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엽기적인’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 사진만 봐서는 건강식품을 만드는 장면 같다. 얇게 저민 육포 같이 생긴 물체가 투명한 포장지에 담겨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모든 과정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모습까지 있다.
하지만 그 물체는 쫄깃쫄깃한 육포가 아니었다. 흰 포장지는 생물 실험재료를 보존할 때 쓰는 파라핀이었고, 육포처럼 보인 물체는 흐물흐물한 뇌, 그것도 막 죽은 사람의 뇌를 얇게 저며 만든 시료였다. 이런 시료가 방 한 구석에 수십 장 쌓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연구를 하려고 이런 시료를 준비한 걸까. ‘커다란 뇌’ 지도가 완성되다
연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 여성이 있었는데, 사전에 독일 뒤셀도르프대에 자신의 뇌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특별한 뇌질환이나 정신질환이 없는 여성이었다. 율리히연구센터 연구팀은 죽은 지 14시간 만에 기증자의 시체에서 무게가 1392g인 건강한 뇌를 적출했고, 이 뇌를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5개월 동안 보관했다. 2003년 4월, 연구팀은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전체 형상을 조사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포르말린 용액에서 뇌를 꺼낸 뒤 기포를 제거하고 특수 유리병에 담아 1.5테슬라(T)의 의료용 MRI(자기공명영상)로 촬영했다.
5년 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뇌에 파라핀 왁스를 입힌 뒤 얇게 저며 두께가 20μm(마이크로미터, 1000분의 1mm)인 얇은 판 모양의 시료 7404장을 만들었다. 이를 광학현미경으로 1000시간에 걸쳐 촬영해 2차원 영상 자료로 만든 뒤 맥길대 등 캐나다 연구진과 함께 디지털 자료로 변환했다. 디지털 영상은 크기가 최고 가로 1만3000화소(픽셀), 세로 1만 1000화소에 달했고, 10μm까지 구분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마치 종이를 쌓아 두꺼운 입체 도형을 만들 듯, 2차원 자료를 한데 모아 뇌 입체 영상을 만들었다. 가로, 세로, 높이 각각 20μm까지 구분할 수 있는 뇌 지도였다. 이렇게 스캔부터 보정 작업까지 만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데이터는 모두 1테라바이트(TB)에 육박했다.
‘빅브레인(거대한 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3차원 영상 모형은 지금까지 인류가 손에 넣은 어떤 뇌 영상보다 거대하고 복잡하며 상세하다. 뇌의 구석구석이 두 눈으로 보듯 실감난다. 연구진은 이 자료를 모두에게 공개했다(맥길대 빅브레인 서버에 신청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종민 한양대 전기생체공학부 교수는 “빅브레인은 워낙 데이터량이 많아 인터넷을 통해 이용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라며 “아예 데이터 자체를 국내에 들여와 서버를 구축한 뒤 올해 말부터 연구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빅브레인이 최고로 정밀한 자료는 아니다. 뇌과학 연구에 많이 이용하는 쥐는 가로세로 1μm까지 구분할 수 있는, 월등히 상세한 뇌 지도가 있다. 사람은 물론 원숭이, 쥐, 고양이 등의 각종 뇌 영상(MRI, 광학현미경 등)을 모은 ‘브레인맵’ 프로젝트(미국국립보건원 지원으로 2005년부터 구축)에는 비록 조직 일부지만 0.46μm까지 구분할 수 있는 영상도 있다(신경세포 하나가 새끼손톱만하게 확대된다). 빅브레인은 이에 비하면 아직 젖빛유리처럼 흐릿한 수준이다. 하지만 고르게 얇게 저민 촘촘한 영상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장점이다. 앞으로 더 많은 뇌를 연구하면 뇌 사진도 많이 찍을 테고, 해상도도 올라갈 것이다.
다만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보다 워낙 커서 지도화 작업이 오랜 걸린다. 뇌 기증자가 매우 적고, 다른 장기보다 사후에 유독 더 변형되기 쉬운 점도 뇌지도 제작이 어려운 이유다.
데이터 처리 능력도 문제다. 1μm 길이를 구분할 수 있는 쥐의 뇌 입체영상은 자료 크기가 빅브레인의 8배인 8TB다. 연구팀은 사람의 뇌를 같은 해상도로 만들면 데이터량이 현재의 2만 1000배인 21페타바이트(PB)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힉스 입자를 찾아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1년 동안 만든 모든 데이터(약 15PB)보다 많은 양이다. 현재의 상용 컴퓨터로 이만한 덩치의 입체 영상 모형을 제대로 처리하기란 힘들다. 흐릿한 영상은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다. 빅브레인은 최고로 상세한 뇌지도를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2023년, 가상뇌가 온다
빅브레인은 더 큰 뇌지도 프로젝트의 일부다. ‘휴먼브레인프로젝트’라는, 지상 최대의 연구 프로그램 중 하나다. 헨리 마크람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교수가 이끌고 으며, 2023년까지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시냅스 전체를 정교하게 모사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제 세포를 만드는 것은 아니고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가상으로 만든다. 일종의 인공뇌 또는 가상뇌인 셈인데, 또 하나의 뇌지도라고 볼 수 있다(과학동아 2012년 3월호 특집 ‘인공뇌’ 참조). 단순히 신경세포의 연결만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게 아니라 시냅스가 구성되는 방식, 신경전달물질을 이용한 신호 전달 체계까지 정교하게 모사하는 게 목표다.
