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시간축이 개입함으로써 발생되는 기상천외의
해프닝들. 물리학은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4차원의 세계가 현실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만약 4차원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며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서울시의 한복판에서도 볼 수 있을까, 탐험대를 조직하여 히말라야에나 가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달나라에나 가야 보게 될까?
4차원세계를 밝히기 위해 한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만일 공간이 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또 곧바른 공간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
공간이 곧바르다면 보통 얘기하는 평행선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휘었다면 평행선이 없거나, 거꾸로 무수히 있을 것이다. 이 질문들도 결국 '만약 4차원공간이 있다면', 또는 '만약 공간이 휘었다면'이라는 전제 아래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이 '만약'이라는 것이다.
기하학은 이론, 물리학은 실제
현세가 3차원인가 4차원인가는 수학이 알 바 아니다. 우주공간이 유클리드적인가 또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면 안되는가는 수학이라는 학문으로서는 알 수 없다. 수학은 단지 공리에 충실할 뿐이다. 만약 유클리드적이라면 이런 결과가, 리만적이라면 이런 결과가 된다는 것을 빈틈없이 표현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이에 반해 물리학이라는 자연과학은 어디까지나 자연계를 대상으로 한다. 자연계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수학은 단지 연구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수학 가운데서 도형을 취급하는 분야를 기하학이라 한다. 또 자연과학 가운데서 공간이나 우주를 취급하는 학문분야는 주로 물리학이다.
만약 형식적인 이론에 치중한다면 이야기를 기하학에서 끝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기하학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형식적인 기술보다도 실제의 현상에 보다 많은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은 결국 물리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들 것이다.
물리학은 수학과 달리 관측과 실험의 결과로 얻어진 사살만이 진실로 인정받는다. 이를테면 사실과 다른 이론은 설사 아무리 솔깃한 것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크게 보면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는 가로 세로 높이의 세 차원의 있으나 네번째 차원이 과연 존재할까? 아무래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예컨대 3각자를 써서 한 점을 지나는 평행선을 그려보면 유클리드가 말한대로 하나 밖에 그릴 수 없다. 그렇다면 현세는 3차원이며 또 유클리드적인가?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운동장에 그린 3각형의 내각의 합은 1백80˚인데 비하여 지구표면에 크게 그리면 1백80˚가 넘는다. 이처럼 상식을 초월한 큰 것을 생각해 보면 뜻밖의 결과가 나올는지 모른다.
예로 밤하늘을 수놓는 2개의 별과 지구를 세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그 내각의 합을 측정해보자.
만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정확하게 1백80˚라면 우주공간은 유클리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각의 합이 1백80˚이상 된다면 플러스(+)의 곡률을 가지는 우주가 되고, 1백80˚이하면 마이너스(-) 곡률을 가지는 우주가 될 것이다. 즉 둘다 비유클리드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가정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성은 없다. 현재까지 설치된 어떤 망원경으로도 그 차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설령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성운을 건너 그보다 더먼 성운까지 관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것은 우주공간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측정 오차도 따를 것이다.
아뭏든 일상생활의 안목으로 자연계를 바라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서울역은 남대문로에 있다. 액자는 벽에 걸려있고, 사과는 탁자위에 놓여있다. 이들은 모두 물체의 항구적(恒久的) 존재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개가 대문 옆에 누워있다, 참새가 가게앞 전선에 앉아 있다 등은 일시적인 상태이다. 또 우체국 앞에서 자동차가 정면충돌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곧 "언제?"라는 시각을 물어본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내용 이외에 우리가 최소한으로 알고 싶은 것은 '어디'와 '언제'이다. 신문을 봐도 이 두가지는 반드시 쓰여 있다.
사건이라는 말은 상식적으로는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이것을 넓게 해석하면 개가 잠자는 것도 사건이고, 액자가 벽에 걸려 있는 것도 사건이다. 그리고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어디라는 장소의 지정과 시각의 표현이 꼭 필요하다.
서울역이나 벽의 액자는 시간t가 변해도 공간좌표(x,y,z)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이나 달리는 자동차라면 (x,y,z)도 변화한다. 아뭏든 사건을 나타내는데 4개의 변수가 요구됨은 확실하다.
역학은 4차원세계의 예외
우리는 여기서 4차원의 세계가 현실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만약 4차원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며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서울시의 한복판에서도 볼 수 있을까, 탐험대를 조직하여 히말라야에나 가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달나라에나 가야 보게 될까?
