양 정신에 충만한 작품 세계를 남긴 장욱진. 그는 인생은 소모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장욱진 연보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결성 장씨 기용(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음력 1917년 11월 26일)
1922년 (5세) 일가가 서울 당주동 한옥으로 이사
1923년 (6세) 부친 별세, 고모 옆집(내수동)으로 이사
1924년 (7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서울사대부초)입학하다.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여 다섯 살 위인 형에게 꾸지람을 자주 듣다. 까치를 많이 그리다.
1926년 (9세) 보통학교 3학년생인 그의 그림을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주최의 <전일본 소학교미전>에 출품, 일등상을 받다. 처음으로 유화를 시작하다. 이후 미쓰코시 백화점 주최.
1930년 (13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입학하다.
1932 (15세)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데 대한 징계로 경성 제2고보를 중퇴.
1933년 (16세) 중퇴 이후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 수덕사(만공선사 선실)에서 6개월간 정양. 때마침 수덕사를 찾아왔던 화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1936년 (19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육상(높이뛰기)과 빙상선수로 활약.
1937년 (20세) 동아일보주최<학생미전>에서 가작상을 두 차례 수상.
1938년 (21세) 조선일보 주최<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공기놀이》를 출품하여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하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다.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그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다.
1939년 (22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23회)하다.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
1940년 (23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소녀》로 입선.
1941년 (24세) 4월 12일, 이병도박사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
1942년 (25세) 장남 정순 출생.
1943년 (26세) 9월, 일본제국미술학교 졸업. <선전>에《언덕》이 입선.
1944년 (27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경기도 평택 비행장 건설작업에 동원. 이후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서울 회현동)의 경리요원으로 배속.
1945년 (28세) 장녀 경수 출생. 해방 후 국립박물관(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일. 박물관 내 관사에 거주.
1947년 (30세) 차녀 희순 출생. 국립박물관 사직.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과 '신사실파'결성.
1948년 (31세) 12월, 동인전<제1회신사실파전>(화신백화점)에 출품.
1949년 (32세) 11월,<제2회신사실파전>(동화백화점)에 《독》,《조춘》, 《面》,《마을,》《까치》,《몽》,《방》,《원두막》,《점경》,《수하》,《아이》등 유화 13점 출품.
1950년 (33세) 6.25발발 후 바로 피난가지 못하고 가족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
1951년 (34세) 1월 초 부산으로 피난. 여름에 종군화가단(중동부전선 제8사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종군작가상 수상.
1952년 (35세) 제4회 종군화가단전<3.1절 기념 종군화가미술전>(부산 대도회 다방)에 출품.
1953년 (36세) 피난지 부산에서 어린이 동화책의 컷을 많이 그리다.《자동차 있는 풍경》을 제작. 5월 말<제3회 신사실파전.
1954년 (37세) 3월, <제6회 종군화가전>(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 7월, 대한미협전<한국현대회화 특별전>에 출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 교수 취임. 동료 미대교수 노수현과 친분. 4녀 윤미 출생.
1955년 (38세) 「문학예술」지에 "발상과 방법"기고.
1957년 (40세) <동양미술전>(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58년 (41세) 11월 20일, 동경제국미술학교 동문전인 <백우회 제1회전>(국립박물관 화랑)에《樹下》를 출품. <한국현대작가전>(미국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60년 (43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 사임. 명륜동(2가 22-2)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
1961년 (44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출신의 동문화가들인 권옥연, 유영국, 이대원, 김창억, 임완규 등과 '2·9동인회' 조직, 그<제1회 2·9동인전>(국립도서관 화랑)에 《산수》등 유화 2점 출품.
1963년 (46세) "덕소시절"(1963-75).
1964년 (47세) 차남 홍순 출생하다. 제1회 개인전(반도화랑, 11월 2일-8일)을 개최.
1967년 (50세) <제5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하는 등 서울대 제자들과 그룹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자극을 받음.
