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실험실이었다. 이 연구소는 독일 출신의
아서 슈스터(Sir Franz Arthur Friedrich Schuster,
1851-1934)가 1900년에 설립한 곳이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맥스웰과 레일리 경과 함께 일했던 슈스터는 1888년 맨체스터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노력 끝에 자신의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소는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였다. 그러나
슈스터는 건강 문제로 1907년 물러나야 했고,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당시 캐나다의 맥길 대학에 있던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물려주었다. 이는
맨체스터 대학과 러더퍼드 양쪽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위대한 실험가인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뉴질랜드 넬슨 시 근처의 작은 마을인 브라이트워터에서 1871년에 태어났다. 영리하고 손재주 있는 어니스트는 뉴질랜드
대학의 캔터베리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몇 가지 전기기구를 발명하는 등의 재능을 보였지만, 뉴질랜드에서 할 만한 전문적인 일은 별로 없었다.
이대로라면 고향에서 감자나 캐면서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었다. 그러던 러더퍼드에게 ‘1851년 국제 박람회를 위한 왕립 위원회’가 지원하는 영국
유학 장학금이라는 기회가 다가왔다. 장학금에 지원했던 러더퍼드는 안타깝게도 2등을 해서 탈락했지만, 선발 시험에 1등을 한 학생이 그 자리를
포기해서 차례가 돌아왔다. 평생 그를 보살피게 될 행운의 여신이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받은 러더퍼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캐던 감자를 던져 버렸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온 러더퍼드는 톰슨 밑에서 공부하며 현대적인 물리학을 접했고 방사선에 대해서 배웠다. 러더퍼드의 자리는 일종의 연구 학위로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다른 학교 출신의 학생들을 받아서, 2년 동안 연구하고 논문을 쓰면 케임브리지의 학위를 주는 제도였다. 이는 톰슨이
개혁적으로 시도한 제도였는데, 러더퍼드는 이 과정의 첫 번째 수혜자 중 한 사람이다.
러더퍼드는
1898년 학위를 받았다. 우수한 연구자의 면모를 보였던 그였지만 본교 출신이 아니라는 벽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에
남지 못하고 멀리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맥길 대학은 담배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맥도널드(William Christopher Macdonald,
1831-1917)가 1870년대부터 많은 돈을 기부해서, 물리학과 화학, 공학 분야에 국제적 수준의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뒷받침을 받는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 역시 러더퍼드의 행운이었다.
19세기가
저물어가던 이 시기는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거대하게 밀려오고 있던 시기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러더퍼드의 스승인 톰슨은 1897년 음극선이
전자임을 확인했고,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베크렐(AntoineHenri Becquerel,
1852-1908)이 우라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방사선이라고 이름 붙은 이 현상에 관심을 가진 러더퍼드는 곧
빛나는 업적을 내기 시작했다.
러더퍼드는
방사선에는 자기장에 다르게 반응하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각각을 알파선과 베타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그는 방사성 물질인
토륨에 의해 방사성 기체가 생겨나고, 방사성 기체에 의해 방사능이 다른 물질에 옮겨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0년은
러더퍼드에게 중요한 해였다. 고향의 약혼자 메리(Mary Georgina Newton,
1876–1945)와 결혼을 했고, 맥길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연구자가 될 옥스퍼드 출신의 젊은 화학자 소디(Frederick Soddy,
1877–1956)가 합류했다. 소디와 함께 러더퍼드는 방사성 기체가 얼마 전 발견된 아르곤 족에 속하는 기체라는 것을 발견했고, 방사선을
낸다는 것은 원자가 붕괴해서 다른 원자로 변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원자가 다른 원자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로 돌턴의 원자는
확실히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아님이 결정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또한 방사성 물질이 방사선을 내면서 붕괴해서 줄어드는 비율은 물질마다
일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같은 물질이라면 처음의 양이 얼마였건 간에 물질의 양의 절반이 되는 시간은 항상 일정하다. 이 시간을
반감기(half-life)라고
부른다.
