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인간의 최고 협동전략은 '일단 협력후 상대와 똑같이 대응'
다윈이 윤리학에 끼친 영향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세방화(世邦化·glocalization)'이다. 국제화에 따른 보편적 질서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지리적·역사적 특징과 개성을 강조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윤리학계도 국제화에 예외가 아니어서 '다문화주의'나 '문화다원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과 톨레랑스가 정치적 슬로건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윤리가 본래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소규모 공동체의 습속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어 'ethikos'와 라틴어 'moralis'는 모두 관습과 예절을 뜻한다. 과거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따져 묻는 일이 금기시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 금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준다.
- ▲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두 마리 말이 각자 먹을 것을 향해 반대 방향으로 가려다가(위) 실패한 후(가운데) 함께 같은 방향에서 먹고 있다(아래). 이 그림은 협동 이 어떻게 진화의 결과로 이뤄지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윤리를 이성의 법정에 세운 지 2000년 후 윤리는 다시 개별화한다. 신세계의 발견은 가톨릭으로도 포섭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문화와 습속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윤리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즉 타고난 성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윈은 윤리의 '세방화'를 촉발하지 않았지만 이런 흐름에 그 누구보다 많이 공헌했다. 인간이 환경에 따른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윤리학자들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보편적 박애주의로 이해한다. 이에 비해 도덕감성론자들은 박애도 좋지만 '나와 내 자식이 먼저'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보편과 특수, 이성과 감성이 겨루는 가치관의 전장에서 최종 승리한 것은 후자였다. 다윈과 그 후예들이 도덕적 감성을 구성하는 공감·동정심·분개·죄의식·좌절 등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때로는 동물과 사람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게임이론과 같은 수학적 도구를 원용하여 과학적 근거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기적 유전자가 판치는 약육강식 세계에서 경제학 이론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어떻게 '호혜적 인간(Homo reciprocus)'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은 진화론적 윤리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요즘도 다윈의 후예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새록새록 깨닫게 하고 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천벌(天罰)'을 정말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지역적이던 윤리가 세계화를 거쳐 세방화에 이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윤리도 진화 과정을 밟아온 셈이다.
■액설로드와 맞대응(Tit-for-tat) 전략이기적 개체 간에도 협동이 진화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문제는 입증하는 일이었다. 사회학자 액설로드(Axelrod)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전략 게임이 경합하는 K-1을 고안했다. 열네 명의 학자가 응모했고 이들이 짠 프로그램이 총 200회에 걸쳐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합을 벌였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대체로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전략이, 그리고 가장 단순한 전략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최우수 전략의 이름은 '맞대응'이었다. 일단 협력한 후 상대편의 추이에 따라 상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우호적이면서도 응보적인 동시에 관용적이면서 투명한 이 전략은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이 되었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대체로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전략이, 그리고 가장 단순한 전략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최우수 전략의 이름은 '맞대응'이었다. 일단 협력한 후 상대편의 추이에 따라 상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우호적이면서도 응보적인 동시에 관용적이면서 투명한 이 전략은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이 되었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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