1968년 (51세) <제6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69년 (52세) 3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의 「書舍餘話」란에 수필 발표. ("표현", "죄가 있다면", "발산", "저항", "나의 주변")
1970년 (53세) 정초에 명륜동집에 머물던 중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착상, 덕소로 돌아온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아내의 초상화《진진묘》. 이 그림을 그린 뒤, 명륜동에 돌아와 3개월간 앓아 눕다.
1972년 (55세)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에 《모기장》등 4점 출품.
1973년 (56세) <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과 <제11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74년 (57세) 제1회 개인전 이후 십년 만에 제2회 개인전(공간화랑, 4월12일-18일)을 열고, 근작 중심의 유화 32점 출품.
1975년 (58세) 5월, 덕소생활을 청산 "명륜동시절"(1975-79)시작.
1976년 (59세) 불교인 백성욱 박사와 함께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아다녔고, 그 영향으로 《팔상도》와 《사찰》등의 작품을 제작. 잡지,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발간.
1977년 (60세)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1892-1982)을 만나 법명 비공(非空)을 얻다.
1979년 (62세) 차남 홍순 사망. <화집발간 기념전시회>(현대화랑, 10월11일-17일)에 유화25점, 판화 13점, 먹그림 18점 출품.
1980년 (63세) 봄,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사용, "수안보시절" (1980-1985)시작.
1981년 (64세) 개인전 직전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장욱진 개인전>(공간화랑, 10월 11일-17일)에 유화 20여점, 에칭판화 5점 출품. <앙가주망 20년>1,2부에 출품.
1982년 (65세) 7월 중순, 부인과 함께 여류화가들의 미국여행에 동행. 이때 가지고 간 유화,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먹그림으로 재미화가 김봉태의 갤러리스코프(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욱진전>개최.
1983년 (66세) 3-4월,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여행(스페인,영국,이태리,프랑스). 근작 석판화 4점과 함께 판화집 출간기념<장욱진 판화전>(연화랑, 10월 22일-29일)개최.
1985년 (68세) 엔티크 컬러 사용을 중지하다. 수안보 화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 <한국 양화70년전>(호암갤러리)에 출품.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를 끊다.
1986년 (69세) 겨울동안(1월 중순-2월 말)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 등으로 개인전<장욱진 작품전>(국제화랑, 6월 12일-19일)개최.
1987년 (70세) 2월, 대만과 태국을 여행. 화집발간 기념 개인전<장욱진전>(두손갤러리, 5월 28일-6월 6일)개최하다. 유화 80여점 출품.
1988년 (71세) 1월에 딸, 며느리와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 12월, 발리섬으로 여행.
1989년 (72세) 7월, 경기도 신갈의 한옥 옆에 양옥을 짓고 입주. 가을, <한국현대화전>(미국 뉴저지주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 유화8점 출품. <1900년대 한국미술대표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
1990년 (73세) 가을, 고향의 생가 방문. 미국 '한정판 출판사'The Limited Editions Club)선정 수제작(水制作) 한국관련 도서의 그림을 맡기로 위촉. 12월 27일 점심식사 후 갑자기 발병, 오후 4시 한국병원에서 타계. 12월 29일 영결식(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
1991년 3월,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기념비 건립(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 열화당미술문고 211/ 김형국 지음 / 열화당 / 1997년 - "나는 화가 장욱진이란 사람, 그리고 그의 그림을 사랑한다. 이 글은 바로 그 체험적 사랑을 적고 있다. 그림에 관해 학문적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적는 것은 사랑이 글로 적을 만한 대상이고, 그 사랑이 체험을 글로 옮겨야 한다는 용기를 줄 만큼 높기 때문이다." 가격이나 판형 모두 가장 적당한 책이다. 장욱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이들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이다. 도판의 상태나 사진, 해설 모두 좋은 편이다. 나는 장욱진에게 있어 동생 테오 역할을 김형국 선생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사람 장욱진』/ 김형국 지음 / 김영사 / 1993년 - 장욱진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의 지인들이 모여 그야마로 그 사람 장욱진을 논한 책이다. 현재는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소설가 강석경을 비롯해 쟁쟁한 여러 인물들이 자신이 만나본 장욱진의 여러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김형국 엮음 / 열화당 / 1999년 - 이 책에는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욱진의 매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회고가 담긴 뒷 부분이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장욱진에게 시집와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의 삶과 애환이 잘 녹아 있다. 애써 고상이나 교양을 가장하지 않아도 예술가의 아내는 고상하다.
