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쇼팽' 조성진, 내년 1월 카네기홀서 쇼팽 없는 프로그램 첫 연주
연주 없는 한달 주어진다면… 남극에 가고 싶어요, 빙하랑 펭귄 보러
1년에 100회 이상 연주한다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곧고 길었다. 조성진은 “같은 슬픔도 독일 음악에서는 ‘속으로 우는’ 느낌이고,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음악에선 직접적으로 펑펑 울고, 드뷔시 등 프랑스 음악은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르듯’ 외롭다”면서 “악보에 없는 여백을 메우려면 음악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년 1월 미국 카네기홀 독주회 프로그램에서는 처음으로 쇼팽을 빼고 슈베르트와 드뷔시, 무소르그스키로 채운다.
/김지호 기자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 1~2위는 오랫동안 확고부동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2015년에 이 철옹성이 깨졌다. 단숨에 선두로 치고 나온 선수는 쇼팽. 그해 가을 쇼팽 콩쿠르(5년마다 열린다)에서 스물한 살 한국 청년이 우승하면서부터다. 클래식과 담쌓은 사람들도 '유연하고 장중한' 그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궁금해 음반 매장으로 또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내년 1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쇼팽이 없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연주해요. 그동안 독주회 때마다 '쇼팽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쇼팽 콩쿠르 우승자니 당연하지만 쇼팽만 치는 피아니스트로 머물고 싶진 않았습니다. '쇼팽 없는 조성진'을 보여줄 날을 고대했는데, 고마운 일이지요."
피아니스트 조성진(24)에게 쇼팽은 영광이자 굴레였다. 마침내 '굿바이 쇼팽!'이다. 쇼팽에 의지하지 않고도 피아노 건반 88개로 무궁무진한 음악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게 됐으니까. 벌린 손가락을 맞댄 채 정갈하게 앉아 있던 그는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다"며 방긋 웃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난 29일 저녁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 "칭찬보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라고 조성진은 말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에게 감히 훈수를 둔다고? "배우는 건 끝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야 피아니스트로서는 시작 단계죠. 지금도 개인 레슨을 받아요. 마흔 살까지는 그래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옆에서 전문적으로 들어주고 코치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언어는 연주라고 누가 말했나. 조성진은 생각을 차분하게 또박또박 옮길 줄도 알았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남겼다는 명언(?)이 떠올랐다.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
"연주 영상은 안 봐요, 오글거려서"
여섯 살에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도'가 어떤 음인지 처음 배웠다. 그는 외동아들이었고 '외롭지 말라'며 부모가 악기를 붙여준 것이다. 학원장은 6개월 만에 이 꼬마의 재능을 알아챘다.
―비 때문에 퇴근길이 엉망이 됐네요. 클래식 라디오 PD라면 어떤 곡으로 위로하고 싶은지요.
"흐린 날씨는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은 별로예요. 좀 강렬한 곡? 처진 기분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일으키고 싶네요."
―운전면허는 있나요?
"재작년 겨울에 한국에서 땄어요. 차는 없는 '장롱 면허'지요. 운전해보고 싶긴 해요. 1년에 집에 있는 시간은 3개월 정도고 나머지 9개월은 연주 여행을 다녀요. 2021년까지는 일정이 거의 다 찼어요. 서른쯤 되어 (조성진이 덜 바빠도 되는) 여유가 생기면 차를 몰 수 있겠지요."
―해보고 싶은 게 또 있습니까.
"몇 년 전까진 되게 많았어요. 제가 와인을 좋아해요.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고 싶었죠. 지금은 음악 하나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바이올린을 다시 해본다거나 작곡은 자신이 없으니 지휘를 배운다거나. 시간이 생기면요."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파리에 살다 1년 전 독일 베를린으로 이사했는데.
"여행을 하기에는 파리가 나아요. 살기엔 베를린이 더 편하고요. 유럽 다른 나라 수도에 비해 한적해요. 집에선 요즘도 하루 4시간 연습을 하고 저녁엔 친구를 만나거나 음악회에 가요. 파리에 살 땐 미술관 가서 모네의 '수련'도 눈에 담고 그랬는데 콩쿠르 우승한 뒤론 그런 여유를 잃어버렸어요. 그래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네요(웃음)."
