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쇼! 진품명품, 2부를 시작합니다. 2부에서는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국방을 튼튼히 하고, 신하를 엄하게 다루며, 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리려 했던 우리나라 임금님의 마음을 훔쳐 볼 수
있습니다. 임금님부터 한 마을의 어른까지,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그들이 썼던 방법을 수학으로 검증해 드립니다!
나라의 안정은 도량형의 통일에서!
2부 첫 번째 유물을 살펴볼까요? 탐관오리를 감시하고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썼던 물건이라는데요. 모양은 꼭 몽둥이처럼 생긴 사각기둥이군요! 도대체 이 물건은 어디에 쓰였을까요?
이 사각기둥은 유척입니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예요.임금님이 지방 백성들의 생활을 헤아리기 위해 특별히 암행어사를 임명해 지방으로 보냈을 때 암행어사에게 하사했던 물건입니다. 암행어사는 일반인으로 위장해 유척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지방 관아들의 *도량형이 정확한지를 검사했어요. 눈금을 늘인 자로 세금을 걷어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급급한 탐관오리를 잡아 내기 위해서지요. 이 놋쇠자는 그 때 썼던 표준자로 그 기준은 1자 1치예요. 한 자는 약 30.303cm이고 한 치는 약3.03cm죠. 사각기둥의 네 면에는 길이가 다양한 자가 새겨져 있어요. 1430년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통일하기 전까지 각 자의 기준이 각각 달랐습니다.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자의 길이가 통일될 수 있었어요.
암행어사의 유척에는 주척, 영조척, 예기척, 포백척 등이 있어요. 주척 한 자의 길이는 20.81cm였지요. 궁궐이나 관청을 짓는 데는 영조척이 쓰였는데, 한 자의 길이는 31.24cm로 목수들의 필수품이기도 했어요. 예기척은 임금님의 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각종 그릇이나 도구를 만드는 데 썼고, 한 자의 길이는 28.24cm였습니다. 옷감을 사고팔거나 만들 때는 한 자의 길이가 46.73cm인 포백척을 이용했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던 세종대왕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자, 이제 잠깐 쉬어가면서 우리나라 고유 단위를 살펴봅시다. 우리나라 고유의 단위로 길이에 푼·치 ·자 (척)라는 단위를 썼고, 넓이는 평, 질량은 돈·냥 , 부피는 홉·되 등을 썼습니다. 보시는 유물로 물체의 길이, 부피, 질량, 넓이를 쟀습니다.
나라의 안정은 도량형의 통일에서!
2부 첫 번째 유물을 살펴볼까요? 탐관오리를 감시하고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썼던 물건이라는데요. 모양은 꼭 몽둥이처럼 생긴 사각기둥이군요! 도대체 이 물건은 어디에 쓰였을까요?
이 사각기둥은 유척입니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예요.임금님이 지방 백성들의 생활을 헤아리기 위해 특별히 암행어사를 임명해 지방으로 보냈을 때 암행어사에게 하사했던 물건입니다. 암행어사는 일반인으로 위장해 유척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지방 관아들의 *도량형이 정확한지를 검사했어요. 눈금을 늘인 자로 세금을 걷어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급급한 탐관오리를 잡아 내기 위해서지요. 이 놋쇠자는 그 때 썼던 표준자로 그 기준은 1자 1치예요. 한 자는 약 30.303cm이고 한 치는 약3.03cm죠. 사각기둥의 네 면에는 길이가 다양한 자가 새겨져 있어요. 1430년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통일하기 전까지 각 자의 기준이 각각 달랐습니다.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자의 길이가 통일될 수 있었어요.
