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부외과 의사이자 벤처 사업가인 건국대학 병원 송명근 교수(57)를 인터뷰하기로 하고 취재를 시작해보니 희한한 이야기들이 들렸다. 어느 날 환자 가족이 입원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송 교수가 레지던트의 뺨을 때리면서 "도대체 입원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고교시절 '시험의 달인'이었던 송 교수가 서울대 입시에서 수석을 못 하자 너무 분해서 입학식에도 가지 않고 한강변을 배회했다고도 했다. 유능한 의사이긴 하지만 워낙 독주하는 스타일이라 동료 의사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발명해 외국에서 크게 인정받은 판막기능 보조장치는 국내에선 별로 사용하는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의사 사회에서 누구를 섣불리 '최고'라고 불렀다간 난리가 난다고 경고해준 사람도 있었다.
'매력적인 카리스마'냐, 아니면 '자기도취에 빠진 괴팍한 성깔'이냐, 궁금해하면서 건국대 병원 12층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 창가엔 '정확한 판단, 치밀한 계획, 과감한 실천, 철저한 사후평가'란 문구가 담긴 나무패가 놓여 있었다.
푸른색 수술복 차림의 송 교수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풍채가 좋고 안색이 밝고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의학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성격의 의사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오히려 성실하고 지루한 모범생 스타일에 가까웠다.
송 교수는 요즘 하루에 네다섯 번 심장수술을 한다. 한번 시작하면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다섯 시간을 넘긴다. 엄청난 몰입과 집중의 시간이다.
"어젯밤엔 10시쯤 대동맥이 파열된 환자가 들이닥쳤어요. 자정에 수술을 시작해서 새벽 5시쯤 끝났어요.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집중을 하냐고요? 수술방은 전쟁터예요. 매 순간 생사가 왔다 갔다 합니다. 환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생명이 소생하느냐 꺼지느냐가 내 손에 달려있어요. 무한책임을 느끼는 순간이지요."
―심장수술을 8000번쯤 하면 어떤 경지에 오릅니까?
"실험하느라고 돼지 심장 수술한 것까지 합하면 1만 번은 되지요. 이젠 수술실에 들어설 때 전혀 두렵지 않고 편해요. 심장이 훤히 보인다고 할까요. 뭐가 문제인지 금방 알아요. 심장은 못 고치는 게 없어요. 최악의 경우 다른 심장으로 이식하면 되니까요."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실패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심장은 괜찮아졌는데 뇌졸중이 생긴다든지 식도가 파열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요. 그럼 왜 그렇게 됐는지 계속 연구해요. 지금까지 저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의학이 발전하는 거고요."
송 교수는 흉부외과 의사로 유명해졌지만, 벤처 사업가로 돈을 벌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더 주목을 받게 됐다. 작년에 자신이 죽으면 200억 원이 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장을 써서 2002년에 공증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공개하자 곳곳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그의 결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특히 송 교수가 "재산이 갑자기 불어나니 욕심이 생겨 마음이 흔들릴까봐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이 사실을 공개했다고 고백하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자동차는 신차 '제네시스' 출고 1호차를 그에게 선사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그를 취임식에 초청했다.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한 후 주변에서 좀 다르게 봅니까?
"처신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제 재산이 어느 정도라는 게 구체적으로 알려지니까 사람들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엔 동창회에 가서 20만원 정도 내던 기부금을 이젠 몇백 만원 단위로 내야 돼요.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됐다고 집사람한테 야단 좀 맞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번 돈은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얻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그러니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특실에 회진을 갔는데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요. 유학을 보냈는데 학위도 제대로 못 딴 아들이 돌아와서 수시로 돈만 축내더니, 심장수술 한 지 이틀 된 아버지에게 통장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어요. 안 그래도 걱정이 돼 통장을 매트리스 밑에 깔고 있던 노인은 그 통장을 빼앗기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돈을 잘못 주면 자식을 망쳐요. 또 제가 아는 의사가 갑자기 죽는 걸 보고 정리를 좀 하자는 생각도 들었고요.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더라도 내 권리는 내가 정당하게 행사하고 싶었거든요."
―당장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원래 도우려고 했던 목표에 맞는 분들이면 도와드리려고 하지요. 그리고 저는 술도 골프도 안 하고 매일 수술하고 늦게 퇴근하니까 어차피 돈 쓸 데도 없어요."
