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38선을 넘자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몰려왔다. 37개월 만에 휴전이 될 때까지 195만7616명이었다.
독립한 지 채 5년이 안 되는 신생국을 구하려는 대열에 캐나다 청년들도 있었다. 참전자는 2만5687명, 전체 캐나다군(軍) 병력의 절반이었다.
그 넓은 땅에서 지원병들이 미국 시애틀로 모이는 데 보름, 배로 태평양을 건너는 데 다시 보름이 걸렸다. 사지(死地)로 향하는 한 달의 여정(旅程)이었다.
그들이 이룬 신화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게 1951년 4월 23일의 경기도 가평 전투다.
춘천에서 중공군과 싸우던 국군 6사단이 패해 밀려오자 캐나다군은 영연방 27여단 소속으로 '붉은 군대' 앞을 막아섰다.
이 전투에서 본진(本陣)인 영국군과 호주 부대는 부대원의 40%를 잃었다.
가평 남쪽 667고지를 사수한 캐나다군 대대와 뉴질랜드 포병 연대의 분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치하에서 굶고 있을지 모른다.
전쟁에서 캐나다군은 516명이 전사했다. 그중 379명이 부산 유엔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들은 곁에 있는 영국(885명)·터키(462명)·호주(281명)·네덜란드군(117명)과 함께 수호신이 돼 이 땅을 지켜보고 있다.
1999년 빈센트 레이먼드 커트니라는 캐나다 참전 군인이 "매년 11월 11일 한국 시각으로 오전 11시에 1분간 부산을 향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생존한 9000여 전우(戰友)가 동참했다. 그날은 1차 세계대전 종전일이자 영연방의 현충일이다.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노병(老兵)들의 호소를 우리는 뒤늦게 접했다. 그게 2007년 시작된 추모 행사의 유래다. 올해 국가보훈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노병(老兵)들의 호소를 우리는 뒤늦게 접했다. 그게 2007년 시작된 추모 행사의 유래다. 올해 국가보훈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기네스북 도전이었다.
'부산으로 고개 숙이자(Turn toward Busan)'는 행사가 있는 걸 나는 독자를 통해 알았다. 컴퓨터를 통해 행사 취지에 '찬성'의 뜻을 표시한 사람이 5744명이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국민이 그날 거리에서, 집에서, 일터에서 부산을 향해 묵념했을 것이며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5744'라는 숫자에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잊은 전쟁을 외국이 대신 기억해주는 일이 잦다. 이달 3일 런던 국방부 청사 뒤편에 개장한 '한국전쟁기념공원(Korean War Memorial)'도 부탁은 우리가 해놓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례다.
공원은 템스강 근처로 앞에는 영국의 상징인 런던아이(London Eye), 오른쪽엔 빅벤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 한복판에 부지를 내준 게 박근혜 대통령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자국 청년 5만6000명을 보낸 6·25전쟁에 영국은 이런 의미를 부여했다. "유엔 창설 후 첫 국제 행동이었다.
전국의 5만4000여 전쟁기념물 가운데 수도 런던에만 한국전 기념비가 없었다."
이런 주객전도(主客顚倒)를 보며 대체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년은 대한민국 광복(光復) 70주년이 되는 해다.
종북(從北)이니 주사파(主思派)니 하는 세력을 근절하는 원동력은 헌법재판소보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는 데서 나온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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