―우승 직후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들었습니다만.
“매니지먼트사, 음반사를 비롯해 갑자기 중요한 결정을 너무 많이 해야 했으니까요. 계약서 분량만 30쪽이었어요. 도움이 필요해 변호사를 만나야 했습니다. 답장하기 벅찰 정도로 메일도 많이 쏟아져 들어왔고요. 적응하면서 이제 좀 안정이 된 것 같아요.”
―도이치 그라모폰(DG) 레이블과의 음반 계약, 카네기홀 데뷔, 베를린 필과의 협연 등 어릴 적 꿈을 다 이룬 셈인데 조성진 음악에도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잠시 생각하다) 평소에는 제 얼굴이 늙는 줄 모르는데 몇 년 전 사진을 보면 달라져 있잖아요. 음악도 그런 것 같아요. 일부러 바꾸려고 애쓰진 않았어요. 콩쿠르 우승 전과 비교하면 좀 더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음악에는 정답이 없어요. 이것저것 시도하며 다르게 해석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할 때 너무 확신에 차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지만, 무대에 올랐다면 의심을 거두고 자신 있게 쳐야죠.”
―고운 얼굴인데 연주할 땐 ‘인상파’더군요. 관객을 집중시키는 그 무아지경, 나중에 영상으로 보면 낯설지 않나요?
“배우가 울면 정작 관객은 못 운다고 하잖아요. 고치려고 노력 중이에요. 연주할 땐 생각을 안 해요. 무의식 속에서 합니다. 그러다 틀리면 정신이 돌아와요(웃음). 정신 잡고 치다가 또 무의식으로 들어가곤 하지요. 영상은 사실 안 봐요. 오글거려서. 유튜브를 켜놓지만 시선은 악보를 보면서 그냥 들어요.”
인생의 모토는 ‘생각을 하지 말자’
열 살 때 조성진이 처음으로 산 앨범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였다. 듣고 그 음악에 압도됐다고 한다. 평생 가장 기뻤던 날은 언제였을까. ‘2015년의 쇼팽’으로 호명된 날도 아니고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을 대신해 베를린 필과 협연한 날도 아니었다. “지메르만의 이메일을 받은 날”이라고 답했다.
―정확히 어느 날인가요.
“2015년 쇼팽 콩쿠르는 사흘간 열렸는데 저는 10명 중 첫 번째 연주자였어요. 첫날에 끝났으니 기분이 좋아서 같이 간 엄마랑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어요. 메일이 들어왔는데 발신자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인 겁니다. 제 연주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그 편지를 읽다가 감격해 눈물이 나왔어요. 우승할 때도 그랬고 저는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입니다.”
―스물한 살에 클래식계의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 또래 아이돌처럼 불안하진 않은지요.
“제가 아이돌 스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고요. 불안하지 않아요. 제가 받는 스트레스는 그들과는 다른 종류겠지요. 연주 끝나고 나서 ‘왜 이 부분을 더 잘 못했을까’ 후회하곤 해요. 연습을 더 하고 다음 연주 때 보완하죠. 나아진다고 느낄 때 재미가 있어요. 집에서는 잘 되는데 무대에선 안 풀릴 때가 많지만요.”
―집에서 실력이 100이라면 무대에선 80~90밖에 안 나오는 식인가요?
“가끔은 무대에서 200이 나오기도 해요. 올라가 봐야 아는 거죠. 피아노와 홀의 음향, 그날의 관객도 중요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연주 중에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면 집중이 깨지거든요.”
―무대에 오른 이상 중간에 삐끗하더라도 연주를 끝낼 책임이 있습니다. 실수할 경우 어떻게 위기를 넘기고 평정심을 되찾는지요.