송 교수는 앞으로 얼마나 불어날지 모르는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약속하면서 심장병 연구, 소외된 노인과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송 교수는 수술실, 외래진료실, 사무실,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한때 골프를 쳤지만 골프 약속을 지키려면 환자에게 소홀하게 될 것 같아 포기했다. 그래도 "은퇴 후 6개월만 연습하면 수십 년 골프 친 사람도 다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1986년 미국서 귀국한 후 큰 대학병원이 아니라 부천 세종병원에 가기로 했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미국에 있을 때 저를 아껴주셨던 심장판막 수술계의 권위자 앨버트 스타 교수가 제가 귀국할 때 '유명한 병원으로 가지 말고 네가 가는 병원을 유명하게 만들라'고 하셨어요. 스타 교수 자신이 그렇게 사셨어요. 의학계의 메카인 존스 홉킨스 대학에 가지 않고 불모지나 다름없던 오리건 대학에서 심장센터를 키웠어요. 젊은 사람이 일을 하기 어려운 건 층층시하의 환경 때문인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세종병원에 가는 걸 반대한 분들께 '제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달라'고 했어요. 심장수술 연 100회 하던 병원을 2년 만에 700회 이상 하는 병원으로 만들었지요."
―18년간 일하던 서울아산병원을 떠나신 이유는 뭡니까?
"사람들이 자꾸 나를 원로 대접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일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쉬라고 그래요. 그게 뒷방 늙은이 하라는 거 아닙니까? 내 인생의 목표는 돈이나 쉬는 게 아닙니다. 70세까지 메스를 들고 현역으로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현장을 찾아가신 겁니까?
"또 한 가지 있지요. 아산병원처럼 큰 병원엔 여러 과가 있으니까 골고루 지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건대 병원에선 심장 분야에 집중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덕분에 짧은 시간에 세계 최고 수준의 가장 안전한 시설을 갖출 수 있었어요. 큰 조직에서라면 아주 오래 걸렸을 결정이지요. 게다가 평생 병원장 대접을 해준다는데, 기자 양반 같으면 거기로 안 가겠어요?"
―교수님이 '독선적'이란 평도 있더군요.
"독선적으로 행동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연구를 해보자는 주장은 했어요. 그래서 그런 비판이 나왔을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사대주의 같은 게 있습니다. 외국서 해본 연구는 다 믿으면서 우리나라에서 한 것은 안 믿으려고 해요. 의학계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 보수적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어요."
―어떤 장애가 있었나요?
"처음에 심장이식 하자고 했더니 어떻게 심장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느냐고 하고, 외과의사가 그런 걸 왜 하느냐고 하기도 하고요. 연구도 투자인데 안 하려고 하지요. 한국에서 뭘 먼저 해보는 것도 꺼리는 분위기고요."
―의사들 간에 경쟁이 심해서 교수님이 질투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요.
"제가 마흔한 살에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독주하니까 어떤 분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그래도 저를 흉부외과로 이끌어주신 서울대 이영균 교수님과 서울아산병원 민병철 원장님께서 늘 저를 보호해주시고 후견인 역할을 해주신 덕분에 이만큼 됐지요."
―심장이식 수술 성공 등 한국 최초 기록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우연의 결과일 리는 없고 큰 시나리오 안에서 단계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스타 교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첫 10년은 과감하게 일해서 너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라. 그래야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다. 그 다음 10년 동안은 전력 투구해서 일을 확대시켜라. 그리고 마지막 10년은 그때까지 한 일을 꽃피우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제가 계획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지요."
―이제 그간 한 일을 꽃피우는 세 번째 10년에 도전 중이시군요.
"앞으로 2~3년 안에 건대 병원에 또 하나의 세계적인 심장센터를 만들고 수술방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심장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24시간 언제든 의사들과 연락이 될 수 있게 하고요."
―스타 의사 한 명 데려온다고 병원 수준이 순식간에 그렇게 올라갑니까?
"그게 리더십이에요. 저는 초야에 묻혀있는 유능한 의사들을 찾아내고 시스템을 바꿔가요. 세종병원 때 이미 보여줬지만 그렇게 해서 병원이 한번 도약하면 계속 더 좋은 병원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현실에선 힘들고 고된 흉부외과 지원자가 거의 없다는데, 최근 방영됐던 의학 드라마 주인공은 흉부외과 의사인 경우가 많았어요.
