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이후 남편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홀 부부의 특별한 조수가 되었던 김점동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는 로제타의 남편이던 제임스 홀의 갑작스런 사망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의 와중에 당시 평양에서 유행하던 발진티푸스에 걸려 제임스 홀이 세상을 떠나자 로제타는 미국으로 귀국해 버린다.
이때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로제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5년 2월 로제타의 친정이 있는 뉴욕 리버티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한 김점동은 고교 과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한 그해 9월부터는 병원에 취직해 생활비를 벌면서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미국으로 건너올 때 결심한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틈틈이 대학 입학을 위해 공부했던 김점동은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 6월 의과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그런데 김점동이 어려운 미국 유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박유산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유산이 함께 미국으로 떠난 것은 그 역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아내의 재능과 의지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곧 자신의 꿈을 접었다.
생활비와 아내의 학비를 대기 위해 박유산은 농장에서의 막노동과 험한 식당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아내의 졸업을 2개월 앞두고는 폐결핵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아직까지 볼티모어의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의사 되어 귀국해
남편의 장례를 치른 김점동은 드디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해 12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신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공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동안 박유산 씨는 세상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다 위로하겠는가만…(중략)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구한말 당시 한국인 중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사람은 매우 적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딴 서재필을 비롯해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과 안상호가 있었다. 또한 1899년에 세워진 의학교 졸업생 30여 명과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 7명이 전부였다.
그중 서재필과 김익남 두 사람만이 1900년 이전에 의학교를 졸업했으니, 김점동은 그들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의사였다.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소녀 시절 의료보조로 일했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던 로제타 홀 여사가 죽은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평양에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또한 평양의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에서도 진료했으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로제타 홀 여사가 만든 기홀병원 부속 맹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김점동은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 여성 의사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으나, 그의 인술은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김점동이 수술로 환자를 간단히 낫게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는 말이 나돌 만큼 명의로 알려졌다.
남편과 똑같은 폐결핵으로 요절
진료 활동 외에도 그는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 인공관을 이용하여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미 있는 의료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같은 열성적인 활동으로 귀국한 지 9년이 지난 후에는 그의 환국을 환영하는 행사가 서울 경희궁에서 다시 열리기도 했다. 1909년 4월 28일 고종과 순종이 주최한 이 행사는 일본과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을 유학하여 음악과 외국어를 배우고 귀국한 윤정원과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란사 등을 위한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국 환영회’였다. 그런데 이 행사의 첫 주인공은 바로 9년 전에 귀국한 김점동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의료활동을 벌이던 김점동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질병은 바로 남편을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죽게 한 폐결핵이었다.
김점동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베이징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했으나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언니 집에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아무런 소생을 남기지 않은 35세의 짧은 생이었다.
척박한 구한말의 풍토에서 그가 여성으로서 과학과 의학교육의 꿈을 키워 결실을 맺은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여성 과학도 및 의학도의 꿈을 키우는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또한 의사가 되어 귀국한 후 수많은 우리나라 여성 환자의 질병과 생명을 구한 그의 의술도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활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지난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梨花醫人) 박에스더상’을 제정해 매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그를 기리고 있다. 김점동은 2006년 11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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