『장욱진 카탈로그 레조네 - 양장본』/ 정영목 지음 / 학고재 / 2001년 - '레조네(raisonne)'라는 것은 어느 작가의 '전작도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그리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진품인가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철저하게 제작되는데 반해서 그동안 우리 미술계는 너무 영세한 탓도 있었겠지만 주먹구구식의 작품 관리로 레조네는 엄두도 못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해 나온 장욱진의 레조네는 매우 의미있다. 게다가 그림 하나하나마다 제법 충실한 해설이 덧붙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당한 금전적 출혈이 있어야만 소장할 수 있는 책이다.
『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민음사 / 1999년 - 장욱진 스스로가 쓴 글과 먹그림들이 녹아 있는 매우 고졸한 맛이 있는 산문집이다. 동심의 천진난만한 모습인 듯하면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세상과 대결했던 화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쟁을 겪으면서 장욱진은 폭주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장욱진에게 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이거나 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림을 그리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가 장욱진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살았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때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로) 그림만 그렸다.
  그의 피난살이는 그의 자화상인 <보리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가족을 찾아 텅빈 길을 걸어간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화면을 좌우로 나누고 구획짓듯 나뉘어 있고, 피난길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한 사내가 걸어간다. 그러나 길은 붉다. 장욱진이 피난에서 돌아와 집을 찾으니 살던 집은 죄다 부서지고, 화가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쟁통에 오랫동안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욱진과 부인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했다. 화가는 잡지에 삽화를 그렸고, 부인은 조그만 책방을 차려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쟁을 통해 화가 장욱진에게 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장욱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도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집 가(家)자가 붙은 화가로 불리기를 항상 희망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하나의 완성체였는지 모른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족, 캔버스에 유채,17.5×20.0㎝, 1973 - 장욱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들이 거의 다 등장한 그림이다. 네 마리의 새, 집과 나무, 길과 가족. 뒤의 붉은 해와 산은 어찌보면 십장생도 같기도 하다.
강가의 아뜰리에
  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할 무렵만 하더라도 덕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낭떠러지 같은 한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곳 덕소의 비와 달, 바람 그리고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길 즐겨했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거짓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와 화풍의 변모를 가리켜 사람들은 청색 시대니 장밋빛 시대니 하고 구분하듯이, 나무가 사시사철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모해가듯이 화가 장욱진의 작품 세계도 여러 차례 변해갔다. 그런데 장욱진의 변화가 다른 화가들과 좀 특이한 것은 사는 집이 달라질 때마다 그 세계가 조금씩 변해갔다는 것이다.
  앞서 장욱진에게 있어 집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지만, 그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자,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살 집을 짓는 일도 곧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욱진은 집을 짓는 동안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만큼 집에 대해 애정을 보였다(그에게는 집도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보존상태가 매우 나쁜 형국이다). 화가 장욱진은 덕소에서, 서울 명륜동으로, 다시 수안보로, 용인으로 이사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화가는 덕소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그림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서양화풍을 모방하는 일본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외국의 미술을 직접 살펴보면서 자신의 세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덕소에 갔지만, 덕소에서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무렵 우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치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럴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전문, <1965. 8. 현대문학>  
그림을 통한 구도자와 동반자 진진묘
  욱진은 덕소가 예전의 풍경을 잃게 되자 결국 정들었던 강가의 아뜰리에를 떠나 다시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장욱진은 산 속의 사찰과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인 이순경에게 옛날 만공선사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들려주곤 했다고 하는데 "머리를 깍여 불자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네가 하는 공부나 우리가 하는 공부나 모두 같은 길이니라.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 고 말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던 장욱진은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던 만공선사의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어 미안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날 여름 통도사를 찾았다가 불력이 높은 것으로 이름난 경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봉이 대뜸 화가에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장욱진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 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것인데"라 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길"이라 답한다. 그 대답을 듣자 스님은 "쾌(快)하다"라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준다. 그리고 장욱진에게 선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장비공거사. 까악까악.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면 모든 진리를 자유롭게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데서 부처의 모습을 본다"는 내용의 한시(漢詩)였다.
