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셈이
익숙한 사람에게 ‘1+1’의 셈은 너무 쉬워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덧셈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입장을 바꿔 숫자를 모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덧셈을 가르칠지 한 번 생각해 보면, 왜 덧셈이 쉽지 않은지 금방 깨닫게 된다.
뉴턴이
초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어 덧셈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자. 쟁반에 사과 한 개를 올려 놓고, “사과 한 개”와 “숫자 1”이 대응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과는 우리의 관측 대상이 되는 물체고, 숫자는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는 개념이다. 쟁반에 사과 한 개를 또 올리면 처음에 올려
놓은 것의 두 배가 된다. 이렇게 사과 하나가 있는 쟁반에 또 다른 사과를 더하는 과정이 우리 머릿속에서는 ‘덧셈’이라는 추상적인 작용, 즉,
‘+’ 연산인 것이다. 본래 있던 사과에 더해진 또 다른 사과를 다시 숫자 ‘1’ 로 바꾸어 생각하면, 쟁반 위의 사과 한 개에 또 하나의
사과를 추가하는 과정을 ‘1+1’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두 개의 사과가 모두 쟁반 위에 올라간 상태는 숫자 ‘2’라는
개념에 대응되고, ‘1+1’의 추상적 연산의 결과는 ‘2’가 된다.
사과나
야구공처럼 분리해서 셀 수 있는 물체를 입자라고 한다. 1, 2, 3과 같은 자연수는 입자의 개수에서 유추해낸 추상적인 개념이다. 사과 1개와
사과 2개는 확연히 구분된다. 사과 3개를 넣어 포장한 상자와 6개를 넣어 포장한 상자는 다른 상자다. 이렇게 세 개들이 상자의 추상적인 개념이
숫자 ‘3’이고, 여섯 개들이 상자의 추상적인 개념은 숫자 ‘6’ 이다. 세 개들이 상자 두 개를 모으면 여섯 개들이 상자와 ‘사과의 개수’가
같아진다. 이것을 숫자 연산으로 표현하면 ‘3+3=6’이다. 덧셈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의 작용인 것이다.
야구공
2개가 담긴 상자에 야구공 3개를 더 넣으면 몇 개일까? 2+3=5, 즉 5개가 있다는 것은 직접 세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추상적 개념인
숫자의 셈을 통해 실제 물체를 더하고 빼면서 달라진 입자의 개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추상적인 덧셈과 뺄셈의 결과가 실제 물체를 더하고 뺀
결과와 일치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신기한 일이다. 숫자의 셈에 익숙해진 사람은 추상적인 개념의 ‘숫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물체의
‘개수’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숫자의 속성이 자연 현상과 대응되는 것에 매료된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는
“만물의 원리는 수(數)이며
만물은 수를 모방한다”라고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만물은 수를 모방한다고 주장할 만큼,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숫자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체 입자들의 개수 변화를 정확히
표현해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입자의 개수만 대변하는 숫자의 셈이 자연에 존재하는 물체의 상태를 제대로 기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돈에는 액면가가 적혀 있다. 1만원권 지폐에 적힌 10,000원은 1만원이라는 화폐 가치의 추상적인
값이다. 그래서 1만원짜리 화폐 2장을 더하면 정확히 2만원의 가치가 된다. 하지만 이 지폐의 물리적인 질량은 액면가처럼 언제나 같지는 않다.
낡은 지폐에는 때가 묻어 질량이 늘어났을 수도 있고 어떤 지폐는 귀퉁이가 찢어져 질량이 줄었을 수도 있다. 앞선 글 [킬로그램 원기는 다이어트
중]에서 얘기한 대로 사과 뿐만 아니라 질량 측정의 기준이 되는 킬로그램 원기 조차도 똑같은 질량의 킬로그램 원기는 없다고 한 것처럼, 사실
은행에서 바로 찍어낸 1만원권 지폐들도 모두 질량은 같을 수가 없다.