"생사의 기로에서 일하는 직업이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지난주엔 심장이식 수술을 2번 했고 대동맥 파열된 환자를 2명 수술했습니다. 다섯 시간 수술하는 동안 환자의 체온을 15도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심장을 멈춰놓는 순간이 30~40분 정도 되는데 그때 엄청나게 급박하지요. 환자를 죽였다 살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심장은 '마음'이란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심장이식을 해서 다른 사람의 심장을 갖고 사는 건 왠지 다른 장기이식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
"심장을 바꾸면 성격이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건 아니에요. 느긋한 사람이 아주 성질 급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 받으면 좀 차이를 느낀다고는 해요. 그 심장의 전(前) 주인이 수십 년 유지해온 패턴이 있으니까요."
―성질이 급하십니까? 정말 레지던트의 뺨을 때린 적이 있으세요?
"절대 아닙니다. 늘 불평불만인 환자가 있어 겁을 주느라고 레지던트를 위협하는 척한 적이 있어요. 그게 와전됐겠지요. 저는 늘 극한 상황에서 일하니까 침착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선장이 흔들리면 안되니까요. 사자의 대담함, 여우의 지혜, 곰의 추진력이 다 있어야 합니다."
―수술에 대해 타고난 재능과 감각을 가진 외과 의사들이 있습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잡아낼 수 있는 직관 같은 게 있어요. 수술을 잘하는 의사들은 대개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요. 멀리서 환자를 봐도 본능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요. 저는 아무리 시끄러운 데서 진찰을 해도 청진기로 들려오는 소리에서 차이를 구분해요. 제가 청진기로 진찰하는 게 때로는 CT(컴퓨터 단층 촬영)보다 더 정확할 때도 있고요."
―그런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려면 자기관리가 중요하겠습니다.
"흉부외과 의사가 전날 밤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지 않고 수술방에 들어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대낮에 복면을 쓰고 다른 사람 가슴에 칼을 꽂는 직업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하나는 흉부외과 의사, 또 하나는 강도지요. 전날 술 먹고 수술하는 의사는 강도와 다를 바가 없어요."
―운동선수들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몸을 막 굴리면 안 됩니다. 저는 혹시 손이 떨릴까봐 수술 전엔 커피도 안 마십니다. 수술방에서 몇 시간씩 서있어야 하니까 걷기 운동을 많이 하고요. 손의 움직임이 유연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땐 여러 종류의 공을 들고 팔과 손 운동을 해요. 생활도 단순해야 하고요."
―오늘날의 '송명근'을 만드는 데 선친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시험에 '모래는 어디서 가져오나'라는 문제가 있었어요. 답은 '강'인데 저는 '영진상회'라고 썼어요. 집에서 공사할 때 그곳에서 모래를 가져오는 걸 봤거든요. 아버지는 제 설명을 다 듣고는 '그래 네 말도 맞다'고 하시면서 68점 맞아온 시험지를 다시 채점해 96점을 주시더라고요. 그런 아버지 덕에 저는 평생 호기심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왜 흉부외과 의사가 됐습니까.
"어려서 노벨상 타는 게 꿈이었어요. 그럼 연구를 해야 하는데, 제가 의과대학 다니던 시절엔 연구비란 게 없었습니다. 스스로 벌어서 투자해야겠다 싶어서 약리학을 하려고 했어요. 예과 시절에 종로 한약재상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약재로 개발할 게 없을까 실험을 해보느라고 안 먹어본 약재가 없어요. 그러다 몸을 상한 적이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약리학으로 그런 꿈을 이루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곧 포기하고 흉부외과로 갔지요. 그때는 심장수술 하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죽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미국으로 갔지요."
―'시험의 달인'이시라면서요?
"예과 1학년 때 아버지가 의대엔 수재들만 모이니까 제가 공부를 잘 못하는 것 같다고 공부 좀 하라고 하시기에, 녹음기로 강의 녹음하고 칠판 사진 찍고 잘 정리한 노트를 다 복사해서 달달 외워 모두 A학점 받았지요. 아버지께 마음먹으면 언제든 1등 할 수 있으니까 공부하란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저는 성적을 위해 공부한 적은 없어요. 관심 있고 흥미를 느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공부를 즐기는 체질입니다."
