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평점 :
                                                                                                                                                                                                                








과학자들은 절대 말하지 않는 과학지식의 한계


천동설과 지동설도 결국 과학자들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힉스 입자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다고 보도되었을 때, 수많은 덧글들이 신의 존재를 조롱하고 창조론을 믿는 신앙인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입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 중 하나가 스티븐 호킹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를 읽으며 새삼 깨달은 것은 신앙과 과학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뿌리에서 출발한다는 것과, 우리가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상 과학과 과학의 싸움이라는 것, 그리고 과학지식이 가진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지만 과학적 지식의 토대가 더 견고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장하석 교수는"1995년 28세의 나이로 런던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10년부터 게임브리지 대학교 과학사-과학 철학부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과학을 주제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학풍을 지니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중들에게 '과학철학'의 내용을 알기 쉽게 가르치는 데 탁월하며, EBS 특별기획으로 그의 강의가 방송되었을 때 끄어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2014년 봄에 EBS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었던 열두 차례의 강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7).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자의 눈으로 과학적 상식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한 책입니다. 장하석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과학철학계의 거장들이 내놓았던 질문들을 다루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과학철학계의 질문은 과학탐구의 본질, 즉 과학지식의 정당화와 지식의 발견 과정을 새롭게 환기시켜 줍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지식의 기반은 관측이라고들 하는데 인간이 하는 관측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또 그 관측을 가지고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과학지식은 꾸준히 축적되는가, 아니면 혁명적으로 개편되기도 하는가?
과학적 진리란 무엇이고, 우리가 과연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과학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진보하는 것인가?


"관측 자체가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철학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59).

과학 지식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뒤통수를 크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과학자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놓는 통쾌한 일면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식론적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과학철학자의 시각에서는 "과학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 주제넘은 이야기"라고 잘라 말합니다.

과학지식은 본질적으로 관측을 기반으로 합니다. 문제는 관측이 단순히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교수는 "관측 자체가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철학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59)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경험주의 인식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인간의 경험이란 본질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적 지식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다만, 정밀한 관측과 성공적인 측정을 통해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과학지식이 가진 한계입니다.

장하석 교수는 과학지식이 가진 한계와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과학사를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포퍼와 쿤의 이론을 통해 논의의 쟁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과학상식을 매개로 주입식으로 가르쳐지는 우리 과학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며, 과학이 겸허해야 하는 이유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과학의 다원주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포퍼는 과학적 태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이론을 포기하고 더 좋은 새로운 이론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반면 종교적 교리는 불변하며, 신앙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죽인다고 해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29). 과학의 정수는 비판정신이며, 또 언제든지 지금은 진리하고 믿고 있는 이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포퍼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독단성을 보일 수밖에 없고, 그런 독단성은 과학적 태도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과학에는 절대적인 지식이란 없고 지식을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 과학이 유일무이한 진리를 추구하고 또 그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멋진 꿈이었습니다. 과학의 초창기에 뉴튼 같은 사람은 이론 하나만 잘 만들면 신이 정말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가 하는 섭리를 알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멋진 꿈이지만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378).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은 진보할 수 있지만, 과학이 어떤 절대적 진리에 다가간다는 믿음에는 회의적입니다. 이 책은 과학사를 통해 상식적 과학지식을 확립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겨웠던가를 보여주는데, 과학탐구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다"를 암송할 것이 아니라,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상식적 과학지식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학의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에도 명확한 정답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과학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때 남는 것은, 과학적 탐구를 해본 경험이고 그 경험에서 익힌 과학적 사고방식과 과학지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입니다"(8).

그러나 장하석 교수의 강의는 과학지식의 회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발견을 해나가는 대안으로 과학 다원주의를 주장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같은 분야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시에 여러 방향의 지식을 추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창의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자연으로부터 최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378-379).

​장하석 교수의 다원주의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쿤의 말처럼, "과학은 진보하지만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150) 통찰이 독자의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과학이론은 자꾸 바뀌고 한때, 확실하다고 했던 이론도 폐기되곤 합니다. 매일 아침 9시에 주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었던 거위가 몇 년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매일 아침 9시는 먹이를 먹는 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도, 다음날 아침 9시에 주인에게 잡아먹힐 운명에 처할 수 있는 것처럼, 경험적 지식의 한계 안에 갇힌 과학이론도 언제 어떻게 폐기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지식의 발견은 우리가 새롭게 알게된 지식만큼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어쩌면 과학의 힘보다 철학의 힘을 더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한계 안에 갇혀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가는 통찰과 비판적 시각은 또 생각의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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