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4일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자 앤드류 와일즈(Sir Andrew John Wiles,
1953-)는 두 편의 논문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발행하는 수학 연보(Annals of Mathematics)에
투고했다. 7년 동안의 고투의 결과였다. 이 논문들은 다음 해 5월에 출판되었으며, 수학자들은 이로써, 아마도 수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였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358년 만에 증명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와일즈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작위를 비롯해서 여러 명예와
상을 받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상은 독일의 볼프스켈(Wolfskehl)
재단이 수여한 볼프스켈 상이다. 이 상은 독일의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볼프스켈의 유언에 따라 페르마 정리를 증명한 사람에게 수여하기 위해
1908년에 제정된 상이다. 와일즈는 1997년 6월 27일 괴팅겐 대학에서 5만 달러의 상금과 함께 이 상을 수상했다.
파울
볼프스켈(Paul Friedrich Wolfskehl,
1856-1906)은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의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파울 볼프스켈은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게
되어 의사를 포기해야 했고, 불편한 몸으로 할 수 있을만한 일로 수학을 택했다. 그는 본과 베를린 등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다름슈타트의 공업학교에서 수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매료된 그는 자기 힘으로 정리를 증명해
보려고 애썼고, 죽기 전에는 10만 마르크의 유산을 괴팅겐 아카데미에 기부해서 페르마 정리를 해결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했다. 이것이
와일즈가 받은 볼프스켈 상이다.
그의
유산을 관리하는 볼프스켈 재단은 유산의 일부를 이용해서 1908년부터 괴팅겐 대학에 뛰어난 과학자를 불러서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볼프스켈 강의(Wolfskehl-Stiftung)라고
불렸다. 과학자를 초청하는 일을 주도한 것은 괴팅겐 대학 교수이며 당대 수학의 지도자였던 힐베르트였다.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해서 많은 이론 물리학자를 초청했다. 첫 볼프스켈 강의에는 1909년 푸앙카레가 초청되어 “새로운 역학 La mecanique nuovelle"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이듬해의 2회 강의에서는 로렌츠가 초청되어 ”물리학의 옛 문제와 새로운 문제들 Old and new problems in physics"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인 1915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힐베르트를 비롯한 괴팅겐의 수학자들 앞에서 “중력에 관하여 On Gravitation"라는
제목으로 했던 강연도 바로 이 볼프스켈 강의였다. 이 강의 후 베를린으로 돌아간 아인슈타인과 괴팅겐의 힐베르트는 각각 중력을 기술하는 장
방정식을 유도해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조머펠트
밑에서 일찍부터 보어의 원자 이론을 접했던 피터 드바이는 괴팅겐에서도 이 이론을 다방면으로 연구했다. 드바이의 뒤를 이은 보른과 프랑크는 더욱
더 보어-조머펠트 이론과 원자의 연구에 주력했다. 한편 언제나 물리학의 기초에 관한 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힐베르트 역시 보어 이론을 주시하면서,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에게 이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나아가서 힐베르트는 이 이론의 최신 결과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이 이론의 제창자인 닐스 보어를 볼프스켈 강의에 초청할 것을 괴팅겐 아카데미에 제안했다.
1920년
11월 10일, 힐베르트를 비롯해서 펠릭스 클라인, 비케르트, 리하르트 쿠란트 등으로 구성된 볼프스켈 위원회는 볼프스켈 강의의 연사로 닐스
보어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보어는 강의 요청은 기꺼이 수락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강의는 1년 연기해야 했다. 나중에 보어의 이 강의는 “보어
축제(Bohrfest 혹은 BohrFestspiele)"라고
불리게 된다.
1922년
6월 드디어 닐스 보어가 조수 오스카 클라인(Oskar Benjamin Klein,
1894-1977)과 함께 괴팅겐에 도착했다. 보어는 당시 보어-조머펠트 이론의 성공으로 명성이 점점 치솟아서, 조머펠트의 표현에 따르면
‘원자물리학의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볼프스켈
강의는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괴팅겐 뿐 아니라 독일의 모든 대학에 보어의 강의 소식이 공고되었고 독일 전역에서 원자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
1888–1976),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 에르빈 마델룽(Erwin Madelung,
1881-1972) 등이, 네덜란드 레이든에서는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가 왔다. 뮌헨에서는 조머펠트가 학생인 하이젠베르크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함부르크에서는 파울리가 빌헬름 렌츠를 대신해서
왔다. 파울리는 두 달 만에 괴팅겐에 돌아온 것이다.
보어는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 동안 원자의 구조에 대해 일곱 차례의 강연을 했다. 외부에서 온 학자들과 함께 괴팅겐의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이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힐베르트와 쿠란트,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이 모두 참석했고 그들의 조수와 학생들도 자리를
지켰다. 그 중에는 훗날 원자의 이론에 큰 공헌을 하는 파스쿠알 요르단(Ernst Pascual Jordan,
1902-1980)이나 프리드리히 훈트(Friedrich Hermann Hund,
1896-1997), 그 밖에 에리히 휘켈(Erich Armand Arthur Joseph Hückel,
1896-1980), 루돌프 민코프스키(RudolphMinkowski,
1895-1976)1) 등도 있었다.
