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질이 쪼갤 수 없는 입자인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원자론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처음 제시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초 존 돌턴이
화학반응과 화합물의 조성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으로 원자설을 제안하기 전까지, 원자라는 존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근대
화학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원소들이 새로이 발견되었다. 이 원소들은 특정한 성질을 공유하는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원소들이 보이는 주기성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다. 주기율표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기율표에는 이 세상 모든 원소가 원자번호와 원소의
화학적 특성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주기율표에는
각 원소의 밀도,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 등의 성질과 더불어 원자 질량, 원자 반지름이 명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구리 원소의 원자
질량은 몰당 63.546그램이고 원자 반지름은 0.135나노미터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구리 원자 반지름이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라는
사실이다. 구리의 공유 반지름은 0.138나노미터, 판데르발스 반지름은 0.140나노미터다. 산소 원소의 경우는 원자 반지름이
0.060나노미터, 판데르발스 반지름이 0.152나노미터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원자의 반지름을 정했다는 것은 원자가 공처럼 둥근 구
모양임을 가정한 것인데, 그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앞선
글 [원자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에서 원자의 모습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기하학적인 구 모양도, 전자가 핵 주위를 공전하는
모양도 아니라고 했다. 19세기 말까지는 1백억 분의 1미터에 불과한 입자의 크기를 직접 측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원자의 존재 그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었다. 21세기 현재의 기술로도 0.1나노미터의 원자 크기를 직접 측정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주기율표에 각 원소의 원자
반지름을 공유 반지름, 이온 반지름, 판데르발스 반지름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값을 적어 놓은 것은 원자의 반경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외떨어진 원자의 모양을 직접 관찰한 적이 없어, 원자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며 실상이 이렇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또 원자의 반지름을 기하학적인
구 모양의 반지름처럼 간단히 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원자의 반지름은 정하는 방법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장 손쉽게 반지름을
정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원자를 일렬로 늘어놓고 전체 길이를 잰 후, 그 안에 속한 원자 수로 나누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산소 원자 1억
개를 일렬로 정렬했을 때 그 길이가 약 3센티미터라면, 원자 한 개의 지름은 0.3나노미터이고 반지름은 0.15나노미터가 된다. 그런데 만약
산소 원자 사이에 다른 원소가 끼어들어 공유결합이나 이온결합이라도 하게 되면, 원자 간의 거리가 짧아져 원자 반지름이 0.06나노미터로 줄어들
수 있다.
모양이나
크기가 분명치 않은 원자의 반지름을 정하려면,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원자가 붙어 있을 때 원자 핵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원자들이 서로 가까워지면 각 원자 속 전자들의 위치가 주변 원자의 영향을 받아 바뀌거나 심지어 이웃 원자로 옮겨가는 경우도
생긴다. 결과적으로 각 원자의 반지름은 주변 원자의 환경에 따라 그 크기가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원자 간의 거리를 이용하여 원자 반지름의
크기를 정하면, 원자의 크기는 측정 방법에 따라 제 각각일 수 밖에 없다. 외떨어진 원자의 모양을 명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으니 원자의 반지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측정할 수도 없는 원자의 모양이나 크기를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외국 속담이 있다. 여기서 ‘보는 것’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우리 눈의 망막에 비친 이미지를 말한다. 앞선 글 [빛은 어떻게 색이 되는가?]에서
우리 눈이 400나노미터부터 700나노미터까지의 파장을 갖는 빛을 통해 물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원리에 대해 얘기했다. 시각세포가 빛을
전기에너지로 바꿔 망막의 이미지를 뇌에 전달하는 원리는, 디지털 카메라의 CCD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자동차나 사과는 우리 눈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웬만한 크기의 미생물도 광학현미경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이러스처럼 작은 물체는 전자현미경으로 이미지를 찍을 수 있다. 빛 대신 전자를 이용한 전자현미경은 10만 배 이상의 배율로 측정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원자 크기의 물체 모양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앞선
글 [원자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에서, 0.1나노미터 크기의 파장을 갖는 X-선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원자들에 회절하면서 만든
