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1일 목요일

'불성무물'(不誠無物)과 '다른 일은 다른 사람이' '청백리' 대법관과 '채소 가게' 부인

이번주(2/19) 방영된 SBS 시사제작 프로그램 현장 21의 '2013 대한민국 재상 스토리' 주인공인 김능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부부에게는 개인적으로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말 없이 묵묵하게 살고 싶으셨는데, 제가 그 평온을 깬 꼴이 됐으니 말입니다.

먼저 김능환 위원장 프로필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1951년 충북 진천생, 경기고-서울대 법학과 출신입니다. 사법시험 17회 출신인데, 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법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하네요. 법관 경력을 보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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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주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서울가정법원, 서울지방법원 부장 판사를 거쳤습니다. 2000년도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재직 시절에 저도 당시 법원 출입기자였기 때문에 김 위원장을 뵌 적이 있었는데, 김 위원장은 기억을 못하시더라고요. 김 위원장은 2006년에 법관 최고 영예인 대법관으로 임명됐고, 2011년부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관례상 현직 대법관 중에서 선출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대법관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엔 총선은 물론 대선까지 있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은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도(2012년 7월) 계속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시쳇말로 스펙 정말 화려하죠.

개인적인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워낙 잘 나가는(?) 법관인데다 국가 5부 요인이기 때문에 저는 선관위 출입 기자를 할 때도 김 위원장 개인을 특별히 취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고요. 하지만 우연히 법률전문지를 통해 김 위원장 사모님이 채소 가게를 운영한다더라는 기사를 접하고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시점에 본인 스스로 공개 거절한 이유를 듣고, 김 위원장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분일까?' 새삼 궁금증이 마구 생겨났던 거죠.
 
김 위원장 인터뷰 과정은 예상대로 녹록지 않았습니다. 중앙선관위측에 여러 차례 김 위원장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중앙선관위에 찾아가 위원장을 만나게만 해달라고 매달려 겨우 김 위원장을 대면했지만 역시나 보기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저는 김 위원장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약없는 뻗치기가 시작된 겁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나요? 아파트 현관에 60대 어르신이 한밤에 산책을 나오더군요. 목에는 두꺼운 하얀색 워머를 두르고, 옷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요. 사실 처음엔 누군가 했습니다. 근데 김 위원장이더군요. 저도 놀랐고 김 위원장도 저를 보고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만난 김 위원장을 졸졸 따라붙었습니다. 어둠 캄캄한 밤에 조명도 없어 인터뷰를 요청할 장소도 없었고요. 그냥 따라다녔습니다.

김 위원장이 편의점에서 두유를 사줬습니다. 김 위원장과 저, 그리고 저랑 함께 한 VJ..두유 3병..3600원인가를 편의점 매대에서 계산을 하시더군요. 전혀 어색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두유 한병씩 손에 들고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던 김 위원장은 저에게 자꾸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마지막 기회다 싶어 김 위원장을 아파트 단지안 수은등 아래로 유도해(조명으로 쓸 생각으로)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밀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김 위원장과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방송 인터뷰는 이렇게 불과 10분 정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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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과의 짧은 인터뷰 가운데 가장 머리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중용에 나오는 말인 '불성무물'(不誠無物)과 '다른 일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불성무물은 김 위원장의 33년간 공직 생활의 좌우명이라고 합니다. 성심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공직생활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어떤 일에도 적용되는 말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불성무물보다 더 인상적인 말은 '다른 일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대법관이나 중앙선관위원장을 마쳤으면 소임을 다했으니, 다른 일은 다른 사람이 맡아야 변화를 통해 사회나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자제할 줄 알면서도, 세상엔 나보다 더 훌륭한 인재들이 얼마든지 더 있다는 양보의 마음도 엿볼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로 살아온 사람에게서 기대하기 쉽지 않은 인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부인 김문경씨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채소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것은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채소가게 앞 빈 박스를 팔을 걷어부치고 스스로 정리하는 모습이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사실 물건사러 온 사람이 아니라 촬영하는 모습이 신기해 그냥 들른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물건을 소개하는 모습은 여느 이웃 가게 아주머니 모습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장사가 초짜라 그런 지 영업 실적이 좋지 않다는 것일 겁니다. 이런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대법관 사모님..여러분은 상상이나 해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전 상상 못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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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김문경씨는 시종일관 너무나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방송 화면에도 그대로 나타났지만 밝은 목소리에 소탈한 웃음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방송에 나가는 게 적절치 않다고 했지만, 도저히 이런 모습을 저만 알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김문경 사모님께 큰 결례를 저질렀다는 사과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두 부부의 모습이 SBS 8뉴스와 현장21에 잇따라 보도된 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인적인 희열과 뿌듯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지만 두 부부의 삶을 오해하는 댓글을 볼 때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프고 두 분께 다시 한번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설마 두 분이 생계가 어려워 채소 가게를 열었겠습니까?

제가 가까이서 본 김능환 위원장은 올바른 처신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국무총리직을 마다한 것도 사법부 최고직을 지낸 사람이 행정부에서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고민에서 내린 결단입니다. 막대한 고액이 보장되는 대형 로펌행을 거절한 것도 대법관 출신이 후배 판사들에게 로비를 하고, 부탁을 하는 게 옳은가라는 고민에서 시작한 겁니다. 자신의 퇴직금으로 부인의 채소 가게를 열게 해 준 것도 평생을 함께 한 부인에게 노년의 편안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에서 내린 결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 김문경씨는 그런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이해심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인들 노년에 채소 가게를 하고 싶겠습니까? 채소 가게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활 전선에 나서야 하는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특히나 대법관 사모님이 채소 가게를 운영하겠다고 마음 먹었을때는 보통 결심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겠죠. 그런데도 김문경씨는 이런 평범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 듯 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선 유례가 없는 일인 건 분명해보입니다. 

어쩌면 두 부부의 평범하지만, 저에게는 결코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일상에서 제 스스로를 돌이켜 봤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올바른 처신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생각입니다. 감동을 받았다는 후배들의 문자도 몇 개 받았습니다. 아마 그들도 저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듯 합니다. 제작을 마친 지금 저는 수십년간의 공직 생활을 불성무물의 자세로 임해온 고위 공직자가 우리 사회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고, 동시에 그런 공직자를 지금껏 찾지 못했고, 찾으려 하지 않았던 기자 생활이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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