뇌는 개인마다 구체적인 모양이나 특성이 다르다. 유전자가 담겨있는 게놈도 개인별로 다르지만, DNA는 길게 이어진 선으로 1차원 도형인데다 4개의 염기만으로 이뤄져 있어 단순하다. 어느 자리에 어떤 부호(염기)가 서로 다른지만 비교하면 된다. 하지만 뇌는 3차원이다. 그래서 ‘빅브레인’처럼 한 명의 뇌를 이용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해도 개인별로 모양이나 크기, 위치가 조금씩 달라 다른 사람의 뇌와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뇌 하나가 ‘표준 뇌’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실제 뇌를 이용해 표준 뇌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을 충실히 따라 만든 가상뇌로 그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
가상뇌를 만드는 과정에서 뇌의 메커니즘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마크람 교수는 2012년 6월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고문을 통해 “뇌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예측함으로써 우리는 뇌의 기능을 모든 측면에서 점점 더 빨리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상은 신경전달물질부터 유전자, 단백질, 뉴런의 전기적 특성, 시냅스와 회로, 그리고 ‘기능’ 등 뇌를 구성하고 뇌가 작동하는 모든 단계를 포함한다.
휴먼브레인프로젝트는 2005년 ‘블루브레인’이라는 인공뇌 연구로 시작됐고, 2023년 최종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첫 해인 2005년에는 하나의 신경세포를 컴퓨터로 모사하는 연구를 했다. 같은 해 두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 시냅스를 형성하는 과정도 모사했다. 천천히 수를 늘려서 2008년에는 신경세포 1만 개로 이뤄진 신피질의 원주(컬럼, 신경세포의 모음) 하나를 모사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내년까지 신경세포 수를 100배 늘려서 쥐의 뇌 전체를 모사할 예정이며, 2023년에는 사람의 뇌 전체를 모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휴먼브레인프로젝트는 유럽공동체(EC)가 2013년 선정한 ‘FET 플래그십 이니셔티브’의 최종 프로젝트다. FET 플래그십 이니셔티브는 두 개의 연구 과제에 10년간 우리 돈 1조 6000억 원(10억 유로)을 집중 지원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지난해까지 6개 연구과제가 경쟁을 벌였는데, 올해 1월 말 휴먼브레인프로젝트와 그래핀 연구 프로젝트인 ‘그래핀플래그십’ 두 가지가 최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미국과 함께 세계 과학계의 양대 축인 유럽이 21세기를 선도할 최우선 연구 과제로 뇌과학, 특히 브레인맵 프로젝트를 선정했다는 신호탄이다.
미국, 다시 한번 달을 쏘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2월 중순, 미국이 강력한 맞불을 놨다. 오바마 대통령이 2월12일 연초에 의회에서 브레인맵 분야를 언급하며 유럽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고 역설했다. 휴먼게놈프로젝트를 이끌며 세계 생명과학계를 쥐락펴락한 프랜시스 콜린스 미국국립보건원(NIH) 원장까지 나섰다. 급기야 3월 15일, UC버클리와 컬럼비아대 등 주요 참여 연구단체의 과학자들이 ‘사이언스’에 구체적인 계획을 발
표했다. 연구팀은 15년 안에 물고기인 제브라피시의 전체 뇌 기능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휴먼브레인프로젝트보다는 느린 편인데, 연구 범위가 넓고 특히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뇌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브레인액티비티맵’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계획은 뇌지도 자체는 물론, 뇌지도를 구축하는 도구(실시간 영상장비), 그리고 뇌의 기능을 연구하는 데까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상 뇌과학의 모든 분야를 ‘브레인맵’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휴먼게놈프로젝트로 게놈 연구의 주도권을 잡은 미국이 다음 생명과학 과제로 뇌과학, 그 중에서도 브레인맵 분야를 선정하며 유럽에 도전장을 낸 형국이다.
하지만 브레인액티비티맵 연구는 아직 행정부 차원에서 내세운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의회의 승인부터 가시밭길이다. 특히 지나치게 졸속이라는 지적이 있다. ‘네이처’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2011년 가을부터다. 불과 1년 반 만에 급조된 계획인 셈이다.
미국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계획을 두고 “또 다른 문샷(moon shot) 계획”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샷 계획은 196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폴로 계획의 별명이다.
미국은 당시 구소련에 뒤졌던 우주 경쟁 구도를 단숨에 역전시키기 위해, 유인 달탐사에 국가적인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1962년 고 케네디 대통령이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제안한 지 7년 만인 1969년, 결국 달에 첫 우주인 고(故)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을 보내며 역전에 성공했다.
브레인액티비티맵 계획은 당시의 문샷 계획을 연상시킨다. 대상만 구소련에서 유럽으로, 달에서 뇌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문샷 계획이 시대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많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새 접근(브레인액티비티맵)은 기존 연구를 잘 유지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저명한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말을 인용해, 기존 뇌과학 연구가 오히려 위축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첫 문샷 계획, 즉 아폴로 계획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미국의 브레인액티비티맵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인류가 만난 가장 복잡한 구조물’로 꼽히는 뇌는, 어쩌면 달보다 더 닿기 어려운 대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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