소디
외에 맥길 대학에서 러더퍼드와 함께 일했던 동료와 조수들은 영국 물리학자인 아서 스튜어트 이브(ArthurStewart Eve),
캐나다 출신인 하워드 반즈(Howard Barnes),
예일 대학을 졸업한 미국 물리학자 하워드 브론슨(Howard Bronson),
폴란드 출신의 물리화학자 태되즈 고델스키(Tadeusz Godlewski),
그리고 독일 출신으로 훗날 핵분열을 발견해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는 오토 한(Otto Hahn)
등이다. 그러나 캐나다는 아무래도 과학의 변방이었다.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도 많지 않았고, 연구 조수도 부족했다. 러더퍼드도 이곳을 케임브리지와
같은 물리학 연구의 중심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소디가
1903년 3월에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러더퍼드는 라듐에서 나오는 세 번째 종류의 방사선을 확인하고 이를 감마선이라고 이름 붙이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맥길 대학에서 지낸 9년 동안 러더퍼드는 방사선과 방사성 물질의 화학에 대한 약 70여 편의 논문 등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제는 스타 과학자가 된 러더퍼드에게 미국의 예일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으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던 러더퍼드는 이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맨체스터에 자리가 생긴 것이다.
슈스터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대학에 부임한 러더퍼드는 연구소의 충분한 자원과, 캐나다에서보다 훨씬 많은 우수한 학생들에 힘입어 드디어 캐번디시 연구소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연구팀을 꾸릴 수 있었다. 연구소의 분위기도 러더퍼드의 마음에 꼭 들었다. 맨체스터에 도착해서 맥길 대학의 조수였던 이브에게
보낸 1907년 6월 11일 자 편지를 보면 맨체스터에 대한 러더퍼드의 첫인상이 솔직하게 드러난다1).
러더퍼드는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맥길 대학에서 남긴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업적은 “원소의 붕괴와 방사성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for his investigations into the disintegration of theelements, and the chemistry of radioactive substances)”였다.
러더퍼드의 비상이 시작되었다. 노벨상을 받는 것으로 인생의 정점을 찍는 학자가 많지만, 러더퍼드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이후로도 러더퍼드는
자신의 천재성과 강렬한 개성에 힘입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연구소를 계속해서 이끌어 가게 된다.
맥길
대학에서 러더퍼드가 소디와 했던 연구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알파선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 이들은 라듐에서 나오는 강력한 알파선을 강한 전기장으로
휘어지게 하는데 성공해서, 알파선은 사실은 전기를 띤 입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후 알파선은 러더퍼드의 연구에서 중심이 되고, 나아가 자연을
탐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된다.
맨체스터에
와서 러더퍼드는 독일인 조수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와 공들여서 알파선을 측정하는 섬광계수기 방법을 발전시켰다. 황화아연으로 된 섬광스크린에 알파입자가 닿으면 반짝하고 섬광을
내게 된다. 이 방법을 통해 러더퍼드는 알파입자의 개수를 셀 수 있게 되었고, 전체 전하와 비교해서 알파입자 하나의 전하는 전자 전하 크기의 두
배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아가서 러더퍼드는 학생이던 토머스 로이즈(ThomasRoyds,
1884-1955)와 알파입자가 헬륨에서 전자를 떼어낸 헬륨 이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러더퍼드의 노벨상 수상 연설인 “방사성 물질에서 나오는
알파입자의 화학적 본성(The Chemical Nature of the Alpha Particlesfrom Radioactive Substances)”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검출하는 계수기를 연구하면서, 또한 알파입자가 물질 속을 통과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톰슨은
자신의 “미립자”, 즉 전자가 원자 속에 들어있으므로 바로 원자를 이루는 주성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전자는 가장 가벼운 수소 원자보다도 천
배 이상 가벼우므로, 원자 속에는 수천 개의 전자가 들어있어야 한다. 한편 원자 자체는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원자 속에는 (+) 전기도 포함되어
있어야 할 텐데, (+) 전기를 띤 미립자는 없으므로 (+) 전기는 원자 내부에 퍼져 있고, 수많은 전자는 (+) 전하 속에 잠겨있을 것이다.
