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4일 목요일

저커버그·잡스·게이츠 부모의 특별한 교육법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IT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온 천재들로 높이 평가된다. 이들은 천재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천재로 길러진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들 같은 천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정답은 부모에게 있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이들 세 사람은 IT로 세상을 바꿔놓은 천재들이다. 2011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3총사를 내놓아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꿨다. 20여 년 전 개인용 컴퓨터 ‘애플’로 세상을 뒤흔들기도 했다. 신제품을 소개할 때는 검은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마법 같은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 그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인물이었다. 스티브 잡스와 동갑인 빌 게이츠는 컴퓨터업계에 잡스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게이츠가 만든 ‘윈도’와 ‘오피스’ 프로그램이 없으면 사람들은 컴퓨터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컴퓨터를 켤 수조차 없다. 마크 저커버그는 아직 20대다. 나이는 어리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그가 이룬 성과는 앞의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단하다.

IT 천재들이 태어나 자신의 회사를 창업하기까지를 살펴보면 여러 공통점이 발견된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도사급의 실력을 자랑했으나 인간관계는 서툴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다.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졸업장을 받지 않고 중도에 자퇴한 것도 세 사람이 똑같다. 무엇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훌륭한 부모가 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정 형편은 제각각 다르지만 부모들은 자녀를 무척 사랑했을 뿐 아니라 자녀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내고 남다르게 교육했다. 부모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교육이 없었더라면, 이 천재들도 그저 평범한 사람에 그쳤을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들 부모들의 교육법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꽤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가 총액 122조 원 회사의 20대 CEO 
마크 저커버그 

profile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최고 경영자. 갈색 곱슬머리에 매부리코, 헐렁한 후드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채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젊은이.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인물이다.



“그거 정말 재미있겠다. 네 생각대로 멋지게 한번 해보렴.”
하버드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학교를 중퇴하고 벤처기업을 창업한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컴퓨터와 IT에 높은 관심과 뛰어난 집중력을 보이는 것을 보고 컴퓨터 천재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저커버그의 부모. 아버지 에드워드는 치과 의사, 어머니 카렌은 정신과 의사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 학교 수업과 별도로 개인교사를 붙여주기도 했고, 중학생이던 저커버그를 대학원 수업에 데려가 청강을 시키기도 했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교육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열정을 지지해주세요. 그 어떤 것보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조언한다.
아이의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는 부모 부모들은 늘 질문공세에 시달린다. 그럴 때 저커버그의 부모는 절대 귀찮아하지 않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이긴 해도 자녀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다. 자신들도 잘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가능한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대답해줬다. 전문가를 데리고 와서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 저커버그에게는 부모가 가장 훌륭한 백과사전이자 멘토였다. 아버지 에드워드가 아들의 컴퓨터 실력 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면, 어머니 카렌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길러주는 일에 힘썼다. 그녀는 기술과 인문학에 두루 통달한 융합형 인재가 중요해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커버그에게 역사, 문학, 예술, 논리학 등 폭넓은 분야의 책을 읽도록 지도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부터 로마사,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음악, 동서고금의 시와 소설 등을 틈나는 대로 읽게 했다. 저커버그가 지금도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의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를 줄줄 외울 수 있는 데는 어머니의 조기 교육이 큰 도움이 됐다.
몸에 밴 검소한 삶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청년 재벌이지만 저커버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다. 그는 여전히 1천만 원짜리 고물 중고차를 타고 다니고, 자신을 꾸미는 일에는 관심도 없다. 알려진 대로 늘 티셔츠에 슬리퍼 차림이다. 이런 그의 생활태도는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다. 저커버그는 고교 시절 대학 입시 준비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부모는 어느 정도의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서 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중요한 일에는 큰돈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저커버그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에 거액을 선뜻 기부할 수 있는 것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덕분이다.

대학 진학을 앞둔 시점, 저커버그는 명문 사립고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로 전학을 간다. 링컨 대통령의 아들도 다녔을 정도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학교. 교육 여건이 좋은 만큼 학비 또한 무척 비쌌지만, 저커버그의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둘 다 의사여서 부유한 편에 속한다 하더라도 자녀가 네 명이나 됐기 때문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명문대 진학이 라는 목표가 아닌, 아들이 각지에서 모여든 우수한 학생들과 경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 판단은 정확했고, 옳았다.

IT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버린 창의성의 귀재
스티브 잡스

profile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한 ‘애플’을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성장시킨 스티브 잡스. 강력한 카리스마, 편집광적인 열정, 완벽주의, 화려한 쇼맨십, 마법 같은 프레젠테이션, 창조경영의 아이콘 등은 잡스를 상징하는 단어다.