―앞으로 꿈꾸시는 건 뭡니까?
"의사로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해 수백, 수천 명을 살리는 연구도 중요합니다. 지금 새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 10가지 정도 됩니다. 심장 치료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삶의 목표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새로운 걸 발명하고 허가를 받고 그러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젠 성과를 거둘 때가 됐지요. 국제적인 상 하나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명근 교수는?
송명근 교수는? 1992년 11월 국내 최초로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이후 초저체온 대동맥 수술, 심장과 신장 동시 이식, 대동맥 판막 성형술 등을 국내 최초로 성공시키면서 심장수술 분야의 신기록을 경신해왔다. 부천 세종병원, 서울아산병원에 근무하다가 작년 평생 병원장급으로 대우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건국대 병원에 스카우트 됐다. 심장수술용 대동맥 인공판막의 반값 정도밖에 안 되는 판막기능 보조장치 'SS-ring'을 개발해 2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의사의 길을 가는 1남1녀에게 전세금 등으로 각각 3억원씩 물려주고 나머지 돈은 다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오리건대 부속병원 전임의, 베일러대 병원 임상조교수를 지냈다.
조선일보
고교시절 '시험의 달인'이었던 송 교수가 서울대 입시에서 수석을 못 하자 너무 분해서 입학식에도 가지 않고 한강변을 배회했다고도 했다. 유능한 의사이긴 하지만 워낙 독주하는 스타일이라 동료 의사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발명해 외국에서 크게 인정받은 판막기능 보조장치는 국내에선 별로 사용하는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의사 사회에서 누구를 섣불리 '최고'라고 불렀다간 난리가 난다고 경고해준 사람도 있었다.
'매력적인 카리스마'냐, 아니면 '자기도취에 빠진 괴팍한 성깔'이냐, 궁금해하면서 건국대 병원 12층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 창가엔 '정확한 판단, 치밀한 계획, 과감한 실천, 철저한 사후평가'란 문구가 담긴 나무패가 놓여 있었다.
푸른색 수술복 차림의 송 교수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 풍채가 좋고 안색이 밝고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의학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성격의 의사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오히려 성실하고 지루한 모범생 스타일에 가까웠다.
송 교수는 요즘 하루에 네다섯 번 심장수술을 한다. 한번 시작하면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다섯 시간을 넘긴다. 엄청난 몰입과 집중의 시간이다.
"어젯밤엔 10시쯤 대동맥이 파열된 환자가 들이닥쳤어요. 자정에 수술을 시작해서 새벽 5시쯤 끝났어요.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집중을 하냐고요? 수술방은 전쟁터예요. 매 순간 생사가 왔다 갔다 합니다. 환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생명이 소생하느냐 꺼지느냐가 내 손에 달려있어요. 무한책임을 느끼는 순간이지요."
―심장수술을 8000번쯤 하면 어떤 경지에 오릅니까?
"실험하느라고 돼지 심장 수술한 것까지 합하면 1만 번은 되지요. 이젠 수술실에 들어설 때 전혀 두렵지 않고 편해요. 심장이 훤히 보인다고 할까요. 뭐가 문제인지 금방 알아요. 심장은 못 고치는 게 없어요. 최악의 경우 다른 심장으로 이식하면 되니까요."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실패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심장은 괜찮아졌는데 뇌졸중이 생긴다든지 식도가 파열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요. 그럼 왜 그렇게 됐는지 계속 연구해요. 지금까지 저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의학이 발전하는 거고요."
송 교수는 흉부외과 의사로 유명해졌지만, 벤처 사업가로 돈을 벌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더 주목을 받게 됐다. 작년에 자신이 죽으면 200억 원이 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장을 써서 2002년에 공증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공개하자 곳곳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그의 결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특히 송 교수가 "재산이 갑자기 불어나니 욕심이 생겨 마음이 흔들릴까봐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이 사실을 공개했다고 고백하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자동차는 신차 '제네시스' 출고 1호차를 그에게 선사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그를 취임식에 초청했다.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한 후 주변에서 좀 다르게 봅니까?