이것이 톰슨이 1904년에 제안한 건포도 푸딩(plum pudding)
원자 모형이다. 이 모형에서 (+) 전기는 푸딩처럼 원자를 이루고 그 속에 전자가 건포도처럼 박혀있다. 한편 로런츠가 제이만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생각했던 원자는 전자들이 어딘가에 매달려 진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알파입자가 충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1909년에 러더퍼드가
가이거와 보려고 하고 있던 것은 그러한 현상이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알파입자가 (D)를 통해 나와서 섬광스크린(S)에 도달하는 것을 어두운 방에서 현미경(M)으로 보면 알파입자가 도달한 곳에
번쩍이는 섬광을 볼 수 있다. 이 중간에 금속 막(F)을 넣자 번쩍이는 섬광은 좀 더 퍼졌다. 금속 막을 금박으로 바꾸자 섬광은 더욱 많이
퍼져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이 휘어지는 알파입자가 나타났다. 톰슨의 모형에서는 원자 속의 전기장이 거의 일정하기 때문에 알파입자가 많이 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러더퍼드는 고향의 슈퍼스타인 자신을 찾아 뉴질랜드에서 온 학생 마스덴(Ernest Marsden,
1889-1970)을 실험에 합류시켜 어디까지 알파입자가 휘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했다. 얼마 후 가이거와 마스덴이 보고한 실험 결과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알파입자가 심지어 되튀어 나오는 경우도 관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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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입자는
(+) 전기를 갖고 있으므로 알파입자를 튀어나오게 하려면 원자 안에 강한 (+) 전기장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같은 공끼리 충돌시켜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슷한 질량의 정지해 있는 물체에 부딪히면 절대로 되튀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알파선이 되튀어 나왔다는 것은 원자 속 (+)
전기장의 원천은 알파 입자보다 아주 무거운 무언가에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톰슨이나 로런츠의 원자모형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러더퍼드는 늘 이 결과가 자신이 가장 놀랐던 실험 결과였다고 말하면서, 마치 종이에 대포를 쏘았는데 포탄이 튕겨 나온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거의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많이 휘어지는 것은 드물었으며, 되튕기는 입자는 약 8천 개 중 하나 정도였다.
러더퍼드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신중하게 고심을 거듭했다. 1910년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러더퍼드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원자 내부에는
원자의 모든 (+) 전기와 질량이 하나로 뭉쳐진 ‘원자핵 atomic nucleus'이
존재해야 한다. 가볍고 (-) 전기를 가진 전자는 그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원자핵은 되튀어 나오는 알파입자가 아주 드물다는 사실로부터
‘성당 안에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아주 작아야 했다. 러더퍼드는 1911년 3월에 이 결과를 처음 발표했고, 4월에 논문을 투고했다.
그런데
러더퍼드는 논문을 보내기 전에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일본의 물리학자이며, 러더퍼드의 연구소에도 들른 일이 있는 나가오카 한타로(Hantaro Nagaoka, 長岡半太郎,
1865–1950)가 몇 년 전에 러더퍼드와 유사하게, 중심에 (+) 전기가 모여 있고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는 원자모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물론 원자핵이 구형이 아니라 납작한 디스크 모양이고, 전자의 궤도가 토성의 테처럼 늘어서 있는 등 세부적으로는 다른 점이 많았고,
러더퍼드의 모형처럼 실험적인 뒷받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물리학자가 원자핵과 비슷한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
그래서 러더퍼드도 필로소피컬 매거진에 출판된 논문에서 나가오카의 원자모형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4).
무거운
원자핵을 중심으로 가벼운 전자가 주위를 돌고 있는 러더퍼드의 원자는 마치 무거운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돌고 있는 태양계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극미의 세계에서 거대한 우주의 모습이 재현된다는 것은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이론적으로
불안정했다. 애초에 나가오카의 원자모형이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도 역학적인 불안정성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조금만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 부서지기 쉽고, 더구나 전자는 원운동을 하면서 내놓는 전자기파에 의해서 에너지를 잃게 되어 곧 원자핵으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특히 전자가
하나밖에 없는 수소 원자에서 이 문제는 치명적이었다.
러더퍼드는
태연했다. 이 원자 모형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떻든 무겁고 작고 (+) 전하를 가진 원자핵이
원자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러더퍼드는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을 통해 보여준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이
문제는 다른 누군가가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말로 무거운 원자핵과 가벼운 전자로 이루어진 러더퍼드의 원자를 해명하는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은 러더퍼드 연구실에 머물고 있던 덴마크 청년 닐스 보어였다.
-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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