물체의
질량은 입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어떤 물체라도 낱개로 떼어낼 수 있거나, 따로 떨어져 있는 물체는 한 개의 입자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여러 개의 입자라도 하나로 뭉칠 수 있으면 한 개의 입자가 된다. 앞선 글 [달이 지구를 향해 떨어진다고?]에서 뉴턴이 고민했던
운동법칙의 대상은 천체이든 지상의 물체든 모두 낱개의 입자였다. 뉴턴 이전의 시대에는 지구, 달, 행성 모두 신의 섭리에 따라 태양을 중심으로
원 또는 타원의 기하학적인 궤적을 따라 운동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관념 속에 있던 신의 존재는 원과 같은 완벽한 대칭을 갖춘 모양에
대응되었고, 그 모양을 닮은 운동 궤적도 역시 신의 영역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뉴턴이 분석해 낸 달의 운동은 지구로 떨어지는
사과의 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단순한 기하학적 모양을 넘어 3차원
공간에서 위치를 표현하는 벡터라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졌다.
벡터도
숫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실제 공간에서 벡터의 개념에 대응되는 물체는 화살이다. 화살의 길이는 크기를
의미하고 화살촉이 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화살의 추상적 개념이 바로 화살표, 즉 벡터다. 화살표와 같은 벡터는 크기만 표시할 수 있는
숫자와 다르다. 공간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시작점과 종착점을 연결하는 화살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물체가
동쪽으로 30미터 이동했다면, 이 물체의 이동은 (거리, 방향) = (30미터, 동쪽)으로 표현된다. 같은 물체가 북쪽으로 40미터 이동했다면
이 물체의 이동 벡터는 (40미터, 북쪽)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물체가 처음 위치에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위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1=2처럼 단순히 사과 개수를 더할 때 사용한 덧셈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좀 불편하다. 크기의 합은 쉽게 할 수 있는데, 방향을 어떻게
더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과연 숫자가 아닌 ‘벡터’라는 객체의 덧셈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을 기술할 때,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뉴턴이다. 뉴턴이 정한 벡터의 덧셈은 간단했다.
자연의 현상을 따르는 것이다. 일정한 길이의 화살 두 개를 만들어 운동장처럼 판판한 장소에 각각의 화살을 벡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려놓는다.
같은 시작점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화살 두 개를 더하는 법은 두 번째 화살을 첫 번째 화살의 길이와 방향만큼 평행이동하여 첫 번째 화살촉의
위치에 두 번째 화살의 시작점을 내려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첫 번째 화살촉의 시작점과 두 번째 화살의 화살촉을 연결하는 새로운 화살이
만들어지는데 이 새로운 화살에 대응되는 벡터가 처음 두 벡터의 합이다. 뉴턴이 제시한 평행이동 규칙을 적용하면 (30미터, 동쪽)의 벡터와
(40미터, 북쪽)의 벡터의 합은 (50미터, 북북동쪽)이 된다. 이 모양은 바로 피타고라스 정리의 가장 간단한 예로 많이 쓰이는 가로
30미터, 높이 40미터, 빗변 50미터의 직각삼각형이다.
숫자의
덧셈과 마찬가지로 벡터의 덧셈도 자연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표현해 낸다. 처음에는 화살처럼 공간의 두 점을 잇는 형상에 대응하는
개념이었지만, 이 개념이 확장되면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위치를 나타내는 양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 점에서
특정 방향으로 향하는 속력이나 힘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앞선 글 [일상에서 접하는 거시적 양자 현상]에서 설명했던 자기장이나 벡터장도
같은 개념이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라는 공식에
나타난 힘 F와 가속도 a는 모두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갖는 벡터다. 이
벡터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운동법칙은 천체의 운동을 너무도 잘 설명하였다. 이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특정한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운동을 결정할 수 있었던 뉴턴의 운동법칙은 20세기 초 측정 기술과 측정 장치가 발달하면서 그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앞선 글 [움직이는 시계는 느리게 간다]에서 얘기한 대로 ‘빛의 속력은 항상 일정하다’는 측정 결과는 뉴턴이 당연히 여겼던 시간의 개념을 허물어
버렸다. 뉴턴이 무심코 가정했던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은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졌고, 뉴턴의 시간 개념은 지금도 우리 머릿속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일정불변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빛의 관점에서 보면, 뉴턴이 생각했던 시간과 길이, 질량은 물론 심지어 운동법칙까지도 달라진다. 이
관점의 변화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고, 나아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는 중력의 근원과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
개념까지 바꾸어 놓았다.