“악보와 다른 음을 누르는 것은 별로 신경 안 쓰여요. 그런데 몸이 경직된다거나 해서, 음을 다 맞게 쳤는데 템포가 흔들리거나 음악이 안 나올 때가 있어요. 비상 상황이죠. 연주 경험을 쌓아 보니 정신을 다잡는 요령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연주 장면. 그는 “친구들 틈에선 나도 평범한 스물네 살”이라며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없을 만큼 바쁘지만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도 돼 행복하다”고 했다./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인생의 모토가 뭔가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자’입니다. 저 스스로 터득했어요.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입니다(웃음). 직관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위바위보를 할 때 상대방이 ‘주먹을 내겠다’고 말하면 내가 보를 내야 이기잖아요. 그런데 그가 역정보를 흘리고 불쑥 가위를 낸다면? 주먹을 내야 하나? 아니지, 거기까지 계산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지요. 저는 처음에 맞다 싶은 길로 가는 편이에요.”
―식당에서 메뉴 고를 때도 그렇게 합니까.
“아, 그건 다른 문제죠. 뭘 먹을지 정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조성진이 걸어온 길에 ‘실패’란 단어는 없어 보입니다만 피아노가 미워진 적도 있었나요?
“없어요. 솔직히 실패를 해본 것 같진 않아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실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콩쿠르 우승하기 전까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제 꿈은 콘서트 피아니스트(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사람)였고, 열아홉 살 때 ‘20대 후반까지 결실이 없으면 그만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뚜렷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아마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길로 갔을 것 같아요.”
마음을 쏟아붓고 숙성시키는 음악
무대 위에는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와 연주자가 있기 마련이다. 균형과 조화가 느껴진다. 삶은 전혀 다르다. 무질서하고 조율되지 않은 악기처럼 엉뚱한 소리를 내곤 하니까.
―조성진의 삶에도 그런 불협화음이 있었는지요.
“음, 인생을 논하기엔 저는 아직 스물네 살이기 때문에. 하하하. 마흔이 되어 돌아보면 지금 이 시기가 가장 무질서한 구간일 수도 있겠지요. 친구들도 다 음악가이고 제 삶에서 음악을 떼고 이야기할 순 없어요. 음악이 중심이죠.”
―연주를 더 잘하는 피아니스트를 볼 땐 어떤가요.
“좌절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이 힘들죠.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도 재밌어요.”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좋아한다고요?
“고정관념을 깨는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에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비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파이프를 그려놓곤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는 제목을 달기도 했지요. 저도 음악적으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깨고 싶어요.”
―동양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편견을 느끼는지.
“네. 표현을 덜 하기 때문에 샤이(shy)하다고들 하죠. 기술은 좋지만 음악성이 없다는 말도 있고요. 그런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음악성 없고 감정 없이 치는 서양 학생들 숱하게 봤어요.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골이나 와인, 된장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피아니스트로서 떫은맛은 없어지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고 있나요?
“이 직업은 여행이 잦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취미 생활을 못 해요. 손을 다치면 안 되고요. 맛있는 걸 먹으면 위로가 됩니다. 음악의 맛은 다 살아봐야 알 것 같아요. 베토벤이 초기라고 해서 얕거나 숙성이 안 된 음악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후기로 가면 초기 음악이 더 풋풋하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음악 선생님들이나 멘토들이 공통으로 해준 충고가 ‘기다려라. 서두르지 마라’였다면서요.
“‘기다리며 더 준비하라’는 뜻이었어요.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잖아요.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릴 필요는 없지요.”
―연주도 녹음도 없는 한 달이 주어진다면 뭘 할까.
“음, 남극 여행이요. 2014년에 한 이스라엘 할머니를 만났는데 남극에 가고 싶다며 사진을 보여주셨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둥둥 떠다니는 빙하, 펭귄, 하늘도요.”