4차원세계를 밝히기 위해 한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만일 공간이 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또 곧바른 공간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
공간이 곧바르다면 보통 얘기하는 평행선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휘었다면 평행선이 없거나, 거꾸로 무수히 있을 것이다. 이 질문들도 결국 '만약 4차원공간이 있다면', 또는 '만약 공간이 휘었다면'이라는 전제 아래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이 '만약'이라는 것이다.
기하학은 이론, 물리학은 실제
현세가 3차원인가 4차원인가는 수학이 알 바 아니다. 우주공간이 유클리드적인가 또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면 안되는가는 수학이라는 학문으로서는 알 수 없다. 수학은 단지 공리에 충실할 뿐이다. 만약 유클리드적이라면 이런 결과가, 리만적이라면 이런 결과가 된다는 것을 빈틈없이 표현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이에 반해 물리학이라는 자연과학은 어디까지나 자연계를 대상으로 한다. 자연계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수학은 단지 연구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수학 가운데서 도형을 취급하는 분야를 기하학이라 한다. 또 자연과학 가운데서 공간이나 우주를 취급하는 학문분야는 주로 물리학이다.
만약 형식적인 이론에 치중한다면 이야기를 기하학에서 끝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기하학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형식적인 기술보다도 실제의 현상에 보다 많은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은 결국 물리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들 것이다.
물리학은 수학과 달리 관측과 실험의 결과로 얻어진 사살만이 진실로 인정받는다. 이를테면 사실과 다른 이론은 설사 아무리 솔깃한 것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크게 보면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는 가로 세로 높이의 세 차원의 있으나 네번째 차원이 과연 존재할까? 아무래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예컨대 3각자를 써서 한 점을 지나는 평행선을 그려보면 유클리드가 말한대로 하나 밖에 그릴 수 없다. 그렇다면 현세는 3차원이며 또 유클리드적인가?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운동장에 그린 3각형의 내각의 합은 1백80˚인데 비하여 지구표면에 크게 그리면 1백80˚가 넘는다. 이처럼 상식을 초월한 큰 것을 생각해 보면 뜻밖의 결과가 나올는지 모른다.
예로 밤하늘을 수놓는 2개의 별과 지구를 세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그 내각의 합을 측정해보자.
만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정확하게 1백80˚라면 우주공간은 유클리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각의 합이 1백80˚이상 된다면 플러스(+)의 곡률을 가지는 우주가 되고, 1백80˚이하면 마이너스(-) 곡률을 가지는 우주가 될 것이다. 즉 둘다 비유클리드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가정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성은 없다. 현재까지 설치된 어떤 망원경으로도 그 차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설령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성운을 건너 그보다 더먼 성운까지 관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것은 우주공간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측정 오차도 따를 것이다.
아뭏든 일상생활의 안목으로 자연계를 바라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서울역은 남대문로에 있다. 액자는 벽에 걸려있고, 사과는 탁자위에 놓여있다. 이들은 모두 물체의 항구적(恒久的) 존재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개가 대문 옆에 누워있다, 참새가 가게앞 전선에 앉아 있다 등은 일시적인 상태이다. 또 우체국 앞에서 자동차가 정면충돌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곧 "언제?"라는 시각을 물어본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내용 이외에 우리가 최소한으로 알고 싶은 것은 '어디'와 '언제'이다. 신문을 봐도 이 두가지는 반드시 쓰여 있다.
사건이라는 말은 상식적으로는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이것을 넓게 해석하면 개가 잠자는 것도 사건이고, 액자가 벽에 걸려 있는 것도 사건이다. 그리고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어디라는 장소의 지정과 시각의 표현이 꼭 필요하다.
서울역이나 벽의 액자는 시간t가 변해도 공간좌표(x,y,z)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이나 달리는 자동차라면 (x,y,z)도 변화한다. 아뭏든 사건을 나타내는데 4개의 변수가 요구됨은 확실하다.
역학은 4차원세계의 예외
3차원의세계에서는 2차원의 그림을 그린다. 따라서 4차원세계에서는 3차원의 그림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입체필기도구가 등장해야 한다.