암행어사의 유척에는 주척, 영조척, 예기척, 포백척 등이 있어요. 주척 한 자의 길이는 20.81cm였지요. 궁궐이나 관청을 짓는 데는 영조척이 쓰였는데, 한 자의 길이는 31.24cm로 목수들의 필수품이기도 했어요. 예기척은 임금님의 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각종 그릇이나 도구를 만드는 데 썼고, 한 자의 길이는 28.24cm였습니다. 옷감을 사고팔거나 만들 때는 한 자의 길이가 46.73cm인 포백척을 이용했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던 세종대왕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자, 이제 잠깐 쉬어가면서 우리나라 고유 단위를 살펴봅시다. 우리나라 고유의 단위로 길이에 푼·치 ·자 (척)라는 단위를 썼고, 넓이는 평, 질량은 돈·냥 , 부피는 홉·되 등을 썼습니다. 보시는 유물로 물체의 길이, 부피, 질량, 넓이를 쟀습니다.
우리의
고유 단위
도량형의 기준은 황종관!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박연에게 명하여 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도량형을 통일했다. 음을 내는 악기로 길이, 부피, 무게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그 기준은 황종관이었는데, 당시 음정의 높낮이를 맞추기 위해 쓰던 12개의 음을 내는 관, 즉 율관 중 가장 긴 관이다. 황종관은 *기장알 90개를 이은 길이와 같았는데, 그 길이는 약 31cm다. 황종관에 물을 채워 무게의 기준을 정하고 기장알을 채워 부피의 기준도 정했다.
대동여지도는 완벽한 수학의 산물
“김정호 선생의 무용담은 거짓이다! 그 험한 백두산을 혼자서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해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대동여지도가 너무 상세해 국가의 기밀이 새나갈 것을 염려한 대원군이 김정호를 옥에 가뒀다고? 김정호 선생은 옥사하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고? 수학쇼! 진품명품에서 이걸 사실대로 밝혀 주시오!”
저희 앞으로 이런 편지 한 장이 도착했는데요. 아! 꽤 심각한 내용입니다. 편지 내용처럼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과 끈기는 모두 거짓일까요?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축척이
다른 두 지역을 하나의 축적으로 합칠 때 위와 같이 확대·축소법을 썼다. 가로, 세로로 2배씩 늘리면 면적은 4배가 된다.
일단 목판으로 된 대동여지도가 발견되면서 모두 빼앗겨 불에 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김정호 선생이 옥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사실 무근이죠. 편지에서 독자가 의심한 내용의 일부는 일제 감정기의 교과서였던 조선어 독본에 나온 내용입니다. 대원군을 우매한 지배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일본의 의도적인 왜곡이었죠.
김정호 선생이 전국을 누비며 지도를 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수학을 이용하면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도 지도를 만들 수 있어요. 군사 고위 관료였던 신헌은 김정호 선생에게 기밀에 해당하는 지리정보와 지도 등 전국의 지리정보를 줬습니다. 대동여지도를 군사목적으로 활용할 셈이었지요. 이를 이용해 김정호 선생이 대동여지도를 만든 과정은 매우 정밀했습니다. 조각난 지리 정보와 지도를 하나로 묶기 위해 비례를 이용해 서로 다른 지도의 축척을 통일시켰어요. 이 작업에서 같은 비율로 지도를 축소 또는 확대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이용됐습니다.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기 위해서는 전국 주요 지점의 경도와 위도를 작성한 표를 참고했을 겁니다. 국토의 정보를 담은 김정호 선생의 지리 백과사전에 이 표가 있지요. 이렇게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오늘날 인공위성이 찍어 보낸 우리나라의 지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대동여지도의 도로와 물길에서도 수학적인 측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목판 위에 지도를 그려야 했던 김정호 선생은 물길과 도로를 색깔로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표시했어요. 실제 거리를 반영하기 위해 도로의 경우 10리마다 점을 찍었죠.
대동여지도 첫머리에 김정호 선생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사용하고자 한다”고 그의 바람을 적었습니다. 비록 일반 서민들의 손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김정호 선생은 국토 정보를 모아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시도했던 게 분명합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관찰과 경험, 끈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확한 이론에 근거해 만들어 낸 아주 치밀한 수학적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10리마다 점을 찍었다. 평탄한 길은 점 사이 간격을 길게, 구부러지거나 경사진 길일 때는 짧게
찍었다.