10년 뒤쯤 도달하고픈 어떤 수준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허공을 한 번 응시했다. “‘조성진이 클래식 본고장 유럽에서 꽤 좋은 피아니스트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목표가 소박하다고 하자 그는 정색하며 덧붙였다. 절대 소박한 게 아니라고.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또 보고 싶어진다면 엄청난 일이라고. 그제야 이 청년이 대단해 보였다. 52개는 희고, 36개는 검은 건반 위에서 조성진은 천천히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연주 없는 한달 주어진다면… 남극에 가고 싶어요, 빙하랑 펭귄 보러
1년에 100회 이상 연주한다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곧고 길었다. 조성진은 “같은 슬픔도 독일 음악에서는 ‘속으로 우는’ 느낌이고,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음악에선 직접적으로 펑펑 울고, 드뷔시 등 프랑스 음악은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르듯’ 외롭다”면서 “악보에 없는 여백을 메우려면 음악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년 1월 미국 카네기홀 독주회 프로그램에서는 처음으로 쇼팽을 빼고 슈베르트와 드뷔시, 무소르그스키로 채운다.
/김지호 기자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 1~2위는 오랫동안 확고부동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2015년에 이 철옹성이 깨졌다. 단숨에 선두로 치고 나온 선수는 쇼팽. 그해 가을 쇼팽 콩쿠르(5년마다 열린다)에서 스물한 살 한국 청년이 우승하면서부터다. 클래식과 담쌓은 사람들도 '유연하고 장중한' 그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궁금해 음반 매장으로 또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내년 1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쇼팽이 없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연주해요. 그동안 독주회 때마다 '쇼팽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쇼팽 콩쿠르 우승자니 당연하지만 쇼팽만 치는 피아니스트로 머물고 싶진 않았습니다. '쇼팽 없는 조성진'을 보여줄 날을 고대했는데, 고마운 일이지요."
피아니스트 조성진(24)에게 쇼팽은 영광이자 굴레였다. 마침내 '굿바이 쇼팽!'이다. 쇼팽에 의지하지 않고도 피아노 건반 88개로 무궁무진한 음악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게 됐으니까. 벌린 손가락을 맞댄 채 정갈하게 앉아 있던 그는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다"며 방긋 웃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난 29일 저녁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 "칭찬보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라고 조성진은 말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에게 감히 훈수를 둔다고? "배우는 건 끝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야 피아니스트로서는 시작 단계죠. 지금도 개인 레슨을 받아요. 마흔 살까지는 그래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옆에서 전문적으로 들어주고 코치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언어는 연주라고 누가 말했나. 조성진은 생각을 차분하게 또박또박 옮길 줄도 알았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남겼다는 명언(?)이 떠올랐다.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
"연주 영상은 안 봐요, 오글거려서"
여섯 살에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도'가 어떤 음인지 처음 배웠다. 그는 외동아들이었고 '외롭지 말라'며 부모가 악기를 붙여준 것이다. 학원장은 6개월 만에 이 꼬마의 재능을 알아챘다.
―비 때문에 퇴근길이 엉망이 됐네요. 클래식 라디오 PD라면 어떤 곡으로 위로하고 싶은지요.
"흐린 날씨는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은 별로예요. 좀 강렬한 곡? 처진 기분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일으키고 싶네요."
―운전면허는 있나요?
"재작년 겨울에 한국에서 땄어요. 차는 없는 '장롱 면허'지요. 운전해보고 싶긴 해요. 1년에 집에 있는 시간은 3개월 정도고 나머지 9개월은 연주 여행을 다녀요. 2021년까지는 일정이 거의 다 찼어요. 서른쯤 되어 (조성진이 덜 바빠도 되는) 여유가 생기면 차를 몰 수 있겠지요."
―해보고 싶은 게 또 있습니까.
"몇 년 전까진 되게 많았어요. 제가 와인을 좋아해요.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고 싶었죠. 지금은 음악 하나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바이올린을 다시 해본다거나 작곡은 자신이 없으니 지휘를 배운다거나. 시간이 생기면요."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파리에 살다 1년 전 독일 베를린으로 이사했는데.
"여행을 하기에는 파리가 나아요. 살기엔 베를린이 더 편하고요. 유럽 다른 나라 수도에 비해 한적해요. 집에선 요즘도 하루 4시간 연습을 하고 저녁엔 친구를 만나거나 음악회에 가요. 파리에 살 땐 미술관 가서 모네의 '수련'도 눈에 담고 그랬는데 콩쿠르 우승한 뒤론 그런 여유를 잃어버렸어요. 그래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네요(웃음)."
