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물리의 창’ 통해 생명과 인간을 말하다

한 가지를 깊이 천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접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쌓이게 된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또한 넓게 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지식 쌓기를 넘어 자신만의 인식 틀을 통해 전공분야는 물론 생명과 인간에 대한 독창적인 혜안을 보여주는 학자가 있다.

장회익(75) 서울대 명예교수. 장 교수는 물리학을 통해 다듬은 지성을 생명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이 시대 멘토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장 교수는 지난 2008년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자전적 에세이 ‘공부도둑’을 출간하면서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 책에서 그는 참다운 앎은 어떻게 체화되는가를 자신의 실화를 통해 드러내 보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조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해오던 일들 정리하고 글 쓰고, 가끔 1시간씩 강연을 하기도 하며 주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이는 공부 모임에 초청돼 가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천안 근처에 대학이 몇 개 있는데 전·현직 교수를 비롯해서 직장인, 주부들이 모여 책 읽고 토론하는 공부 모임을 만들었더군요. 전공도 철학, 의학, 공학 등 다양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꾼’이 천안에 내려와 산다는 것을 용케 알고 그 지역의 공부꾼들이 초청해 의기투합했다고나 할까. 이 공부 모임도 단순한 친목성이 아닌 나름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는 장 교수에게 양자역학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그 강의록을 정리해 최근에 영문논문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 조만간 생명에 관한 저서를 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생명이란 명제는 지금까지 계속 다듬어 오고 있는 주제지만 이번에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고 할까요. 책 제목을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라고 정하고 현재 1차 교정을 보고 있습니다. 3년 전인가 한울출판사에서 청년지성 총서를 기획하면서 원고청탁을 받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좀 늦어졌습니다.”

테니슨의 시 읽고 생명 이해에 몰입
생명이 없는 대상을 주로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생명학자’로 변신했다고 할 만큼 이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 온 장 교수는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한 송이’라는 짧은 시를 읽고 생명을 이해하는 데 몰입하게 됐다고 한다.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한송이, / 내 너를 벽 틈에서 뽑아냈구나, /여기 내 손 안에, 너를 들고 있다, 뿌리까지 모두, / 어린 꽃이여- 내 만일 네가 무엇인지를, 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 나는 신(神)이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련만.”
“저는 이 시에서 두 가지 의미를 발견했어요. 하나는 우주 전체와 연관될 수 있는 생명의 신비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작은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면 결국 큰 것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질만 이해하면 산 것은 모르고 살아있지 않은 것만 아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물리학을 좋아했던 장 교수는 원래 생물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테니슨의 시를 통해 생명에 매료된 후 1968년쯤부터 많은 책을 읽으며 생명 탐구를 시작했다.

“당시 물리학자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해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단지 ‘생명이란 부(-)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다’라는 말 이상의 깊은 내용은 찾을 수 없었어요. 또 많은 사람들이 생명체는 ‘열린계(open system)’라는 말을 해왔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니 생명의 생명다운 점은 생명체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과 바깥에 있는 그 무엇과의 결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즉 생명의 본질은 생명체 내부의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생물학자와 생명 사상가들은 생명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에 합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체 안의 어떤 특별한 물질이나 구성요소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는 여러 물질들이 적절하게 서로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해 그 안에서 우리가 생명현상이라 부르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될 경우, 비로소 이 전체 안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장 교수는 그러나 그 안에 생명현상이라 부르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위해 과연 어떠한 것들이 모여야 하는가 하는 점, 곧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 도움이 없이 그것만으로 생명현상을 나타내는 그 전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려 시도했다.

‘낱생명’과 ‘보생명’이 모여 진정한 생명인 ‘온생명’을 구성
장 교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그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낱생명이 진정한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으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본질적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하며,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쉽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생명은 나뭇잎이라고 하는 ‘낱생명’이었고, 줄기나 뿌리는 단지 나무를 지탱해주는 여건이라고만 생각했지요. 그러나 나뭇잎은 줄기나 뿌리가 없이 생존하기 어렵고, 결국 나뭇잎을 포함해 줄기와 뿌리가 한 전체가 되어 나무라는 생명체를 형성합니다. 나아가 이 나무는 지구, 태양계 안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존재하므로 결국 태양계라는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 즉 ‘온생명’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계는 외부 여건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완결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서, 달의 모양이 바뀌는 것을 알기 위해 열심히 달만 들여다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달의 모양은 태양과 지구와 달의 관계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 현상을 제대로 알려면 낱생명과 그 보생명이 함께 만들어내는 전체를 파악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 생명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다고 보십니까.

“저는 지금까지의 여러 발견과 연구결과를 감안해서 논리적으로 구성해 볼 때 태양으로부터 자유에너지를 받아 지구상의 물질이 요동치면서 먼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작은 물방울이나 혹은 태풍과 같이 결국 사라져버리게 되지만 소멸하기 전에 자기와 비슷한 것을 여러 개 만들게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특히 이것이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 다양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을 만들게 되고 이것이 결국 다양한 생물종을 탄생시키는 데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생물종의 탄생은 공기와 태양은 물론 다른 동식물이 서로 도와가면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러한 전체 구조를 통틀어 한눈에 바라본 모습이 바로 온생명입니다.”

장 교수는 이 같은 생명에 관한 이론을 정립해 1988년 4월 유고 두브로브니크에서 열린 국제과학철학학술대회와, 같은 해 가을 서울에서 열린 서울올림픽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 또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루는 국제학술지 ‘자이곤(Zygon)’의 편집장이 올림픽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이 논문을 직접 선택해 이듬해 초에 게재했다.

-유고의 학술대회 발표논문에서 ‘생명의 단위’라는 말을 쓰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생명의 단위라는 말은 제가 처음 쓴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을 너무 자명한 것으로 봐서 단위라는 관점에서 생명을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 생명의 진정한 단위는 온생명인데, 이것은 우주 전체가 생명이 된다거나 태양과 지구가 살아있다는 의미로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아니면 생명이 안 되는 즉, 생명이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 과연 무엇인가를 밝혀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니까 인간이나 동식물 같은 개체생명은 온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 의미있는 생명의 단위가 되지만 그 자체로 생명이 되기 위한 조건을 갖춘 진정한 생명의 단위는 아니라는 거였어요. 결국 온생명만이 진정한 생명의 단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물리학적으로 엔트로피가 고립된 계에서는 계속 증가해서 질서가 파괴돼 버립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엔트로피 증가를 보상해 주는 무엇인가가 들어와야 하지요. 그것이 네거티브 엔트로피인데, 우리에게는 바로 태양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이 부(-) 엔트로피가 있어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걸 보상할 뿐 아니라 전체의 질서를 오히려 증가시켜 나갑니다.”

장 교수에 따르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온생명이고, 생명은 온생명 단위로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과 동식물 같은 낱생명들이 생태계를 형성해 협동작업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전체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약 40억년이 걸렸다. 처음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만들어져 계통적으로 분화를 거듭하고 수평적으로는 원활한 협동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잘 안 되는 쪽은 밀려나고 잘 되는 쪽은 계속 유지 번성해 온 것이 바로 진화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생명체라 불리는 다세포 생물체는 세포에 비해 한 차원 높은 협동체를 구성하게 되고, 인간은 다시 협동에 의해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등 낱생명들은 온생명 안에서 지속적으로 좀 더 높은 층위의 단위들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데, 이 같은 진화가 바로 온생명의 성장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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