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일 일요일

125년 역사… 카네기홀의 장수 비결


올해 성공한 연주 내년에 또 한다? 새 레퍼토리 없으면 관객은 떠나

[Cover Story] 클라이브 길린슨 뉴욕 카네기홀 관장
클라이브 길린슨 뉴욕 카네기홀 관장
1891년 5월 5일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 이탈리아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신축 콘서트 홀 앞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의 행렬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댔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당시 돈 100만달러를 들였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호사가들의 화제에 올랐던 '뮤직 홀'의 개관일이었다. 첫 무대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지휘봉이 열었다. 차이콥스키 이후 125년, 뉴욕의 랜드마크가 된 카네기홀은 음악가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 번쯤 서 보기를 바라는 '꿈의 무대'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구스타프 말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부터 '스윙의 전설' 베니 굿맨, 빌리 홀리데이, 그리고 롤링스톤스와 비틀스가 카네기홀을 거쳐 갔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 음악 홀이 생겼지만 카네기홀의 명성은 지금도 굳건하다. 내년 카네기홀 초청으로 독주회를 여는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어릴 때부터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2800석 규모의 메인 홀(아이작 스턴 홀)에서 연주하게 돼 놀랐다"고 했다.

재정적으로 정부에 거의 기대지 않아

[Cover Story] 클라이브 길린슨 뉴욕 카네기홀 관장
카네기홀
카네기홀을 수익성이 뛰어난 홀로 보기는 어렵다. 개관 직후 연일 초대형 스타급 연주자를 무대에 세우며 지급한 개런티 때문에 내내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50년대 운영난을 겪으며 상업 빌딩으로 개발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그러나 명(名)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등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구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60년 뉴욕시가 500만달러를 들여 카네기홀을 인수했다. 이때 출범한 비영리 재단 카네기홀코퍼레이션이 지금까지 홀 운영을 맡고 있다. 재정적으로는 정부에 거의 기대지 않고 있다. 2015년 6월 말 기준 재무보고서를 보면 2014년 7월부터 1년 동안 지출이 109만3262달러인 데 비해 뉴욕시의 출자금은 29만9360달러였다.

자기 잇속에 밝은 기업인과 대부호들이 카네기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 카네기홀을 '꿈의 무대'로 유지시킬까. 지난 11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클라이브 길린슨(Gillinson·70) 관장 겸 예술감독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단장으로 21년간 일했던 길린슨 관장은 파산 위기에 처했던 LSO를 영국 최고 명성의 오케스트라로 만든 인물이다. 2005년부터 10년 넘게 카네기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길린슨 관장의 집무실에는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다양한 연주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카네기홀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첫인상은 어땠나.

"그전까지 환경과 너무 달랐다. LSO의 단장으로 일할 때는 주어진 임무가 명확했다. 파산 위기에 가까운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다음은 공연 흥행이었다. 그러나 카네기홀은 위기를 겪는 곳이 아니었다. 이미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뛰어난 경지에 이른 조직을 어떻게 하면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이미 안정된 조직은 새로운 시도를 꺼린다. 처음 내가 운영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몇몇 이사와의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이랬다. '혁신적으로 카네기홀을 이끌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조직의 생태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지 않으면 조직은 죽는다. 제자리에 안주하면 지루해지고, 결국은 정체되고 만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태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위험하다. 특히 문화·예술 조직이 정체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만약 작년에 성황을 이룬 프로그램이 있다고 치자. 아무리 엄청난 찬사를 받았더라도, 여기에 새로운 것을 가미하지 않고 반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질리고 만다. 그럼 누구도 카네기홀의 기획 공연을 찾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이전 것을 없애버리거나 새로운 걸 창조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는 '혁명(revolution)'이 아닌 '진화(evolution)'의 힘을 믿는다. 어떤 형태로든 변화와 발전을 끊임없이 추구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카네기홀이 새로운 문화 흐름을 주도하는 리더가 돼야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 기획 주저하는 이사 한명씩 찾아가 설득

[Cover Story] 클라이브 길린슨 뉴욕 카네기홀 관장
―어떻게 변화를 꾀했나.