여기서
과학적 생각의 진화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자. 과학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이론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전부일까? 과학은 자연 현상을 관측하고, 그
관측 결과에 대응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우리 머릿속 개념으로 형상화하고 그 개념을 토대로 이론적 법칙을 만들어내고, 또 다시 새로운 현상을
예측한다. 이 과정에 들어있는 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이론적으로 예측한 결과가 실험으로 증명되거나 반증될 경우 그 결과에 따라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수정하는 피드백 작용까지 포함한다는데 있다. 이 피드백 작용을 통해 수정되는 대상에는 운동법칙과 같은 과학이론 자체 만이 아니라 그
이론을 세우면서 가정했던 기본적인 공리 혹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원리까지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제시했던 ‘일정불변한 빛의 속력’은 뉴턴이 생각했던 관성계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기본적인 가정이었다.
하지만 뉴턴 시대에 받아들여졌던 기본적인 공리나 가정은 빛의 속력보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나 혹은 중력이 크지 않은 물체였기 때문에 당시의
관측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과학은 새로운 자연 현상을 발견할 때마다 새로운 측정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개념을 찾아야 하고 그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과학적
이론은 대부분 실험을 통한 측정 결과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공리나 원리를 고민하게 된다. 앞선 글 [달이 지구를 향해 떨어진다고?]에서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라고 고민한 뉴턴의 배경에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등 많은 과학자들이 쌓아 놓은 측정 데이터가
있었다. 빛의 속력이 일정불변하다는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이론의 기본 가설 역시 실험적 측정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특수상대성 이론 이후에 아인슈타인이 내놓은 일반상대성 이론은 특별한 측정 결과가 아니고, “길이의 측정 기준이 모든 위치에서 똑같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실험에 의한 사실보다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 자명한 공리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앞선
글 [원심력은 가짜 힘]에서 제시된 뉴턴의 관성기준계에서는 물체의 운동은 관측자 위치에 상관없이 똑같은 운동법칙을 따른다. 물리학에서는 관측자의
위치가 변해도 물리적 법칙이나 측정 결과에 변화가 없는 상태를 변환불변성(translation invariance)라고
한다. 갈릴레오와 뉴턴이 제시했던 변환불변성은, 지상과 천상을 구분하여 각 공간의 물체는 서로 다른 운동 규칙을 따른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리적 법칙의 변환불변성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에도 함께 적용되는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변환불변성의
개념은 법칙이라기보다는 공리에 가깝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 있는 수소 원자와 달 표면에 있는 수소 원자의 발광 스펙트럼을 측정한다고 하면,
관측자가 지구, 달, 또는 우주 공간의 어느 점에 있더라도 관측 결과는 똑같은 스펙트럼이어야 한다. 또 이 스펙트럼은 100년 전이나 후에
측정하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를 주어야 한다. 현재까지 과학적 측정 결과는 공간의 위치 변환이나 시간의 측정 시점 변환에 대해 동등한 결과를 준다는
‘공리’를 위배하지 않는다. 100년 전의 측정과 현재의 측정 결과가 같다는 사실은 200년 전에도 같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구에서 백
억 광년 이상 떨어진 별에 있는 수소 원자 스펙트럼도 역시 현재 지구상의 수소 원자 스펙트럼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결과는 우주가
탄생하는 시점에서 현재까지 우주 공간 어느 곳에서도 똑같은 물리학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아인슈타인이 제기했던 위치에 따른 측정 기준의 변화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1미터 길이의 잣대라는 기준은 공간의 어느 지점에서도
똑같다는 개념이 아무 의심없이 우리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고민은 “현재 내 위치에서 1미터인 잣대가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는
1.1미터가 될 수 있을까?”처럼 황당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고민은 측정을 통해 직접 확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정한 길이의 측정
기준은 공간 자체의 성질이다. 1킬로미터 떨어진 공간의 기준을 비교하려면 같은 장소로 잣대를 옮겨야 하는데 같은 장소로 옮겨지는 순간 두 잣대는
같은 잣대가 되어 버린다.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점의 잣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앞선 글 [GPS의
위치는 시계가 결정한다]에서 얘기한 중력에 의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고려하면, 위치에 따른 측정 잣대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위치에 따라 잣대의 변화가 중력장과 연계되어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고, 그 아이디어는 중력장에 의해 휘어지는 빛의 경로 측정 결과와
더불어, 최근 보고된 중력파 측정 등을 통해 검증되었다.