부모님은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이 훌륭한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잡스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자신을 키운 양부모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아내, 자녀 등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어린 시절 헤어진 여동생을 찾아 못다 한 우애를 나누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가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폴과 클라라 부부는 아들 잡스가 자신들보다 그리고 일반적인 또래들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이를 알고는 자식을 특별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 클라라는 잡스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미취학 아동이 알파벳을 깨우치는 게 흔하지 않았던 시절인데, 책 읽는 법을 어머니가 먼저 가르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지는 못했지만, 삶에서 모범을 보였다. 잡스는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을 키우느라 헌신한 양부모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는 “폴과 클라라는 1,000% 내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완벽주의 잡스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에 집 안팎을 꾸미는 일은 물론이고 가구까지 직접 만들어 써야 했다. 아버지 폴은 뭐든지 척척 만들어낼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훌륭한 손재주 못지않게 아버지의 성실한 자세는 잡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폴은 아들 잡스와 함께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어린 잡스의 생각에 금방 끝날 것 같던 작업도 한참 동안이나 계속됐다. 아버지는 남에게 보이는 앞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숨겨져서 잘 안 보이는 뒤쪽도 잘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아버지의 꼼꼼하고 치밀한 자세는 훗날 잡스의 완벽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 폴이 울타리 뒷면은 잘 안 보이니까 대충해도 된다고 말했다면, 잡스가 만든 제품들도 줄줄이 불량품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또래보다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난 잡스는 1년 월반을 해서 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중학교는 교육환경이 좋지 않았다. 수시로 패싸움이 일어났고, 어린 나이에 마약을 하거나 성폭행 사건으로 경찰에 잡혀가는 학생도 있었다. 같은 반 학생들은 한 살 어린 잡스를 괴롭히고 따돌렸다.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잡스의 부모는 아이의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실리콘밸리에서 교육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다. 주변이 안정되자 잡스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따뜻하지만 엄했던 부모
청소년기 잡스는 반항심이 컸다. 입양아라는 사실과 관련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고민을 많이 했고, 마리화나를 피우는 등 엇나간 행동도 많이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환각제 복용으로 몸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자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폴은 이 시기에 아들을 엄하게 대했다. 훗날 잡스는 마리화나 때문에 아버지에게 꾸중 들은 날, 아버지가 그처럼 화내신 적은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실리콘밸리의 게임회사에 다니던 잡스는 2년 뒤인 1976년 아버지의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한다. 당시 잡스는 아버지에게 컴퓨터회사 설립 계획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부모는 10대 후반부터 여기저기 방황하던 아들이 마음을 잡고 사업에 의욕을 보이자,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이 덕분에 잡스는 고교 선배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자신의 집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동차로 부품상자 나르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이들이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하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잡스가 어떤 일을 하든 그의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로 아들을 격려했다.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IT 천재
빌 게이츠

profile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소프트웨어를 첨단산업으로 발전시킨 인물. 컴퓨터를 사면 소프트웨어를 끼워주는 것이 상식처럼 통하던 시기에, 소프트웨어도 돈을 받고 팔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 2008년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명예롭게 은퇴했으며, 지금은 부인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대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이끌며 자선활동에 힘쓰고 있다. “죽기 전에 내가 번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그의 선언은 실제로 지켜지고 있다.



빌 게이츠의 정식 이름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었다. 이들 부부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명인사였다. 아버지 게이츠는 변호사 업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워싱턴주 변호사협회장까지 맡으며 성공을 거뒀다. 어머니 메리는 자녀들이 태어나자 교사 일을 그만두고 시애틀 지역에서 자선활동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역사박물관에서 방문객에게 유물 해설을 하는 동안 빌 게이츠는 맨 앞자리에 앉아 설명을 같이 들었다고 한다.

지인들의 성공담을 듣던 식사시간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매주 일요일 저녁. 게이츠의 부모는 저녁식사에 지인들을 자주 초대해 자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대개 시장, 주의회 의원 같은 정치가, 저명한 학자, 의사, 고위 공무원, 기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게이츠에게 자신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려움을 딛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결을 들려줬다. 어린 게이츠는 초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성공과 도전정신에 대해 직감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게이츠 가족은 종종 시애틀 근교로 캠핑이나 하이킹을 떠나 가족애를 다졌다. 대표적인 것은 시애틀 외곽 치리오에서 가진 여름 캠프. 게이츠가 네 살 되던 해부터 매년 7월이면 자동차에 짐을 싣고 2주간의 치리오 탐험을 떠났다. 친지와 지인 등 열 가족 정도가 탐험에 동참했는데 대부분 변호사, 기업가, 정치인 등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이 캠프에서는 치리오 올림픽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게이츠는 팀을 움직이는 게임을 하면서 팀의 리더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

학창 시절 게이츠는 오직 컴퓨터 외의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심각했다. 부모는 게이츠에게 1년 동안 컴퓨터 사용을 금지시켰고, 게이츠는 이를 완벽하게 따랐다. 심각한 상태였던 아들이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을 보고 부모는 안도했다. 이 기간 동안 게이츠는 컴퓨터가 아닌 과학, 인문, 역사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더 이상 컴퓨터에만 빠져 사는 괴짜가 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성공의 발판, 아버지에게 배운 계약법
게이츠가 ‘사업계약서 내용을 제일 잘 이해하는 최고 경영자’라는 평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는 중요한 사업을 계약할 때는 계약서 문구를 꼼꼼히 검토하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될 때 서명해야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1980년 최고의 IT 기업이었던 IBM과 맺은 컴퓨터 운영체제 판매계약이 대표적인 예다.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막대한 부를 안겨준 최고의 계약이었고, IBM 경영진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한, ‘IT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계약’으로 통한다.

2008년 회사 업무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 게이츠는 자신이 IT 업계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 남은 인생은 자선사업에 매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선사업은 게이츠 집안의 오랜 전통이다. 은행장이었던 외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어머니까지 모두 자선사업에 큰 관심을 쏟았다. 어머니는 남편이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자 교직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모금기관 중 하나인 유나이티드웨이의 시애틀 지부에서 활동했다. 아버지는 공립학교의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데 힘썼고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게이츠는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세웠다. 이 재단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기금을 운영하는 자선재단이다.
여성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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