"카네기홀의 공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여러 유명 연주자가 참여하는 갈라 콘서트였지만, 거기에 기대는 것과 다른 새로운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기획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계의 여러 지역을 집중 조명하는 대형 페스티벌 연주회를 열어 예술계의 새로운 어젠다를 설정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연주자들과 학생들을 연결하는 아카데미 펠로십 프로그램이었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카네기홀 운영이사회의 접근법은 대단히 신중했다. 입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대단히 세밀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며 내용을 확인했다. 자금 조달은 어떻게 할 것인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진행할 경우 위험 요소는 없는지 일일이 물었다. 결국에는 이 계획에 주저하는 이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 설득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숱하게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하지만 기대에 충족하는 답변을 하자, 선뜻 사업 추진안에 승인하고 자금을 댔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첫 번째는 '돈은 비전을 따라온다'는 것이다. 독지가 중에 마냥 안전하고 편안한 아이디어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득력 있는 비전과 아이디어를 분명하게 제시하면, 이들은 새로운 사업을 벌일 때에도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준다. 또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조직 내부의 반대 의견을 뚫고 나가는 경험의 중요성이다. 당시 내 제안에 운영이사들이 무작정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검증되지 않은 신참 관장이었다.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스스로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하게 했고, 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 또한 추진하던 계획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같은 철저한 확인 과정이 카네기홀 운영이사회가 나에게 갖는 신뢰의 밑바탕이 됐다. 나는 이런 방식을 카네기홀 직원들에게도 적용했다."

[Cover Story] 클라이브 길린슨 뉴욕 카네기홀 관장
세 개의 홀로 구성된 카네기홀에서 매년 열리는 연주회는 약 800회가량. 그중 4분의 1가량은 카네기홀이 직접 기획하는 공연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연주자들을 엄선해 소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클라이브 길린슨 관장이 이끄는 카네기홀은 2007~2008년 연 200회 이상의 기획 공연을 소화했고, 금융 위기 이후로는 연간 180회가량의 공연을 기획 연주로 채우고 있다. 그만큼 자부심도 대단하다. 카네기홀이 직접 기획한 공연에는 '카네기홀 기획(Carnegie hall presents)'임을 밝히고, 그렇지 않은 음악회 프로그램에는 '카네기홀과 무관한 공연'임을 명시하게 하고 있다.

 
길린슨 관장은 인기 연주자 중심이던 기존 기획 공연에 다채로운 문화권의 음악을 아우르는 페스티벌을 추가했다. 그는 부임 이후 다양한 지역을 음악·영화·무용 등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국제 페스티벌을 기획해 성공으로 이끌었다. 2007년 17일 동안 열린 '베를린 인 라이츠(Berlin in lights)'를 시작으로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 중국, 일본, 라틴 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등을 주제로 한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길린슨 관장은 "남아프리카 페스티벌의 경우 전체 관객의 60%가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카네기홀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페스티벌의 관객 역시 30~40%가 처음으로 카네기홀을 찾았다고 했다"며 "새로운 관객은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시도에 힘입어 카네기홀은 경기 흐름에 크게 흔들림 없이 후원자를 유지하고 있다. 카네기홀이 미국 국세청(IRS)에 제출한 비영리재단 공시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 위기, 유럽 재정 위기 등으로 전 세계 경기가 난항을 겪던 2007~2008년과 2010~2011년 두 차례를 제외하면 매년 모금액이 연 50만달러를 넘었다. 정기 후원에 가입한 사람들로부터 거둔 멤버십 수익도 꾸준히 6만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지갑 사정이 어려워지면 문화 소비를 줄이지 않나.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모금액이 줄거나 관객이 줄진 않았나.

"우리도 그럴 것으로 생각해 공연 수를 그전보다 30회가량 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멤버십을 통한 정기 후원은 크게 줄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대규모 기금 마련 행사 등을 줄여 전체 모금액은 전해보다 줄었지만, 멤버십 수입은 꾸준히 6만달러대로 큰 변동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여전히 문화적인 경험, 예술적인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예술적인 기준을 낮추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획 공연 횟수는 줄였지만 카네기홀이 지켜온 품격이 떨어지는 공연은 선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관객이 증명했다. 아무리 경기가 어려울 때라도 꾸준히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면, 사람들은 정신적인 풍요를 위해 기꺼이 문화 예술 공연에 지갑을 연다."