이야기를 좀더 물리학적으로 다루어 보자. 물리학이란 어떤 종류의 사건을 기술하는 학문인가? 살인사건이나 기차전복사건은 사회문제이며, 인기가수가 어쨌다는 해프닝은 주간지에 맡기면 된다. 그러나 자연계에서의 현상, 예컨대 온도, 전자기의 세기, 파동 또는 기압이나 풍속등은 '언제' '어디서' 어느만큼의 양을 말하지 않으면 정확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예로 온도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체속이든 액체속이든 고체속이든 또는 표면이든 간에 거기에는 뜨겁거나 찬 정도가 존재한다. 이것을 온도라고 하며 기호 T로 표시한다. 장소가 달라지면 온도가 다른 것이 보통이므로 T는 우선 (x,y,z)의 함수이다.
그런데 같은 장소라도 어제와 오늘과의 온도가 다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1초 먼저와 뒤에도 온도는 다를는지 모른다. 즉 T는 시간t의 함수이기도 하다.
이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T=T(x,y,z,t)가 된다. 즉 좌변은 온도의 수치이며 우변은 그것이 4변수의 식으로 기술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밖에 전기장 E, 자기장 H, 밀도 ρ등도 모두 시간과 장소의 함수이다.
물리량은 보통 이러한 4변수함수이지만 역학(力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예를들어 질점(물리적으로 물체의 모든 질량이 집중된 점)의 움직임을 추적해 가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질점의 위치가 변한다. 그러나 시공간의 한점을 질점으로 지정했을 때 거기에서는 4변수가 통용되지 않는다. 온도나 밀도와 같이 크기를 갖는 물리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점에 질점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만 남을 뿐이다.
보통의 물리량은 4변수를 지정하면 값이 정해진다. 다시 말해 4변수중 어느 하나만 없어도 값은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질점은 그 위치가 시간의 함수로 정해질 뿐이다. 즉 질점은 +1(질점이 존재하는)과 0(질점이 존재하지 않는) 두 종류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동역학에서 전자나 광량자등의 상태를 표현하는데는 4변수가 다시 등장한다. 즉 ψ=ψ(x,y,z,t)로 표현되는 것이다. 단지 시간이 경과해도 상태의 변화가 없을 때만(바닥상태) 시간 t가 떨어져 나간다.
요컨대 4변수(x,y,z,t)에 의한 4차원 공간(시공간)은 위치뿐만 아니라 사건을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어페어(affair)라고 부른다. 이 어페어는 물리학에서(특히 상대성이론에서) 사건이라고 번역된다.
지금까지 사건이라는 말을 자주 썼지만 자연과학에서는 해프닝이 아니고 시공간 내의 점을 지정하였을 때 거기에서의 물리상태(또는 물리량)라는 의미이다. 또 이에 반해 3차원공간 (x,y,z)내의 점은 위치라고 부른다.
왜 시간은 1차원인가?
아다시피 기하학은 공간의 성질을 구명하는 학문이다. 2차원 3차원 4차원 또는 n차원으로 차원의 차이가 있을망정 공간은 어디까지나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 직면하였을 때 새로 시간이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간은 물리적인 양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한없이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지표이다. 한편 시각이란 시간 속에있는 어느 순간을 말한다. 시각을 표현하는데는 어떤 원칙이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를 원점으로 잡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문제되는 시각까지의 시간적 간격을 활용, 시각을 기술한다.
시간은 단 하나의 변수 t로 표시된다. 즉 시간 자체는 1차원인 것이다.
공간이 3차원인데 왜 시간은 1차원인가? 이것은 답하기 곤란한 문제이다. 분명히 1이란 하나의 정수에 지나지 않으며 2나 3도 정수인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시간은 1차원, 공간은 3차원으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다만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왜 시간은 1차원인가'하는 의문은 '왜 우주라는 것이 존재하는가'하는 질문과 같은 정도로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에 대답할 수 없다. 또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이 이 물음에 해답을 줄 수있는가 어떤가도 우리는 모른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2차원의 시간
2개의
시간축은 공상소설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타임머신처럼 시간축의 방향으로(과거 또는 미래의 방향으로) 치닫는 기계가 등장한다. 이것들은 공상이라 할지언정 사람의 머리로 공상할 수 있는 기계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상과학소설이라도 2차원의 시간에 대해 쓴 것은 아직 없다. 그만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2차원의 시간이란 시각을 지정할 때 t₁과 t₂의 두 변수가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즉 시간에 넓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로 어떤 사람이 t₁축에 따라 오른쪽으로 달린다고 하자(그림 참조). 이 사람은 평면상에있는 A라든가 B라든가 하는 시각의 그림자를 경험할 것이다. 먼저 A₁을 만나고 나서 B₁을만난다. 그런데 이것과는 독립된 축 t₂방향으로 향하는 사람은 먼저 B₂를 경험하고 나중에A₂를 만난다. 이 그래프는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A가 탄생, B가 죽음이라고 하면 t₂의 시간에서 보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노인에서 점점 젊어져 가게 되는데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상대성이론에서도 반대방향의 시간경과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시간의 다차원성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는 시간은 공간의 경우와 달라 모든 사람이 보조를 맞춰 한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특수성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시간과 공간은 동등한가?
