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4일 토요일

"여성최초라는 자부심으로 차별도 이겨냈죠"



외무고시 여성1호 합격자 김경임 前 튀니지 대사
학창시절 원서 볼 정도 영미소설 좋아해

평소 폭넓은 지식 다양한 책 통해 습득
30년간 외교업무 신명 바쳐 일해
김경임(60) 전 튀니지 대사는 외무고시 여성 1호 합격자이자 여성 2호 대사다.(1호는 1996년 부임한 이인호 전 주 핀란드 대사) 고시준비를 늦게 하는 바람에 서른 무렵 외교부에 들어가 3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난 2007년 8월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녀가 물러난 뒤 현직 대사 가운데 여성이 한 명도 없다. 한국 외교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어느 인류학자는 인류 사회에서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되기까지 앞으로 100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예측한다. 예측이 너무 비관적이지만 여성 외교관의 활약과 기대치는 어느 때보다 높다. 김 전 대사는 “세계를 무대로 꿈을 펼치는 여성이 많이 늘어날수록 한국 외교의 위상도 더욱 커질 것”이라며 “꿈이 있다면 도전하라”고 당부했다.

▨ 학교수업 대신 책에 빠져

학창시절, 김 전 대사는 독서광이었다. 수업시간에 ‘달과 6펜스’를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키거나 19금(禁)인 탐미주의 소설 로리타를 ‘아름답게’ 읽었고, 러셀의 자유주의적 사상에 매료되기도 했다. 나중 철학책을 즐겨 읽어 시를 쓰는 친구를 우습게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학업과 무관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혼자 공부하며 별자리를 더듬곤 했다.

“학창시절,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시험에 필요한 공부 대신 책을 읽으며 세상에 눈을 뜨게 됐어요. 부모님은 그저 책상에 앉아있으니 공부한다고 생각하셨지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러셀이 ‘권력의 세습은 부정하면서 왜 경제 세습은 인정하느냐’고 말한 용기에 감명을 받았어요. 그런 담대한 사상을 동경했지요.”

영미소설을 즐겨 읽은 덕분에 영어와도 친숙해졌다. 따로 과외수업을 받지 않았지만 원서로 영어책을 읽는데 막힘이 없었다. 헤르만헤세의 작품을 읽으며 독어에도 흥미를 느꼈다. 헌책방에서 독일어 교과서를 사서 읽거나 헤세의 책을 원서로 읽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잘하는 편”이었다. “성적을 잘 받으려면 시험 포인트를 알아야 하고 영어 발음기호까지 외워야 하지만 그런 공부를 따로 하진 않았다. 성적이 안 좋았지만 고교졸업 무렵 열심히 공부한 덕에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갔다”고 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선 폭넓게 공부해야 합니다. 학교 공부에 얽매이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해요. 외국 대사나 석학들과 만나 즐겁게 교류하려면 문학, 음악, 예술, 미술 등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고 한국의 전통문화도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벼락치기 하듯 책 몇 권 읽고 체득되지 않아요. 상당히 시간이 걸리고 일상에 쫓겨 따로 공부하기 어려워요. 미리미리 준비해야 되지요.”

▨ 여성 1호 외무고시 합격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김 전 대사는 1974년 졸업을 앞두고 수개월 동안 경제학, 행정학 등의 과목을 벼락공부해서 개인기업에 입사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수개월 다니다 그만 두고 몇군데 국영기업 공채에 합격했지만 모두 사직하고 말았다. “직장을 잃은 데 대한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고 실업자가 됐다는 서글픈 생각조차 들”던 시절이었다.

응시자격과 조건에 성차별이 없는 공무원, 특히 해외근무 기회가 주어지는 외무직에 눈을 들리고 외무고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고시를 준비하며 외시 여성합격자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지만 “오히려 도전하고자 하는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고 한다. 고시에만 전념하기 위해 집에서 독학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끔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해가며 고시공부를 시작한지 3년만인 1974년 4월 외무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학창시절, 영어와 독어로 된 책을 읽는데 지장이 없어 외국어 시험에 자신이 있었고 역사는 평소 책을 많이 읽어 그다지 큰 힘이 들지 않았어요. 문제는 국제법과 경제학인데, 두 과목만 열심히 하면 합격할 수 있겠다 싶었죠. 고시준비를 하다가 들었는데 여자가 외무고시에 합격한 전례가 없다는 거예요. 오기가 생겼어요. 실제 외무고시 시험장에 가보니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는 거예요. 합격발표가 나기 전까지 용변을 참느라 시험을 망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 외교부 업무는 도전해 볼만한 매력적인 것

김 전 대사가 외교부 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말은 남북이 대치상황이었고 세계는 냉전상태였다. 국내 정치정세도 극히 민감했던 시기였던 만큼 모든 업무에서 정치적인 측면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다. 외교부의 분위기는 첫 여성 외무고시 합격자가 감당하기에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 외교부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몰라요. 지금 생각해도 어떤 용기로 견뎌냈나 싶어요. 부처 내에서 마이너리티, 마치 장애인처럼 고립됐어요. 공식회의인데도 저만 빼고 회의를 한 적도 있어요.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죠.”

그녀를 지탱한 힘은 자부심이었다. 종일 사무실에 갇혀있는 공무원 생활이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첫 외무고시 여성합격자로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신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1983년 주 일본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첫 해외 발령을 받은 뒤 주 뉴욕총영사관 영사, 주 유네스코·인도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했다.

김 전 대사는 “외교부 업무는 도전해 볼만한 매력적인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업무자체가 높은 수준의 논리적 판단과 합리적 업무수행 능력을 요구했고 자타가 우수하다고 여기는 직원들간의 치열한 경쟁,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요구하는 상사들의 ‘몰아침’으로 사무실은 언제나 긴장감이 흘렀다. 또한 수년간의 해외 공관근무를 마치고 귀임한 직원들의 높은 수준의 교양과 태도는 다른 직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매력이었다. 그녀는 직원들간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잡일이나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신명을 바쳐 일했다. 덕분에 아직 결혼을 못했다.

“30년 외교관 경험을 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자부심을 가장 많이 느꼈어요. 경제대국 일본은 한때 동남아를 제패했지만 세계사에 남을 인물은 아직 없어요. 다윈이나 레닌, 모택동과 같은 인물은 없지요. 한국에는 있을까요? 아프리카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 얘기를 꺼내 깜짝 놀랐어요. 원조를 받던 한국이 이처럼 성장한 것은 박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있기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유네스코 비동맹 회원그룹 가운데 OECD로 옮겨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아프리카를 유럽이 돕는 이유는 한국과 같은 나라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지요. 한국은 제3세계에 희망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기적을 이룬 박 대통령이 세계적 인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봐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선출 역시 ‘박 대통령이 한국을 변화시켰듯 당신도 세계를 변화시켜라’는 뜻이 담겼다는 말을 들었어요.”

김 전 대사는 많은 후배 여성 외교관들이 배출돼 자신의 뒤를 잇기를 기대하고 있다. “능력이 있는 여성이 백안시 됐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한국 여성 외교관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치리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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