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포기자의 준말인 ‘수포자’란 말이 어느 샌가부터 낯설지 않다. ‘수학은 어렵다’, ‘수학은 한번 놓치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불안감은 부모가 어릴 때부터 아이를 수학 학원이나 과외로 내모는 이유가 된다. 통계청의 2012년도 사교육비 조사를 보면 학생 1인당 사교육비 중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39%에 달했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11년도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초·중·고생의 76.2%가 수학 선행학습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최수일 공동대표(사진)는 “엄마의 초조함과 과도한 사교육, 선행학습이 아이를 수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28년간 교단에서 수학을 가르쳐온 그는 <착한 수학>이란 책을 썼다.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는 이유와 아이를 ‘수포자’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방법을 최 대표에게 물어봤다.
▲ 기계적인 문제 풀이 방식 교육, 아이들 공부 포기 멀어지게 해
우선 내신성적 조급증 없애고 개념 이해해서 풀면 재미 붙어
-수포자는 왜 생기나.
“수포자는 능력보다도 흥미 때문에 생긴다. 수학이 재미가 없으니까 자연히 공부도 안하게 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수학능력이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수학에 대해 갖는 흥미·자신감에서는 최하위권이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보다 훨씬 점수가 낮은 유럽권 국가에서 ‘수포자’들이 더 적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PISA 점수 상위권인 한·중·일은 엄청난 입시경쟁으로 인해 기계적인 문제풀이 방식이 유형화된 나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학습방식에 익숙한 학생들은 점수따기는 잘하지만 수학을 스스로 즐기진 못한다.”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쉽게 ‘수포자’가 되는 것은 ‘수학은 한번 포기하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뭔가.
“일단 현행 수학교육과정이 상당히 위계적이라는 이유가 있다. 초·중·고 교과과정 중 특정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중요한 건 논리적 사고와 확장 과정이지 결코 수학의 개념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초·중등 과정의 개념만 익히려고 마음만 먹으면 한달 만에도 익힐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수학은 학문적인 수학공식 등을 복잡하게 늘어놓아 아이들이 지레 겁을 먹게 만든다. ‘수학은 한번 놓치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인식도 이런 위계적인 교육과정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영문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듯, 수학을 배우는 이유도 수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다. 공식을 외우는 것보다는 수학적 사고를 실생활에 적용·응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수학 교육이 유독 문제풀이 방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한국에선 일제고사형 시험이 일반화돼 있다. 일제고사의 핵심은 비교다. 학부모들은 유치원 때부터 비공식적으로든 아이들을 수치로 평가해주길 원한다. 잘하는 아이 부모는 자기 애가 남보다 낫다는 걸 인정받기 원해서, 혹은 못하는 아이 부모도 혹시라도 우리 애가 뒤처지는 건 아닐까하는 우려에서다. 문제는 점수가 점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가 성적이 나쁘면 학부모 그룹에서도 왕따가 된다. 그러면 학부모는 조급한 마음에 강제로 점수따는 방법을 가르치게 된다. 심지어 유치원 아이에게 IQ 검사까지 대비를 시키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수학 선행학습이 수포자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까.
“수학 선행학습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독’이 될 가능성이 많다. 선행학습은 경쟁에서 탈락될까봐 불안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이용한 학원의 상술이다. 학원의 본 목적은 장사다. ‘지금도 부족하다’, ‘남들은 다 앞서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해 학원에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현행 수학 교육과정은 제 나이에 겨우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돼있다. 선행학습을 하면 당연히 대다수는 따라가지 못한다. 수학에 대한 흥미도 잃고 학습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학원은 선행했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문제를 풀게 한다. 수학 개념을 알기도 전에 문제풀이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다. 개념을 모르니까 문제풀이에 집착하고, 문제풀이에 집착할수록 개념과는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수포자 학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해라. 수포자 학부모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게 내신포기 선언을 시키는 거다. 수학공부에 대한 조급증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 조급증이라는 게, 대체로 그저 점수따기용 문제풀이 방식을 가르치려는 거다.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학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잠깐은 불안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볼 땐 훨씬 이득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엄마가 수학적 내용이나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아이에게 긍정적인 피드백과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면 애가 점수를 받아오면 엄마 눈치를 보는데, 이때 엄마가 학원가자고 손을 잡아끌거나 조급해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엄마의 부정적인 피드백이 쌓이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돼서 수포자의 길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수학만 보면 엄마가 먼저 생각나는 거다. ‘아! 이걸 못하면 또 엄마한테 혼나겠구나’ 하고. 대신 아이가 뭘 어려워하는지 스스로 진단하고 바꿔나가게 하면 스스로 알아서 찾아 나간다.”
-수학을 힘들어하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포인트는 ‘점수와 상관없이 수학을 정확히 하게 하라’는 것이다. 문제풀이 방식보다도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가 중요하다.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서 풀면 재밌다.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수학 자체를 좋아하기보단 수학적 사고를 좋아한다. 개념에서 이해와 문제풀이로 이어지는 수학적 사고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위 ‘대학 나오면 덧셈·뺄셈만 잘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기계적 문제풀이에 갇힌 수학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는 ‘수학적 사고’를 기른다면, 수학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경향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