―우승 직후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들었습니다만.
“매니지먼트사, 음반사를 비롯해 갑자기 중요한 결정을 너무 많이 해야 했으니까요. 계약서 분량만 30쪽이었어요. 도움이 필요해 변호사를 만나야 했습니다. 답장하기 벅찰 정도로 메일도 많이 쏟아져 들어왔고요. 적응하면서 이제 좀 안정이 된 것 같아요.”
―도이치 그라모폰(DG) 레이블과의 음반 계약, 카네기홀 데뷔, 베를린 필과의 협연 등 어릴 적 꿈을 다 이룬 셈인데 조성진 음악에도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잠시 생각하다) 평소에는 제 얼굴이 늙는 줄 모르는데 몇 년 전 사진을 보면 달라져 있잖아요. 음악도 그런 것 같아요. 일부러 바꾸려고 애쓰진 않았어요. 콩쿠르 우승 전과 비교하면 좀 더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음악에는 정답이 없어요. 이것저것 시도하며 다르게 해석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할 때 너무 확신에 차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지만, 무대에 올랐다면 의심을 거두고 자신 있게 쳐야죠.”
―고운 얼굴인데 연주할 땐 ‘인상파’더군요. 관객을 집중시키는 그 무아지경, 나중에 영상으로 보면 낯설지 않나요?
“배우가 울면 정작 관객은 못 운다고 하잖아요. 고치려고 노력 중이에요. 연주할 땐 생각을 안 해요. 무의식 속에서 합니다. 그러다 틀리면 정신이 돌아와요(웃음). 정신 잡고 치다가 또 무의식으로 들어가곤 하지요. 영상은 사실 안 봐요. 오글거려서. 유튜브를 켜놓지만 시선은 악보를 보면서 그냥 들어요.”
인생의 모토는 ‘생각을 하지 말자’
열 살 때 조성진이 처음으로 산 앨범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였다. 듣고 그 음악에 압도됐다고 한다. 평생 가장 기뻤던 날은 언제였을까. ‘2015년의 쇼팽’으로 호명된 날도 아니고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을 대신해 베를린 필과 협연한 날도 아니었다. “지메르만의 이메일을 받은 날”이라고 답했다.
―정확히 어느 날인가요.
“2015년 쇼팽 콩쿠르는 사흘간 열렸는데 저는 10명 중 첫 번째 연주자였어요. 첫날에 끝났으니 기분이 좋아서 같이 간 엄마랑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어요. 메일이 들어왔는데 발신자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인 겁니다. 제 연주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그 편지를 읽다가 감격해 눈물이 나왔어요. 우승할 때도 그랬고 저는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입니다.”
―스물한 살에 클래식계의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 또래 아이돌처럼 불안하진 않은지요.
“제가 아이돌 스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고요. 불안하지 않아요. 제가 받는 스트레스는 그들과는 다른 종류겠지요. 연주 끝나고 나서 ‘왜 이 부분을 더 잘 못했을까’ 후회하곤 해요. 연습을 더 하고 다음 연주 때 보완하죠. 나아진다고 느낄 때 재미가 있어요. 집에서는 잘 되는데 무대에선 안 풀릴 때가 많지만요.”
―집에서 실력이 100이라면 무대에선 80~90밖에 안 나오는 식인가요?
“가끔은 무대에서 200이 나오기도 해요. 올라가 봐야 아는 거죠. 피아노와 홀의 음향, 그날의 관객도 중요해요. 저도 사람인지라 연주 중에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면 집중이 깨지거든요.”
―무대에 오른 이상 중간에 삐끗하더라도 연주를 끝낼 책임이 있습니다. 실수할 경우 어떻게 위기를 넘기고 평정심을 되찾는지요.