과학기술 발전의 일등 공신은 도량형
수학쇼! 진품명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너 속의 코너! ‘감정단, 어디든지 간다!’입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옛날에는 날씨를 예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한 해 농사의 성공과 실패가 날씨에 달렸으니까요. 옛날에는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도량형을 이용한 관측기구를 통해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단면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유물 감정단이 찾은 곳은 기상청입니다. 기상청엔 웬일이냐고요? 이곳에 비가 오는 양을 쟀던 기구인 측우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세종실록1442년 5월 8일 기록에서 처음 ‘측우기’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철로 만든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잴 수 있는 장치’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측우기는 그보다 1년 전에 만들었습니다. 측우기를 장영실 선생이 발명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처음 측우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발명에 참여했습니다. 문종은 비가 온 양을 젖은 땅의 길이로 쟀던 기존의 방법이 매우 불명확하다고 느꼈어요. 토양의 성질에 따라 비가 많이 스며들기도 적게 스며들기도 했거든요. 문종은 구리 그릇을 만들어 그 그릇에 고인 물의 높이로 비가 온 양을 재자고 제안했습니다.
측우기에 사용했던 자는 측우기를 만들고 1년 뒤, 세종실록에 측우기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알려졌어요. 그 길이를 1자 5치, 지름 7치로 한다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이 때 길이의 기준은 1자의 길이가 20.81cm였던 주척이었습니다.
비가 온 양을 재는 방법도 문서로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나 비의 양을 잴 때는 자· 치 · 푼까지 정확하게 재고 있는데 지금 단위로 약 3mm 단위까지 측정했어요. 이렇게 잰 자료를 각 지방에서 기록하고 중앙에 보고했죠. 덕분에 중앙에서는 각 지방의 비 피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측우기는 이렇게 사용했다.
➊비가 그쳤을 때 재며, 자는 주척을 쓴다.
➋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갠 날짜와 시간을 기록한다.
➌비가 온 양의 높이는 자· 치· 푼까지 정확히 잰다.
재산의 공동관리에서 발달한 회계 셈법
여기는 서울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입니다. 우리은행의 역사는 1896년 나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천일은행에서 시작되지요. 천일은행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6년 동안 우리나라가 최초로 발명한 회계장부 기록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 방법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책은 ‘정일기’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쓰는 용돈기입장과 같아요. 일정한 기간 동안 쓸 돈을 정해 놓고 들어온 돈과 나간 돈을 기입한 거죠. 정일기에는 날짜별로 지출과 수입을 정리했는데 돈이 들어올 때는 상(上), 돈이 나갈 때는 하(下)로 표시했습니다.
수입은 올리고, 지출은 내려 적는 톱니바퀴식 기록 방법은 고려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개성은 그 당시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아라비아나 인도 등 세계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죠.
개성의 상인들은 들어오는 돈, 나가는 돈과 함께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알아 내는 네 개의 거래 요소를 맞물려 쓰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를 사개송도치부법이라고 합니다. 이미 11, 12세기에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는 셈법이 발달한 것이죠.
이 회계 셈법은 조선시대 남평 문씨의 계모임 장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지금도 열리는 계모임은 300년 동안 공동재산의 엄격한 관리를 통해 이어져 올 수 있었어요. 이 계모임은 조선이 믿음을 바탕으로 한 투명한 사회였다는 것도 알려 줍니다.