―예술 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일반 기업 운영과는 성격이 다를 것 같다.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한가.

 
"수익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쉼 없이 사회에 음악을 통해 공헌하는 역할을 해나가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는 게 다르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고 매 시즌 다른 기획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특히 카네기홀은 전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불리는 뉴욕에 있다는 점이 큰 기회이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과제다. 세계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선진화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뉴욕이다. 카네기홀이 기획하는 공연은 이런 뉴욕 사람 전반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며, 다양한 변화의 추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콘서트 형식의 파괴, 미디어 통합 추세, 공연 콘텐츠의 변화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반영해 뉴욕 청중, 미국 청중은 물론 전 세계 청중과 긴밀하게 교류해야 한다. 만약 일반 기업이라면 작년에 한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때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데려와 비슷한 형식의 공연을 또 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 일을 진행하는 동시에 내년에 어떻게 다른 것을 보여줄지 기획한다. 지금까지의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게 예술가의 숙명이며, 예술 조직의 숙명이다. 예술 기관이나 단체를 이끄는 사람은 조직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고 사업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려면 검증된 프로그램으로 거둘 수 있는 수익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모든 공연을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만으로 채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전을 계속해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카네기홀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잘 해온 프로그램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내용의 기획을 추진하는 식이다.

보통 예술 단체들은 잘나가는 연주자를 잡고 듣기 쉬운 레퍼토리를 연주하게 하면 티켓은 쉽게 팔린다고 생각한다. 또 어려운 프로그램으로 흥행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해나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진정으로 매력적인 프로그램에는 비평가는 물론 관객도, 후원자도 몰려든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획을 할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아니다. '누구나 끌려올 만큼 매력적인 프로젝트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 돈이 사업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이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자금은 후원자를 통해서든, 관람료를 통해서든 채워진다. 만약 계속해서 재정적으로 풀리지 않는 사업이 있다면 스스로 훌륭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까닭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노하우가 있나.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내가 정기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카네기홀을 성공으로 이끄는 동력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곳에서 진정으로 일하고 싶어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그만큼 애착을 가질까. 카네기홀은 최고의 운영이사들이 관여하고 싶어하는 조직일까. 세계 최고 실력의 연주자들은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고 싶어할까. 홀의 기획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가. 후원자들은 우리를 지원하고 싶어할까. 티켓 판매는 잘되고 있나. 한 달에 한 번이든, 6개월에 한 번이든 같은 질문을 던지더라도 이렇게 그동안 쌓인 지식을 점검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문도 함께 던질 수 있게 된다."

―조직 자체를 예술가로 바라볼 때의 리더십은 무엇이 다른가.

 
"진정한 리더십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하면 조직 내에 있는 자원과 기술, 경험과 지식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 기업을 이끄는 리더의 자질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을 통해 바람직한 리더십의 자질을 자주 목격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보다 각 악기를 잘 다룰 수 없다.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이고, 그들이 가진 아이디어가 더 뛰어날 수 있다. 지휘자의 몫은 이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과거에 득세했던 독재형 지휘자가 아닌, 기꺼이 협력하는 환경을 조성해낼 줄 아는 지휘자가 더 주목받는 시대다. 고 레너드 번스타인은 독재형 지휘자의 시대에 교육받은 인물이었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경청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는 음악에 대해 대단히 성실하고 박식했다. 모든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하고 분석했다. 음악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맥락을 모두 이해하려 애썼다.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음악을 논했다. 나는 그를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호기심을 잃거나 음악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지휘자와 일하는 연주자들은 그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음악에 반영된다는 것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훌륭한 예술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진 것을 알기에 진심으로 협력한다. 과거 연주자들에게 '의견을 가질 권리'조차 주지 않던 독재형 지휘자의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니크 네제 세겡은 연주자들의 아이디어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끊임없이 연주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늘 무대에서 놀라운 연주를 보여주곤 한다. 카네기홀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이 익숙한 디지털 시대에 효과적인 마케팅 방안은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안다. 215주년을 맞이해 마련한 콘텐츠로 큰 호응을 얻었던 '디지털 명예의 전당 2016'은 디지털 마케팅 팀에서 일하는 젊은 일반 직원들이 자유롭게 낸 아이디어를 채택한 것이었다."

