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을
‘자동차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자동차 문명’을 가능케 한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는 바로 바퀴이다. 바퀴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려졌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바퀴는 그릇을 빚는 도자기 물레로 처음 쓰였다고 한다. 도자기 물레로 쓰이던 바퀴가 어떻게 탈 것의 일부로 진화한 것일까?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바퀴를 단 탈 것의 흔적이 기원전 4천년 경 메소포타미아, 중앙유럽지역 문명들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바퀴를 단 탈 것의 등장은 짐을
나르는 방식의 변화와 가축 사육의 진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바퀴의 등장과 변천 과정을 살펴보자.
바퀴가
등장하기 전 짐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로 나무썰매가 쓰였다. 나무토막을 널빤지처럼 엮거나 나무조각에 끈을 매달아 짐을 운반하는 방식은 기원전
7천년 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무썰매를 이용한 방식으로, 사람이 어깨에 짐을 지고 운반했을 때보다 더 많은 짐을 쉽게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소, 양, 염소, 나귀 등을 사육할 수 있게 되면서 나무썰매를 끄는 데 가축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천년 경 유럽의 북쪽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미국의 알래스카에서는 소가 끄는 나무썰매가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포장된 길이 없어
땅바닥에 맞닿아 있는 썰매를 끌기가 쉽지 않았다. 질퍽거리는 진흙길이나 비탈길에서 나무썰매는 짐수레로서 구실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무썰매 밑에 굴림대를 받쳐 굴리기 시작했다. 굴림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고대 왕국이 바로 이집트였다. 이집트 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피라미드는 굴림대를 이용해 무거운 대리석들을 옮겼기 때문에 만들어 질 수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 굴림대에 구멍을 뚫어 축을 끼운 다음 나무막대를 양쪽 통나무 굴대 축에 앞뒤로 연결해 굴대가 돌아가는 방식의 통나무 수레가
출연하기도 했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간단한 원판 형태의 바퀴는 기원전 5천년 경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원판은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둥근 형태로 만들었는데, 나무의
물리적인 성질 때문에 가로로 자른 원판은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기원전 3500년경 나무바퀴는 세 조각의 두꺼운 판자를 맞추어
연결대를 대 구리 못을 박아 만든 형태로 진화했다. 메소포타미아 우르 왕조 시대에는 이 형태의 바퀴 두 개 가운데 구멍을 뚫어 썰매 아래
고정시킨 축에 끼워 나무 쐐기를 박아 최초의 이륜 수레를 완성했다. 수메르족의 우르 왕조에서는 물건을 운반하기 위한 이륜 수레 이외에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 4륜 수레도 만들었다. 이 수레들을 더욱 수월하게 끌기 위해 가축을 이용했으며 이 시대의 벽화에 의하면 주로 소가
수레를 끈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무바퀴를
단 수레가 발명되면서 짐을 운반하기가 한결 간편해졌지만 나무썰매를 이용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길이 없어 바퀴를 단 수레를 활용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나무바퀴를 단 수레 역시 진흙길이나 경사진 길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소의 목에 밧줄을 걸어 수레를 끄는 방식으로는 장시간 이동이
불가능했다.
수메르인들은
나무 바퀴를 전쟁용 수레인 전차에도 이용했다. 4륜 수레 대신 이동이 수월한 이륜 수레를 4마리의 나귀가 끌어 전장에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명의 병사가 짝을 이뤄 전차에 올라타 한 명은 나귀를 조정하고 한 명은 활을 쏴 이동하는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둔하게 움직이는 원판형 나무바퀴와 느린 나귀의 결합이 군사력을 높이는 데 큰 기여는 하지 못했다. 이후 새로운 바퀴와 말이 결합된 전차가
등장하며 수메르인의 전투력은 향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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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00년경 새로운 형태의 바퀴가 등장했다. 이는 바로 바퀴살 바퀴이며 축대를 끼우는 중심 바퀴통에 테두리 바퀴를 연결하는 4~6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바퀴통에 연결된 바퀴살에 반달형으로 된 테두리 나무를 끼워 구리 못으로 고정해 바퀴살 바퀴를 완성했다. 이는 원판형 바퀴보다
가벼워 빠르게 굴러가고 충격 흡수력도 좋았다. 히타이트족과 이집트 왕국에서 바퀴살 바퀴를 전차를 제작하는 데 활용했다. 히타이트족은 전투력을 갖춘 전차를
활용한 최초의 부족으로 4개의 바퀴살로 된 바퀴와 말 사육능력을 활용해 전투력을 높였다. 이들은 전차 중간에 바퀴를 달아 세 명의 병사들이 탈
수 있게 했고 나귀가 아닌 말을 이용해 이동 속도를 높였다.
바퀴살
바퀴를 단 전차는 히타이트족에 이어 이집트 왕국에서 제작됐고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이용됐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전차는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전차 경주와 같이 문화 생활의 일부로도 이용됐다. 전차 이용의 확산은 바퀴살 바퀴의 확산과 발달을 가져왔다. 발달한 바퀴살 바퀴는
19세기까지 바퀴살 개수가 늘어난 것 이외에 외형상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다만 기원전 100년경 영국 켈트족이 바퀴 테두리에 철판을 둘러
테두리가 닳아 없어지는 비율을 줄였다.
고대
문명기 바퀴 기술은 전쟁 기술인 전차가 발달하면서 촉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짐을 끄는 수레가 이 시기 바퀴 기술의 발달을 촉진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소와 나귀가 끄는 짐수레는 육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장한 노예에게 짐을 나르게 하는 것보다 빠르지도
간편하지도 않아 짐수레를 더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다. 또한 당시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데 필요한 곡물도 생산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전쟁을 치러 왕국의 세력을 키워가던 고대 왕국들에게 전차 기술을 향상시켜주는 바퀴살 바퀴에 대한 수요는 높았다. 전차 기술을 향상 시키는
과정에서 바퀴살 바퀴 역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바퀴살 바퀴가 확산되어 탈 것에 활용되기 시작한 바퀴는 수차, 톱니바퀴, 물레바퀴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되며, 이로써 바퀴 문명의 역사가 펼쳐지게 됐다.
-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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