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으니 옛날에 학문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했는데 지금에 학문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면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만, 남을 위한 공부를 하면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를 취하고 녹봉이나 얻는 것을 꾀할 뿐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왜 공부를 할까?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크게는 목적으로서의 공부와 수단으로서의 공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성찰과 수양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켜나가는 공부가 전자라면, 진학이나 취업, 시험합격 등을 위해 공부하는 것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 공부일까? 전자가 기본이 되어야 하겠지만 후자의 공부가 필요한 경우도 물론 존재한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수단을 위한 공부는 하기 싫다며 인적성시험 준비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공부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 또한 그 목표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된다. 목표와 다르거나 목표와 상관없는 공부는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부정되며, 일단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공부의 동력이 사라져버리는 문제점도 있다.
더욱이 공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나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외적인 성취나 사회적 성공을 목적으로 함을 뜻한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으로, 공부가 이것을 목표로 삼고 또 이를 위한 수단이 되면, 공부를 하는 사람 또한 그것만을 중시하게 된다.
앞서 인용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말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자신의 성장에 목표를 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한계를 지우지 않기 때문에 높은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에 맞춰 공부하는 사람은 그들이 부러워하는 수준이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수준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외형적인 명예나 이익을 얻는 데 그칠 뿐이다. 공부의 목표가 딱 거기까지이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의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기대승은 각각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위기지학’이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고, ‘위인지학’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고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 ‘위기지학’이라면,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합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위인지학’이다. 이는 유학의 학문론에서 쓰이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논어」, 「헌문」편의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공부한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진짜 이유를 생각한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는 자명하리라고 본다.
무릇 공부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때로는 특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공부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 신경 쓴다면, 아무리 공부의 물리적인 총량이 많다고 하더라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만으로는 절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이러한 공부는 얼마 가지 못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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