간섭무늬로 원자 간의 간격을 잴 수 있다고 했다. X-선의 간섭무늬로 알 수 있는 것은 원자 간의 간격이다. 실제로 각 원자의 모양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X-선의 회절무늬가 생긴다는 그 자체로 ‘물질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입자의 분명한 모양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를 주지는 않더라도, 원자론에서 제시한 물질의 구성 입자가 원자라는 근거와 원자 간의 거리, 즉
원자 반지름의 정보까지는 제공해주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작은 물체의 측정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뉴턴이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생각해 보자. 간단히 살펴보면 밝은 햇빛 아래 놓인 사과는 빛을 반사하고 그 빛은 바라보는 눈의 망막에 이미지를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뉴턴은 사과가 놓인 방향과 사과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만일 이 사과를 어두운 암실에 놓는다면, 사과에서 반사되는 빛이 없기
때문에 그 위치뿐 아니라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다. 반대로 햇빛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비치는데 사과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면 반사하는 물체가
없어져 뉴턴의 망막에는 아무런 이미지가 생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뉴턴이 사과의 위치와 존재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은 ‘빛 알갱이’가 사과에
부딪쳐 경로를 바꾸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다’는 과정의 핵심은 ‘빛 알갱이’와 ‘사과’의 충돌이다. 사과의 위치는 ‘빛 알갱이’와 ‘사과’의 충돌 지점이다. 이 관점을 조금 더
확장하면, 빛 알갱이 대신 전자를 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야구공을 이용해도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전자현미경은 바이러스
사진을 찍을 때 바이러스에 부딪혀 반사되는 전자를 이용한다. 다만 사진 이미지의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광학현미경이 일반 렌즈를 사용하는데
반해, 전자현미경은 자석을 활용한 렌즈를 이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빛 알갱이든 전자든 모두 충돌 과정을 통해 물체의 존재
여부와 위치를 결정한다.
사과가
바이러스보다 훨씬 크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사과의 이미지를 찍는 것도 가능하다. 빛 알갱이 대신 전자가 사과에 부딪혀
반사되는 순간을 단순화시켜 살펴보자. 우선 전자 입자와 사과 입자 간에 충돌이 일어난다. 앞선 글 [공중부양이 가능하려면?]에서 논의한 힘과
가속도의 원리에 따라, 충돌하는 물체가 주고 받는 힘은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다. 그런데 여기서 사과는 전자에 비해 질량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사과의 움직임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신 전자는 사과 표면에서 정반사되는 쪽으로 움직임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사과 표면에서
정반사되는 전자의 운동은 빛 알갱이가 정반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이미지는 광학현미경의 이미지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미지를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물체나 입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도 역시 충돌 실험이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어 그 이미지를 실제 확인하기가
힘들 뿐이지, 전자현미경에서 전자와 사과가 충돌하는 것처럼, 전자 대신 특정 입자를 이용하여 특정한 힘을 주고 받는 충돌 과정을 확인하면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밝힐 수 있다. 최근 존재가 확인된 힉스 입자도 유럽의 CERN 연구소에서 핵 입자를 높은 에너지로 가속하여 충돌시키는 실험을 통해
발견됐다.
이제
그럼, 전자를 이용해 원자의 이미지를 찍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간단히 생각하면 사과가 놓여 있던 자리에 원자 한 개를 올려 놓고 전자를 날려
보내 충돌시키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과와 전자가 충돌할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우선 원자의 질량이 사과에 비해 턱없이 작아 전자의
질량을 무시할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원자의 구조에 있다. 원자에서 무거운 핵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을 가벼운 전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전자가 원자와 충돌할 때, 실제 충돌하는 입자는 무거운 핵이 아니라 주변의 전자들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원자의 크기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핵을 둘러싼 전자들이다. 그런데 측정을 위해 들여보낸 전자가 같은 크기의 질량을 가진 전자와 충돌하면, 그
둘이 서로 같은 힘을 주고 받고는 두 전자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길 것이다. 그러면 반사된 전자를 이용해 만든 이미지는 사과를 찍으면서
예상했던 ‘현미경’의 이미지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뿐 아니다. 전자를 충돌시켜 측정한 후에는 원자의 모습마저도 충돌 과정에서 흩어진 전자
때문에 원래의 모습과 같지 않게 된다. 전자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측정하면 전자와 전자가 충돌하면서 원자의 본래 상태를 흔들어 놓는다. 이렇게
전자를 충돌시키는데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면, 전자 대신 빛 알갱이를 사용해 측정하면 어떨까?