“악보와 다른 음을 누르는 것은 별로 신경 안 쓰여요. 그런데 몸이 경직된다거나 해서, 음을 다 맞게 쳤는데 템포가 흔들리거나 음악이 안 나올 때가 있어요. 비상 상황이죠. 연주 경험을 쌓아 보니 정신을 다잡는 요령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연주 장면. 그는 “친구들 틈에선 나도 평범한 스물네 살”이라며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없을 만큼 바쁘지만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아도 돼 행복하다”고 했다./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인생의 모토가 뭔가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자’입니다. 저 스스로 터득했어요.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입니다(웃음). 직관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위바위보를 할 때 상대방이 ‘주먹을 내겠다’고 말하면 내가 보를 내야 이기잖아요. 그런데 그가 역정보를 흘리고 불쑥 가위를 낸다면? 주먹을 내야 하나? 아니지, 거기까지 계산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지요. 저는 처음에 맞다 싶은 길로 가는 편이에요.”
―식당에서 메뉴 고를 때도 그렇게 합니까.
“아, 그건 다른 문제죠. 뭘 먹을지 정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조성진이 걸어온 길에 ‘실패’란 단어는 없어 보입니다만 피아노가 미워진 적도 있었나요?
“없어요. 솔직히 실패를 해본 것 같진 않아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실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콩쿠르 우승하기 전까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제 꿈은 콘서트 피아니스트(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사람)였고, 열아홉 살 때 ‘20대 후반까지 결실이 없으면 그만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뚜렷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아마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길로 갔을 것 같아요.”
마음을 쏟아붓고 숙성시키는 음악
무대 위에는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와 연주자가 있기 마련이다. 균형과 조화가 느껴진다. 삶은 전혀 다르다. 무질서하고 조율되지 않은 악기처럼 엉뚱한 소리를 내곤 하니까.
―조성진의 삶에도 그런 불협화음이 있었는지요.
“음, 인생을 논하기엔 저는 아직 스물네 살이기 때문에. 하하하. 마흔이 되어 돌아보면 지금 이 시기가 가장 무질서한 구간일 수도 있겠지요. 친구들도 다 음악가이고 제 삶에서 음악을 떼고 이야기할 순 없어요. 음악이 중심이죠.”
―연주를 더 잘하는 피아니스트를 볼 땐 어떤가요.
“좌절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이 힘들죠.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도 재밌어요.”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좋아한다고요?
“고정관념을 깨는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에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비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파이프를 그려놓곤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는 제목을 달기도 했지요. 저도 음악적으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깨고 싶어요.”
―동양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편견을 느끼는지.
“네. 표현을 덜 하기 때문에 샤이(shy)하다고들 하죠. 기술은 좋지만 음악성이 없다는 말도 있고요. 그런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음악성 없고 감정 없이 치는 서양 학생들 숱하게 봤어요.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골이나 와인, 된장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피아니스트로서 떫은맛은 없어지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고 있나요?
“이 직업은 여행이 잦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취미 생활을 못 해요. 손을 다치면 안 되고요. 맛있는 걸 먹으면 위로가 됩니다. 음악의 맛은 다 살아봐야 알 것 같아요. 베토벤이 초기라고 해서 얕거나 숙성이 안 된 음악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후기로 가면 초기 음악이 더 풋풋하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음악 선생님들이나 멘토들이 공통으로 해준 충고가 ‘기다려라. 서두르지 마라’였다면서요.
“‘기다리며 더 준비하라’는 뜻이었어요.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잖아요.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릴 필요는 없지요.”
―연주도 녹음도 없는 한 달이 주어진다면 뭘 할까.
“음, 남극 여행이요. 2014년에 한 이스라엘 할머니를 만났는데 남극에 가고 싶다며 사진을 보여주셨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둥둥 떠다니는 빙하, 펭귄, 하늘도요.”
10년 뒤쯤 도달하고픈 어떤 수준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허공을 한 번 응시했다. “‘조성진이 클래식 본고장 유럽에서 꽤 좋은 피아니스트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목표가 소박하다고 하자 그는 정색하며 덧붙였다. 절대 소박한 게 아니라고.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또 보고 싶어진다면 엄청난 일이라고. 그제야 이 청년이 대단해 보였다. 52개는 희고, 36개는 검은 건반 위에서 조성진은 천천히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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