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종종 한국의 교육을 칭찬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요지의 말을 다시 꺼내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 앨봄이 그 발언에 정면으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앨봄은 자신이 본 한국의 학생들은 과도한 입시 경쟁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며,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말을 꺼내라고 반박했다.
한국의 치열한 입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까지 비화된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교육 문제가 어디 지금 우리만의 현상이겠는가. 실상, 시험이 사회적인 성공의 지름길로 통하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이같은 과열된 교육열이 나타나곤 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입시가 문제였던 반면, 19세기 영국에서는 졸업시험이 이런 현상을 낳았다는 차이가 있다. 케임브리지대의 졸업 시험, 수학 트라이포스(Mathematical Tripos)가 그 주범이었다.
심해지는 경쟁, 수학 트라이포스의 등장
수학 트라이포스가 도입되기 직전인 18세기 중반, 케임브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받으려는 학생들은 일종의 공개 토론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 시험은 라틴어, 철학, 신학, 논리학 등의 분야에서 제시된 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공개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주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토론에서 나타나는 정중함, 세련된 태도가 높은 평가를 받았고, 공개 석상에서의 자신감 있는 태도와 청중을 휘어잡는 설득력이 중요했다. 한마디로, 논리적이고 능수능란하게 말 잘하는 학생들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케임브리지 학생 수가 늘면서 시험을 치르는 학생의 수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자연히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응시생들의 우열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 평가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공정성에도 시시비비의 여지가 많았던 공개 토론 시험은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다수 응시생들의 우열을 가려낼 더욱 어려운 문제, 누가 봐도 시비 걸기 힘든 공정한 평가가 필요했다. 정량적 평가가 쉽고 문제의 난이도가 다양한 수학은 이 난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했다. 더욱이 18세기 중엽은 뉴턴이 만든 미적분학, 즉 유동률(fluxion)이 이제 막 학자들에게 완전히 소화 흡수되어 다양한 문제들에 응용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량적 평가의 필요성, 영국 사회에서 뉴턴이 지녔던 권위, 유동률 기법의 발전으로 인한 다수의 응용문제, 이러한 배경 덕분에 18세기 후반 이후 수학 트라이포스는 케임브리지의 새로운 졸업 시험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수학 트라이포스의 문제들은 산수, 대수, 기하학, 천문학, 역학, 광학, 수력학 등 당시 ‘응용수학(mixed mathematics)’에 해당하는 분야에서 출제되었다. 이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은 대학 마지막 해 1월에 적게는 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넘도록 끝도 없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다.
학생들이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질수록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케임브리지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토크스(Gabriel Stokes),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등의 최신 연구까지 고난이도 문제들이 시험에 출제되었다. 상위 1, 2등급에 해당하는 랭글러(wrangler)가 되려면 수학적인 지식 이외에도 어려운 문제들을 빠른 시간 안에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시험에 도전했을까? 장래에 과학자나 수학자가 되려는 사람? 놀랍게도 이 시험에 응시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수학자나 과학자가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남아 있는 상위 랭글러들의 목록을 보면 과학자로 유명해진 사람들도 있지만 정치인이 되거나 법조계로 나선 사람들도 상당수임을 알 수 있다. 수학 트라이포스의 귄위가 높아지자 랭글러 명단은 <더 타임스(The Times)>지에 까지 발표되었고, 그 중에서도 수석 랭글러는 약력이 실리기까지 했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경쟁도 그만큼 더 치열해졌다.
수학 트라이포스가 가져온 변화
수학 트라이포스의 도입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방식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학생들의 수학 공부에 종이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수학 문제 풀이에 종이를 쓰는 게 당연한 우리들에게 이 얘기는 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이 수학 공부에 종이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계산보다는 읽기가 수학의 주된 공부 방법으로 여겨졌고 졸업 시험 문제도 ‘뉴턴의 세 가지 자연 법칙은 진리인가?’처럼 구술시험에 적합한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여기에는 비싼 종이값도 한몫을 했다. 1810년 무렵 종이값은 절정에 달해 수학 문제풀이를 위해 그 비싼 종이를 마구마구 소모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학 트라이포스가 점점 어려워지고 1810~20년 사이에 고난도의 프랑스 해석학이 영국으로 도입되는, 소위 ‘해석학 혁명’을 거치면서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기억력과 웅변술에만 의존해서 수학을 공부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케임브리지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종이에 문제를 푸는 습관부터 익혀야 했다. 비싼 종이값에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연습장 구석의 1인치까지 꼭꼭 채웠던 신입생들도 고학년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수백 장의 종이를 수학 문제로 채워 나갔다.
수학 트라이포스로 인해 개인교사인 코치의 역할이 중요해지기도 했다. 주로 케임브리지 소속이던 이들 코치들은 부족한 급여에 보탤 목적으로 트라이포스 시험 준비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시작했다. 코치들은 예상 문제를 뽑아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데 필요한 팁을 알려주었다. 트라이포스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명강사로 이름이 난 코치를 골라 대학 2학년 때부터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중시되는 오늘날처럼 케임브리지에서도 이들 코치의 지도가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트라이포스의 양면
수학 트라이포스로 얻는 사회적 명성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시험을 보는 학생들의 중압감은 점점 더 커졌다. 엄청난 중압감을 이기기 위해 케임브리지 학생들은 조깅, 조정 등 운동경기에 과도할 정도로 몰두했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시험 당일 시험장에서 쓰러지는 학생도 있었고 시험 준비 중에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탈진하는 학생도 나왔다.
이처럼 학생들의 몸과 마음은 시험의 압박으로 피폐해져 간 반면, 트라이포스는 높은 수준의 수학으로 중무장한 영국의 뛰어난 물리학자들을 키워내는 데 일조했다. 상위 랭글러의 영예를 안았던 켈빈 경이나 스토크스, 맥스웰, J. J. 톰슨 등의 케임브리지 트라이포스 출신들은 19세기 물리학의 수학화를 이끌었다.
수학 트라이포스가 끼친 영향을 보면 우리의 치열한 입시 환경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바마와 앨봄은 각각 한국 교육의 서로 다른 양면을 본 것이 아닐까? 트라이포스의 사례로 본 것처럼, 시험은 교육이나 사회 모두에서 다양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환경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떤 방식으로 시험을 볼 것인가보다 시험으로 어떤 사람을 키워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ScienceTime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