그래서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미래에 걸쳐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한차원이므로 이것을 4번째 차원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세는 4차원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밀한 측정과 깊은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공간에서의 (x,y,z)의 3방향은 전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좌우와 상하는 상당히 다른 것 같지만 이것은 지구의 표면이라는 특수한 장소 탓일 뿐이다. 단지 지구의 중심방향을 향해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우연 때문인 것이다. 좌우와 상하를 놓고 우주공간에서는 북극성의 방위가 과거의 방향이고, 오리온 별자리쪽은 미래의 방향이다 등의 우열을 생각할 이유는전혀 없다.
그런데 공간의 이러한 성질에 비하면 시간은 아주 다르다. 이론상 우리는 공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자기 의사로 대전이나 제주도에 가는 것이 가능하다. 하와이나 파리라도 좋다. 심지에는 달에 가는 일도 가능해졌고 더욱 기술만 발달하면 화성이나 금성에도 갈 수 있다. 또는 지구를 꿰뚫고 그 속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생물의 수명을 무시하면 훨씬 먼 항성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 쪽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날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과거를 그리워해도 어쩔 수 없다. 거꾸로 단번에 미래로 달리려고 해도 절대불가능하다. 기껏 타임머신 따위 기계를 상상하여 위안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시간축에 따라 자유로이 달리는 기차가 발명될 것 같지는 않다.
이것만으로도 공간과 시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입증된다. 인간의 의지로 지배할 수있는 공간과 전혀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뿐만아니라 공간에 대해서는 각자가 각각 다른 장소를 치지하고 있다. 지구와 해와 남십자성과는 차지하는 공간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시간쪽은 항상 동일시각에 있다. 필자의 현재는 독자의 현재이며, 독자의 어제는 필자에게도 어제이다. 시간에 관한한 빈부의 차별도 없고 아주 공평하다. 부자가 시간을 사서 크게 차지한 결과 가난한 사람은 시간적 단칸방에서 답답하게 지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은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즉 공간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있으나 아무리 거인이라 할지라도 시간축 상에서는 항상 현재라는 한 점만을 소유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공간과 시간이 비슷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고 시간을 4번째 차원으로 한다는 생각은 아주 억지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
낚시는
시간축으로 고기를 잡는 방법
역사학과 지리학의 차원
이야기가 다소 옆길로 벗어나지만 일상적인 사실로서 시간과 공간과의 대비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예를 들면 사회정세, 사회기구나 그 상태를 주로 시간축에 따라보는 것이 역사학이며, 공간축에 따라 조사하는 것이 지리학이라 할 수 있다.
시골 노인네들은 공간축에 대한 시야는 좋지만 시간축에 대해서는 아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거꾸로 세계 각국을 여행한 젊은이는 시간에 대해서 보다도 공간에 대해 아주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잇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또는 연애에 패배한 젊은이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가져라'고 격려하는 일이 있다. 넓은 시야란 공간에 대해 넓게, 즉 자기 외에도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고통을 더 객관적으로 보라는 뜻도 있으나 동시에 시간축에 대해 보다 높은 견지에서 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본다. 고기를 잡는데 트롤선으로 그물을 끄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공간이동에 의하여 고기를 잡는 경우이다. 이에 반해 낚시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경우는 시간축의 방향으로 잡는다는 의미가 된다.
장사꾼은 싼 곳에서 상품을 사서 비싼 곳에다 판다. 즉 상품을 공간적으로 이동시켜 이문을 얻는다. 그런데 시간축방향으로 이동시켜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증권같은 것이다. 요즘의 택시는 공간이동과 시간경과의 양쪽에 대하여 요금이 과해지고 있다.
지구는 지금 1989년이다. 그런데 1광년 떨어진 별을 망원경으로 보면 그곳의 달력은 1988년이다. 이리하여 공간에 깊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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