중력에
의해 공간 측정 기준인 게이지가 변환된다는 아이디어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고, 어쩌면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개념을 확장하여 억지로 우리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그려낸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론적으로 확장된 개념에 대응되는 자연 현상이 예측되고 또 실험적으로 검증된다면, 이미 관측을
통해 유추한 개념과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시할 당시에는 관측된 결과를 맞추고 설명하기 위해 물체 간의 중력 법칙을
제시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공간 측정의 기준인 게이지가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더 근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자명하게 여겼던 공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서 출발해 새롭게 정립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 예측, 검증으로 이어지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이론물리학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넘어 중력이라는 힘의 근원이 공간에 따른 측정 잣대의 변화, 즉
국소적 게이지 변화에 있고 이 국소적 게이지의 변화가 물질 질량의 분포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게이지에
대한 개념은 일반상대론에 적용되기 훨씬 이전에 전자기력 이론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앞선 글 [스마트폰 배터리 한 개로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
수는?]에서 전하, 전압, 그리고 전기에너지에 대해 소개했다. 전자는 전압 차이가 ΔV인 두 지점 사이를 지나면서 그 전압 차이에 비례하는
운동에너지를 얻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지점의 전압 차이가 전자에 가해지는 힘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전기 퍼텐셜을 결정하는 전압은 상대적인
차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지점에서의 전기 퍼텐셜을 V 에서 V + C로 일정한 크기 C를 더해주거나 빼준다고 해도 퍼텐셜의
차이 는
변함이 없고 결과적으로 전자에 가해지는 힘에는 변화가 없다. 공간상에서 관측자의 위치나 측정 기준을 바꾸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전기
퍼텐셜의 측정 기준을 바꾼다는 점에서는 게이지 변환은 물리법칙이 바뀌지 않는 일종의 변환불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선
글 [일상에서 접하는 거시적 양자 현상]에서도 설명했듯이, 단순한 수학적 함수의 자유도 외에는 별다른 물리적 의미가 없던 전기 퍼텐셜과 자기
벡터 퍼텐셜의 국소적 게이지 변환은 물질파의 위상과 결합되는 순간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들어낸다. 전자기 퍼텐셜의 게이지 변화는 물질파 파동의
위상 변화를 의미하고, 그 결과는 곧바로 물질파의 속력 변화로 연결되어 고전적인 입자의 운동 관점에서 볼 때 외부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자기 퍼텐셜의 국소적 게이지 변화가 전자기장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곧 전하 입자에 작용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서 공간적으로 변하는 잣대의 기준이 중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앞선
글 [스마트폰 배터리 한 개로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 수는?]과 [자석은 왜 철을 끌어당길까?]에서 얘기한 전하 간에 작용하는 쿨롱 힘이나 자석
간의 힘은 모두 물체의 운동을 관찰하여 각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한 데이터에서 유추한 결과다. 뉴턴이 천체 관측 데이터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인 데이터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전자기 퍼텐셜의 측정 기준이 변환, 다시 말해 게이지
변환의 자유도가 전자기력의 근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은 일반상대론에서 중력을 보는 것과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1954년에는 양전닝과
로버트 밀스가 전자기 퍼텐셜의 게이지 변환 아이디어를 스핀 공간에 적용하여 확장시킨 게이지 이론을 발표하였다. 앞선 글 [크기가 없는 점 속에
숨겨진 거대한 공간]에서 설명한 대로 입자의 스핀 자유도에 대한 스핀의 방향을, 측정의 기준을 정하는 게이지의 변환으로 개념을 확장한 양-밀스의