빛을
이용한 측정도 전자를 이용한 측정에 비해 결코 쉽지 않다. 가시광선 영역의 빛 알갱이는 파장이 400 나노미터부터 700 나노미터까지의
전자기파이기 때문에, 파장이 원자의 크기에 비해 수천 배 이상 크다. 사실 파동을 이용한 이미지 측정을 하려면, 빛의 파장이 측정 대상인 물체의
크기보다 작아야 한다. 사과의 이미지를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사과의 크기가 빛의 파장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빛의 파장보다 작은 물체를 찍으려 한다면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의 양도 적을 뿐 아니라 반사된 빛을 이용해서는 물체의 모양을
구분할 수 조차 없다.
그렇다면
가시광선보다 훨씬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를 쓰면 어떨까? 규칙적으로 배열된 원자의 회절무늬로 원자 간 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했던 X-선
전자기파는 파장이 0.1나노미터보다 작아 원자 모양을 파악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X-선을 이용해 외떨어진 원자에 초점을
맞추면, X-선 빛 알갱이의 운동량이 상대적으로 너무 커서 X-선에 부딪힌 원자 주변의 전자가 튕겨 나가는 일이 벌어진다. 전자 대신, 원자
크기보다 작은,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를 이용하더라도 빛의 운동량이 너무 커서, 결국 전자를 이용해 이미지를 찍을 때와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빛을 이용하든 전자를 이용하든 원자 크기의 작은 입자는 그 모양을 제대로 측정하기가 어렵다. 원자 크기의 모양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말은, 사실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자의 위치는 왜 파악하기 어려운 걸까?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면 적당한 측정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빛을 이용한 측정을 생각해 보자.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려면 빛의 파장은 짧을수록
좋다. 그러나 빛의 운동량은 파장에 반비례하여 커지기 때문에 짧은 파장의 빛을 쓰면, 빛과 전자가 충돌한 후 빛의 운동량 일부가 전자로 옮겨져
전자가 움직이게 된다. 반사된 빛으로부터 빛과 전자가 충돌했던 위치는 알 수 있지만, 전자는 이미 움직여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전자의 지금
위치는 파악할 수 없다. 반대로 충돌 과정에서 운동량 전달을 최소로 하려면 빛의 운동량을 작게 할수록 좋은데, 작은 운동량의 빛은 운동량에
반비례하여 파장이 길어진다. 전자 위치를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느냐는 파장의 길이에 좌우되기 때문에, 충돌 후 전자의 움직임은 줄어들지 몰라도
파장의 길이가 늘어난 만큼 위치의 불확정성은 커져 버린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측정 도구의 정확도의 문제에 있다기보다는, “충돌이라는 속성을 갖는” 측정 과정
자체의 본질적인 성질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빛을 이용해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과정에 나타난 현상처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측정의 차원을 넘어 입자의 속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드러낸다. 측정
도구로 사용하는 빛 알갱이와 충돌했을 때, 빛의 운동량에 영향을 받을 정도의 질량을 가진 입자는 불확정성 원리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과의 위치나 운동량에 대한 뉴턴 시대의 개념은 물체를 대표하는 확정된 측정값인데 반해,
현대물리에서는 전자처럼 작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그 위치나 운동량이 동시에 정해질 수 없다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나
사과와 같이 커다란 입자는 ‘측정된 물체’의 위치와 그 물체를 ‘대표하는 점’의 위치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전자처럼 작은 입자의 경우 그
위치가 정확히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의 입자가 두 개 이상의 위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은 ‘입자’의
기본 개념에 어긋난다. ‘측정된 입자의 위치’가 그 물체의 ‘추상적인 점의 위치’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위치의 불확실성을 띤
전자의 속성은 오히려 공간에 퍼진 파동의 성질에 부합한다.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띤다는 역설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성의 원리는
입자로 인식하고 있던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20세기 이후 측정 기술의 발달은, 특정 위치의 점으로
대변되는 ‘입자’의 속성이 원자나 전자와 같이 작은 물체에는 적용될 수 없게 되면서, 고전적인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포함한 양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 다음 글에서는 입자와 파동 이중성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하자.
-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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