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4일 금요일

영등포 슈바이처·울지마 톤즈… 우리가 사랑한 의사들

故장기려 박사 , 故 선우경식 원장, 故이태석 신부
          장기려 박사 ,  선우경식                   원장, 이태석 신부
그동안 국내 의료계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獻身)한 의사가 많았다. 그들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슈바이처'들이었고, 국민은 그들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전을 나와 평양에서 의사로 일하다 1950년 월남했다. 복음병원과 청십자병원을 세워 평생을 피란민·행려병자 등 가난한 이를 위해 인술을 베풀었다. 그가 설립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국내 건강보험의 효시가 됐다. 1979년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선우경식 전 요셉의원 원장은 1987년부터 20여년간 서울 신림동과 영등포역 인근의 노숙자 등을 돌보는 데 자신을 던져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다. 그의 손길을 거쳐 간 사람은 43만명에 달했다.

 이태석 신부는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뒤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2001년부터 아프리카 오지인 남수단 톤즈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다 대장암으로 숨졌다. 그의 삶은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다.

빈곤 국가에서 한센병과 싸우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몸을 바친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의료인이었다.
 조선일보

























그는 생전에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린 대로 의사로서의 안락한 인생을 버리고 소외된 불우이웃들에게 희망의 빛을 밝혀주며 험한 길을 걸어왔다.
1969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센터에서 내과를 전공한 선우원장은 미국의 일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림대병원 의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가 노숙인의 슈바이처로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83년 관악구 신림동에서 무료 의술 봉사를 하면서부터다. 당시 신림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고, 주민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기가 힘들었다. 선우원장은 1987년 의료 봉사를 시작했던 신림동에 요셉의원을 세웠다. 요셉의원은 신림동에 개발이 시작되고 아파트가 들어서자 1997년 노숙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영등포역 뒤쪽의 쪽방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셉의원은 개원 이래 20년 동안 43만명의 노숙인과 영세민 환자를 돌봤다. 지금도 매일 100여 명의 환자가 요셉의원을 다녀간다. 의료 혜택 외에도 먹고, 입고, 잘 곳을 제공하고 그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선우원장의 뜻에 동의하는 1백30여 명의 의료 봉사자와 4백50여 명의 일반 봉사자가 요셉의원에 참여하고 있다. 요셉의원은 100%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환자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부 지원금을 요청한 적도, 받아본 적도 없다.
선우원장은 선친이 남긴 작은 집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것은 소외된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이 마음들이 결집된 요셉의원뿐이다.
선우원장은 월간 <착한 이웃>에 기고한 글에서
“의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우리 주위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의사에게 줄 것 없는 환자들이다. 하지만 선우원장과 요셉의원의 봉사자들은 가진 것 없는 환자들이 주는 고마운 마음과 남을 돕는 보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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