6월
12일은 월요일이었다. 강연이 열린 곳은 강의동의 15번 강의실이었다. 강의실에 준비된 150석이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 있었다. 앞쪽 줄에는
교수들이 자리했으므로 학생들은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학생이던 루돌프 민코프스키와 휘켈이 강의 노트의 준비를 맡아서, 강의 내용을 타이프로 친
원고를 청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보어가 마침내 강의를 시작했다.2)
보어는
이어서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진 러더퍼드의 원자를 설명하고, 고전 전기역학으로는 이러한 원자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이는 양자론이
도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보어는 양자론의 두 기본 가정을 설명했다. 첫 번째 가정은 전자가 복사를 방출하지 않는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가정은 원자의 에너지 상태가 변하는 것은 오직 전자가 하나의 정상 상태에서 다른 정상 상태로 이동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진동수의 복사가 방출되거나 흡수된다. 보어는 이 가정이 수소 원자와 헬륨 이온에 잘 적용됨을 보였다.
다음
날의 두 번째 강의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원자와 방출되거나 흡수되는 복사 스펙트럼의 역학적인 기초에 대해 강의했고, 그 다음 날의 세 번째
강의에서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있을 경우에 이론을 적용시켰다. 특히 전기장 속의 원자에 대한 엡스타인과 슈바르츠실트의 결과를 발전시킨
크라메르스(Hendrik Anthony "Hans" Kramers,
1894-952)의 결과를 소개했다. 크라메르스는 속어로 말하자면 보어의 오른팔, 혹은 보어의 그림자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비꼬거나 그를
비하하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그는 보어가 아직 명성을 떨치기 전에, 막 교수가 되었을 때 그의 첫 번째 학생이 되어 지도를 받았고, (그러나 박사학위
자체는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의 에렌페스트에게서 받았다.) 역시 보어의 첫 번째 조수가 되어 거의 10년간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함께 일했다.
1923년에 코펜하겐 대학의 강사가 된 크라메르스는 1925년까지 코펜하겐에서 보어의 뒤를 잇는 이인자였다. 과학자로서의 초기에 크라메르스가
보어의 정신에 지배되었다면, 보어는 크라메르스에게 연구를 의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보어가 했던 대부분의 연구는 실제로 수학적 능력이
뛰어난 크라메르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6년에
크라메르스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코펜하겐을 떠났지만, 보어의 그림자가 너무 강해서 과학자로서 받아야 할 평가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파울리는 농담으로 “보어는 알라이고 크라메르스는 그의 마호멧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강의는
4일 간의 휴식을 가진 후 19일 월요일에 재개되었다. 이 강의부터 보어는 여러 개의 전자를 가진 원자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먼저
헬륨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 내용은 크라메르스와 오랫동안 함께 연구한 결과였다. 다음날에는 나트륨 원자의 구조와 제 2주기
원소들의 구조에 대해서 논했고, 6일째에는 그 밖의 원소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날에는 X선 스펙트럼과 크립톤, 제논 등의 에너지 준위에
대해서 논했다.
매번
강의를 마치고 난 뒤에는 숙소와 커피하우스, 산책로를 가리지 않고 보어와 다른 참가자들 간에 끝없는 토론이 벌어졌다. 파울리는 물론 이렇게
벌어진 토론에 열심히 참가했다. 그러나 이 때의 토론에서 파울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
강의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보어와 파울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강의 중의 어느 날, 보어는 클라인과 함께 파울리에게
찾아왔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보어는 파울리에게 코펜하겐에 1년간 방문할 것을 제안했다. 보어가 덴마크어로 된 연구
결과를 독일어로 출판하는데 편집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파울리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선생님이 시키려는
일에 대한 과학적 요구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만, 덴마크어와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제 능력을 넘어섭니다.” 이 건방진 대답에 보어와
클라인은 폭소를 터뜨렸고, 파울리의 코펜하겐 행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훗날 파울리는 이렇게 말했다. “코펜하겐에서 내가 말한 두 가지는 모두
틀렸음이 밝혀졌다.”
파울리는
그해 9월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보어 축제에서 만난 오스카 클라인과 파울 에렌페스트, 코펜하겐에서 만난 크라메르스는 모두 파울리의 친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닐스 보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람은 닐스 보어였다. 14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서 두 사람은 서로 간에 깊은 우정을 느꼈다.
파울리가 보어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파울리로서는 드물게도 부드러운 감정과 깊은 호의가 담겨 있었고, 이는 보어가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어 축제 직후인 7월 3일에 보어가 파울리에게 쓴 편지에는 “괴팅겐에서 자네를 알게 된 것은 내게 엄청난 기쁨이었네. 자네가
코펜하겐에 오면 즐거울 거야. 자네도 즐겁기를 바라고.”3) 파울리는 훗날 보어와의 첫 만남을 “내 과학 인생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조머펠트가
데리고 온 뮌헨 대학 학생 하이젠베르크에게도 이 강연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는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특히 애정이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4)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세 번째 강의가 끝난 후 보어가 이야기한 크라메르스의 결과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서 보어의 관심을 끌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의 세미나에서 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어서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했고 나름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보어는
하이젠베르크를 불러서 이 문제를 좀 더 토의하기 위해서 하인베르크 산으로 산책을 가자고 제의했다.
단둘이
갔던 이 산책에서 두 사람은 원자의 구조, 원자를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과 괴팅겐의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산책에서 나눴던 대화를 [부분과 전체]에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어
축제는 원자물리학을 연구하는 현역과 미래 세대가 한 자리에 모인, 초기 양자론의 축제였고 절정이었다. 이제 그 안에서 초기 양자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리고 진정한 원자의 이론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 주역은 바로 보어 축제에서 보어를 처음 만났던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가 될
것이었다. 닐스 보어는 보어 축제 두 번째 날의 강연에서 진짜 양자론을 예지하는 듯한 말을 했다.5)
보어
축제가 끝나고 6개월 후, “원자의 구조와 원자에서 방출되는 복사의 연구에 공헌한 업적에 대해” 보어에게 그 해의 노벨 물리학상이 주어졌다.
보어에게 주어진 노벨상은 초기 양자론의 절정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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