"처신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제 재산이 어느 정도라는 게 구체적으로 알려지니까 사람들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엔 동창회에 가서 20만원 정도 내던 기부금을 이젠 몇백 만원 단위로 내야 돼요.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됐다고 집사람한테 야단 좀 맞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번 돈은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얻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그러니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특실에 회진을 갔는데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요. 유학을 보냈는데 학위도 제대로 못 딴 아들이 돌아와서 수시로 돈만 축내더니, 심장수술 한 지 이틀 된 아버지에게 통장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어요. 안 그래도 걱정이 돼 통장을 매트리스 밑에 깔고 있던 노인은 그 통장을 빼앗기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돈을 잘못 주면 자식을 망쳐요. 또 제가 아는 의사가 갑자기 죽는 걸 보고 정리를 좀 하자는 생각도 들었고요.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더라도 내 권리는 내가 정당하게 행사하고 싶었거든요."
―당장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원래 도우려고 했던 목표에 맞는 분들이면 도와드리려고 하지요. 그리고 저는 술도 골프도 안 하고 매일 수술하고 늦게 퇴근하니까 어차피 돈 쓸 데도 없어요."
송 교수는 앞으로 얼마나 불어날지 모르는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약속하면서 심장병 연구, 소외된 노인과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송 교수는 수술실, 외래진료실, 사무실,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한때 골프를 쳤지만 골프 약속을 지키려면 환자에게 소홀하게 될 것 같아 포기했다. 그래도 "은퇴 후 6개월만 연습하면 수십 년 골프 친 사람도 다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1986년 미국서 귀국한 후 큰 대학병원이 아니라 부천 세종병원에 가기로 했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미국에 있을 때 저를 아껴주셨던 심장판막 수술계의 권위자 앨버트 스타 교수가 제가 귀국할 때 '유명한 병원으로 가지 말고 네가 가는 병원을 유명하게 만들라'고 하셨어요. 스타 교수 자신이 그렇게 사셨어요. 의학계의 메카인 존스 홉킨스 대학에 가지 않고 불모지나 다름없던 오리건 대학에서 심장센터를 키웠어요. 젊은 사람이 일을 하기 어려운 건 층층시하의 환경 때문인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세종병원에 가는 걸 반대한 분들께 '제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달라'고 했어요. 심장수술 연 100회 하던 병원을 2년 만에 700회 이상 하는 병원으로 만들었지요."
―18년간 일하던 서울아산병원을 떠나신 이유는 뭡니까?
"사람들이 자꾸 나를 원로 대접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일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쉬라고 그래요. 그게 뒷방 늙은이 하라는 거 아닙니까? 내 인생의 목표는 돈이나 쉬는 게 아닙니다. 70세까지 메스를 들고 현역으로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현장을 찾아가신 겁니까?
"또 한 가지 있지요. 아산병원처럼 큰 병원엔 여러 과가 있으니까 골고루 지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건대 병원에선 심장 분야에 집중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덕분에 짧은 시간에 세계 최고 수준의 가장 안전한 시설을 갖출 수 있었어요. 큰 조직에서라면 아주 오래 걸렸을 결정이지요. 게다가 평생 병원장 대접을 해준다는데, 기자 양반 같으면 거기로 안 가겠어요?"
―교수님이 '독선적'이란 평도 있더군요.
"독선적으로 행동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연구를 해보자는 주장은 했어요. 그래서 그런 비판이 나왔을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사대주의 같은 게 있습니다. 외국서 해본 연구는 다 믿으면서 우리나라에서 한 것은 안 믿으려고 해요. 의학계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 보수적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어요."
―어떤 장애가 있었나요?
"처음에 심장이식 하자고 했더니 어떻게 심장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느냐고 하고, 외과의사가 그런 걸 왜 하느냐고 하기도 하고요. 연구도 투자인데 안 하려고 하지요. 한국에서 뭘 먼저 해보는 것도 꺼리는 분위기고요."
―의사들 간에 경쟁이 심해서 교수님이 질투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요.
"제가 마흔한 살에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독주하니까 어떤 분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그래도 저를 흉부외과로 이끌어주신 서울대 이영균 교수님과 서울아산병원 민병철 원장님께서 늘 저를 보호해주시고 후견인 역할을 해주신 덕분에 이만큼 됐지요."