아이디어는 곧바로 핵 입자 간에 작용하는 약력의 근원으로 해석되었고, 또 쿼크 간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양자 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의
게이지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게이지
이론은 물질파 파동의 위상, 스핀의 자유도, 쿼크의 색(color)
자유도에 전자기력, 약력, 강력 등의 힘의 근원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험과 관측을 통해 측정 데이터에서 힘의 규칙을 찾는 작업을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숫자나 벡터의 덧셈에서 확인했듯이 자연의 기본 성질을 만족하는 추상적 개념을 머릿속에 만들면 그 수학적 개념들
사이의 관계가 놀랍도록 정확하게 자연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게 된다. 예측된 결과가 실험적으로 검증되기만 하면 우리 머릿속의 추상적 존재에
불과하던 물리적인 개념이 자연 현상으로 되살아 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재하는 물리적 실체로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해
신의 영역인 천상계는 불변이고 완전하며 지상계는 변화가 있는 불완전한 세계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천상과 지상은 구성 원소도 달랐다. 지상계는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천상계는 제5원소인 아이테르(aither)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또 각 세계는 운동도 달랐다. 천상의 운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완전한 운동인 등속 원운동이지만, 지상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 운동이 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마땅히 검증할 수 있는 실험적 도구나 이론적 개념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천상과 지상의 운동에 대한 오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등 많은
과학자들의 측정 결과와 개념 정립을 통해서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가 되었고, 우주의 구성 원소에 대한 이해도 20세기 이후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 입자와 입자 간의 상호작용의 근원을 밝힐 수 있었다.
자연의
원리와 우주 만물의 근원에 대한 이해는 크게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은 실험관측을 통한 측정 결과와 우리 머릿속에 설정된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측정 방법과 기술의 발달로 원자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물체를 들여다 볼 수 있고 또 허블 망원경 같은 관측
장비를 이용해 백 수십 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초기 우주의 모습을 볼 수도 있지만, 그 관측 결과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정립된 과학적 개념과 이론이 필요하다. 때로는 현상에서 유도된 수학적 개념을 맞춰보고, 그 개념에서 출발해 새로운 추상적 개념을 유도하기도
하며, 또 한 발짝 더 나아가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가정을 뒤엎기도 한다. 우리 마음에서 임의의 과학적 개념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과학적
입장에서 이 모든 개념은 실험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실험을 통한 검증을 받지 못한 개념은 과학적 개념으로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핵심은 관측, 이론, 예측에서 다시 실험 검증으로 이어지는 순환고리이다. 이 순환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측된 현상을 추상화하는 우리의
마음이고 머릿속에 정립된 개념을 다시 꺼내 현상에 비춰 보는 검증 작업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어떤 일이든 항상 “왜?”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증거가 무엇인지,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지 묻는다. 딱히 뭐가 의심스러워서라기보다는 궁금한 걸 애써 지어낸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럴까?”라는 이 호기심이 바로 과학의 시작이다. 딱딱하고 수식적인 과학 교과서의 문제 풀이 틀에서 벗어나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곰곰이 되씹어 보고 “어떻게 그걸 아느냐?”를 차근차근 되묻는 과정이 곧 과학인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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