1781년
봄 벼장부^전남 장암리 계모임 장부를 가로쓰기로 정리했다. 장부에다 계모임에 들고 나간 모든 돈(벼)을 기록했다. 내를 중심으로 양변의 합, 즉
1년 동안 들어오고 나간 벼의 합이 같다. 양변의 합계가 틀렸을 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우리 문화재에서 수학을 찾다보니 벌써 마칠 때가 됐네요. 새해특집으로 진행된 이번 쇼에서는 우리 옛 안식처, 한옥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까지 수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조상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했는지 깨달으셨겠죠. 다음에는 더욱 새롭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시청자 참여도 잊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특별 대담 국오현의 한국 수학사
새해를 맞아 특별히 준비한 국오현의 ‘한국 수학사’ 시간입니다. 국오현 씨, 수학의 역사에 앞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서양 수학사에 대해서는 배우는데 인도 수학사를 제외하면 동양 수학사에 대해선 배우지 않습니다. 서양에 비해 동양이 수학을 비롯한 과학 발전이 늦었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실제로도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수학은 서양의 수학만큼이나 발달했습니다. ‘구장산술’, ‘구수략’, ‘산학정의’와 같은 수학책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산학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시험에 합격해야 산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공인 수학자제도가 있었던 것이죠.”
그렇군요. 수학이라고 하면 수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우리 조상들은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숫자를 사용했나요? 숫자 없이 수학이 발달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수를 일컫는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했습니다. 다만 숫자를 표현할 문자가 문제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아라비아 숫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중국의 한자를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양반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서민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서 수를 나타냈습니다. 대나무 조각을 이용해서 곡물의 양을 표시한 죽산, 매듭 사이에 나뭇가지와 짙은 색 헝겊을 이용해 수를 표시한 결승문자가 그것이지요. 양반들도 어려운 한자 대신 산가지를 이용해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과 나눗셈, 방정식까지 계산했습니다.”
어려운 한자보다는 간단하고 알아보기 쉽게 수를 표시해 수 계산이 편리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아라비아 숫자는 언제부터 사용한 건가요?
“1653년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선교사와 함께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그 때 처음 아라비아 숫자를 접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모릅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42년 김대건 신부가 쓴 편지에 날짜를 아라비아 숫자로 적고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를 적은 최초의 공식적인 문서는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체결할 때 영어로 작성한 조미수호통상조약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군요. 앞서 이야기했던 수학책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수학 수준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음, 원주율을 뜻하는 π를 아시죠? π의 값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수많은 수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했는데요. 우리나라의 수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말 대표적인 수학자 남병길은 저서인 ‘산학정의(1857)’에서 원의 넓이를 셈하면서 π를 3.1415926535로 계산했습니다. 이 값은 현대의 값과 거의 같지요.”
“또한 남병길이 쓴 ‘구장술해’에는 원의 넓이를 직사각형으로 바꿔 구한 방법이 있습니다. 원을 삼각형 무한개의 합으로 생각해 넓이를 구했는데, 이것은 현대의 무한급수 개념과 같습니다. 무한급수란 무한히 많은 수를 합하는 겁니다. 이 외에도 많은 수학책에는 세금계산이나 일식과 월식을 알아 내기 위한 비례문제와 방정식, 토지측정과 토목공사를 위한 도형의 넓이와 부피 문제 등 실생활에 관한 수학문제가 기록돼 있습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수학이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의
넓이 구하는 방법
원 2개를 동일한 크기로 12조각 낸 뒤 그림과 같이 사각형 모양으로 잘라 붙인다. 만들어진 사각형의 넓이에 $\frac{1}{2}$을 하면 원의 넓이가 나온다. 이 방법으로 원의 넓이를 구하면 실제값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원을 무한히 조각 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넓이를 구하면 실제 원의 넓이에 가까워 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 수학사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해 주신 국오현 씨 감사드립니다. 서양 수학만큼이나 한국의 전통 수학 역시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군요. 여러분도 우리의 전통 수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수학에 흥미를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도량형 : 길이를 뜻하는 도, 부피를 재는 양, 무게를 다는 형을 합친 말로 길이, 부피, 무게 등을 재는 도구, 단위, 방법을 말합니다.
*기장 : 조와 크기가 비슷한 곡식으로 떡과 밥 등을 만들 때 쓴다.
수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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