마음의 눈을 얻은 화가
  들이 병을 앓을 무렵 화가는 연이어서 가족과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화가 부부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살 되던 1979년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즈음 안국동 거리에서 미술사학자 김철순이 화가 내외를 만났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화가는 아무런 내색없이 태연자약하게 죽은 아이 사망 신고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하며, 하도 태연하게 말하길래, 역시 달관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화가 역시 자식의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죽으면 아들을 화장해 뿌린 곳에 함께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승에서 못다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은 장욱진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가에게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백내장이란 병이 생기면서 점점 시력을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이 난청으로 결국 귀가 멀었던 것처럼 화가는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시회를 앞둔 장욱진은 자신이 제대로 점을 찍고, 바르게 선을 그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염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수 십 년을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손은 시력의 장애를 극복했던 것이다. 화가는 몸의 눈이 아니라 늘 마음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아왔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새처럼 살다 훌훌 떠나간 화가
  안보에서 용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화가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마치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훌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고 회고한다. 푸드득, 그렇게 말이다. 화가는 생전에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 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자연 속에서 나고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한 고리일 뿐 특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장욱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해묵은 종이 뭉치 속에서 먹그림을 가려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런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 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려달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특별히 정리할 만한 짐이나 세간이 없는 단촐한 그의 방이었는데도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늘 깔끔하게 정리해두길 좋아했다. 그런 성정 탓인지 아니면 정말 고승대덕들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탓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들과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하지만 장욱진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골을 뿌릴 수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탑비를 세우고 그 안에 유골을 모시게 했다. 그 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실일년 사월.
동심의 시선으로 발견한 우리의 아름다움
  가 장욱진은 생전에 불교의 세계와 좀더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늘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예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화가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늘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그런 화가였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그는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며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나 회화와 도자기, 판화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술과 생활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와 가족을 그렸다. 우리 미술에서 나무를 즐겨 그린 화가는 장욱진 말고 박수근도 있었다. 박수근이 캔버스에 여러 번 유화물감을 덧칠하는 마티에르 기법이란 것을 사용해 나무를 그린 것과 달리 장욱진은 이미 칠해 논 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박수근의 나무들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헐벗은 나무였던 것과 달리 장욱진의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로 넘치는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화가 이중섭과 장욱진은 모두 가족을 즐겨 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지만 이중섭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그런 탓에 이중섭은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가족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욱진은 이중섭보다는 행운아였다.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채, 41x32cm, 개인소장 -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장욱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과 다르다. 1951년에 그려진 작품인 자화상 <보리밭>에서 서양식 모던한 신사 복장을 하고 있던 화가는 그후 40여년이 흐른 뒤 74세가 된 화가는 집과 아이, 까치와 나무를 저 밑으로 한 채 신선처럼 부유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새를 즐겨 그린 화가로는 장욱진 말고도 오윤이 있다. 장욱진의 후배격인 오윤은 판화를 즐겨 하는 화가였다. 오윤의 새도, 장욱진의 새와 비슷한 의미를 담았지만 장욱진의 새는 좀더 밝고 희망적이었다. 장욱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늘상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자연과 사람을 풍성한 생명과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그가 보았던 현실일 수도 있고, 그가 염원했던 세상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숲 속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까치를 보면서 저 새 한 마리가 담고 있는 우리 네 삶의 가치와 존엄한 생명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러 온 메신저였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하늘과 인간, 세상과 나라는 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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