―최근 디지털 기술 발전이 카네기홀에는 타격을 주지 않나.

"실황 연주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동영상 감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로 생생하게 전달한다고 해도 공연장 특유의 분위기와 긴장감, 생동감은 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카네기홀 개요

뉴욕 카네기홀
주소: 미국 뉴욕시 맨해튼 웨스트 57번가 881

설립자: 앤드루 카네기

설립 연도: 1891년

운영 주체: 비영리법인 카네기홀코퍼레이션

순자산: 243만4496달러(2015년 6월 말 미 국세청 공시 기준)

운영비 조달: 공연·대관 수입, 모금, 자산운용 수익, 회원 회비, 정부 보조금 등

공연 홀: 아이작 스턴 홀(2804석), 잰켄 홀(599석), 와일 리사이틀 홀(268석)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회생시킨 클라이브 길린슨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첼리스트였던 클라이브 길린슨 카네기홀 관장이 경영자로 변신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1982년 신축 홀인 바비칸센터로 옮긴 뒤 35만파운드 적자에 허덕이던 LSO 이사회가 길린슨에게 단장직을 맡긴 것이다. LSO는 원래 단원들이 돌아가면서 행정 스태프로 일하는 전통이 있었고, 길린슨은 한 차례 재무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없는 때엔 부인과 함께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1년 동안 내 공석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할 일을 하면 첼리스트로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로 첼리스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주마다 3000달러씩 적자를 내던 LSO의 재무제표를 2년 만에 정상으로 되돌린 뒤, 계속해서 단장으로 일했다.

LSO가 빠른 속도로 적자를 탈출한 비결은 최고의 지휘자·연주자와 함께한 엄격한 연주 품질 관리와 유연한 프로그램 구성에 있었다. 뉴욕타임스매거진은 "상업적으로 충분히 흥행할 만한 연주 프로그램을 소화하면서 동시에 LSO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균형 있게 구성한 것이 빠른 성공의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길린슨의 적극적인 태도도 큰 몫을 했다. 콜린 데이비스, 발레리 게르기에프 등 최고의 지휘자를 섭외했고,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60세를 기념하는 연주를 진행하기 위해 3년 전부터 그를 쫓아다니며 연주 계획을 짰다.

길린슨이 이끈 21년 사이 LSO는 영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LSO 라이브(live)'라는 자체 레이블을 출범해 다양한 앨범을 발매하며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었다. 영화 '해리 포터와 불의 잔', 모바일 게임 '캔디크러시사가'의 배경음악 등 영화·게임 음악 녹음도 꺼리지 않는 '잡식성' 오케스트라로도 명성이 높다.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이탈리아 밀라노 : 라 스칼라 극장

[Weekly BIZ]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1778년 개관한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가운데 하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리카르도 무티 등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라 스칼라 오페라단,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한다.

오스트리아 빈 : 무지크페어라인 빈

[Weekly BIZ]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1870년 개관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 연주 홀. 내부가 황금빛이기 때문에 '황금 홀'로 불린다. 매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신년 음악회를 여는 곳으로 유명하다.

독일 베를린 : 베를린필하모닉 홀

[Weekly BIZ]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1963년 개관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용 음악당. 객석이 무대를 감싸고 있는 오각형 형태. 독특한 배치 덕택에 객석 어디에서든 무대가 잘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 런던 : 로열앨버트 홀
[Weekly BIZ]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1893년 개관한 3000석 규모의 콘서트홀. 영국 최대 규모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1941년부터 세계 최대 클래식 음악 축제 중 하나인 'BBC 프롬스'가 열리는 곳이다.

일본 도쿄 : 산토리 홀
[Weekly BIZ] 유럽·아시아 5대 최고 연주홀
1986년 개관한 도쿄 최초의 콘서트 전용 홀. 뛰어난 음향 덕분에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소리의 보석 상자'로 부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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