―심장이식 수술 성공 등 한국 최초 기록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우연의 결과일 리는 없고 큰 시나리오 안에서 단계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스타 교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첫 10년은 과감하게 일해서 너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라. 그래야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다. 그 다음 10년 동안은 전력 투구해서 일을 확대시켜라. 그리고 마지막 10년은 그때까지 한 일을 꽃피우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제가 계획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지요."
―이제 그간 한 일을 꽃피우는 세 번째 10년에 도전 중이시군요.
"앞으로 2~3년 안에 건대 병원에 또 하나의 세계적인 심장센터를 만들고 수술방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심장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24시간 언제든 의사들과 연락이 될 수 있게 하고요."
―스타 의사 한 명 데려온다고 병원 수준이 순식간에 그렇게 올라갑니까?
"그게 리더십이에요. 저는 초야에 묻혀있는 유능한 의사들을 찾아내고 시스템을 바꿔가요. 세종병원 때 이미 보여줬지만 그렇게 해서 병원이 한번 도약하면 계속 더 좋은 병원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현실에선 힘들고 고된 흉부외과 지원자가 거의 없다는데, 최근 방영됐던 의학 드라마 주인공은 흉부외과 의사인 경우가 많았어요.
"생사의 기로에서 일하는 직업이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지난주엔 심장이식 수술을 2번 했고 대동맥 파열된 환자를 2명 수술했습니다. 다섯 시간 수술하는 동안 환자의 체온을 15도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심장을 멈춰놓는 순간이 30~40분 정도 되는데 그때 엄청나게 급박하지요. 환자를 죽였다 살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심장은 '마음'이란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심장이식을 해서 다른 사람의 심장을 갖고 사는 건 왠지 다른 장기이식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
"심장을 바꾸면 성격이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건 아니에요. 느긋한 사람이 아주 성질 급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 받으면 좀 차이를 느낀다고는 해요. 그 심장의 전(前) 주인이 수십 년 유지해온 패턴이 있으니까요."
―성질이 급하십니까? 정말 레지던트의 뺨을 때린 적이 있으세요?
"절대 아닙니다. 늘 불평불만인 환자가 있어 겁을 주느라고 레지던트를 위협하는 척한 적이 있어요. 그게 와전됐겠지요. 저는 늘 극한 상황에서 일하니까 침착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선장이 흔들리면 안되니까요. 사자의 대담함, 여우의 지혜, 곰의 추진력이 다 있어야 합니다."
―수술에 대해 타고난 재능과 감각을 가진 외과 의사들이 있습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잡아낼 수 있는 직관 같은 게 있어요. 수술을 잘하는 의사들은 대개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요. 멀리서 환자를 봐도 본능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요. 저는 아무리 시끄러운 데서 진찰을 해도 청진기로 들려오는 소리에서 차이를 구분해요. 제가 청진기로 진찰하는 게 때로는 CT(컴퓨터 단층 촬영)보다 더 정확할 때도 있고요."
―그런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려면 자기관리가 중요하겠습니다.
"흉부외과 의사가 전날 밤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지 않고 수술방에 들어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대낮에 복면을 쓰고 다른 사람 가슴에 칼을 꽂는 직업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하나는 흉부외과 의사, 또 하나는 강도지요. 전날 술 먹고 수술하는 의사는 강도와 다를 바가 없어요."
―운동선수들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몸을 막 굴리면 안 됩니다. 저는 혹시 손이 떨릴까봐 수술 전엔 커피도 안 마십니다. 수술방에서 몇 시간씩 서있어야 하니까 걷기 운동을 많이 하고요. 손의 움직임이 유연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땐 여러 종류의 공을 들고 팔과 손 운동을 해요. 생활도 단순해야 하고요."
―오늘날의 '송명근'을 만드는 데 선친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시험에 '모래는 어디서 가져오나'라는 문제가 있었어요. 답은 '강'인데 저는 '영진상회'라고 썼어요. 집에서 공사할 때 그곳에서 모래를 가져오는 걸 봤거든요. 아버지는 제 설명을 다 듣고는 '그래 네 말도 맞다'고 하시면서 68점 맞아온 시험지를 다시 채점해 96점을 주시더라고요. 그런 아버지 덕에 저는 평생 호기심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왜 흉부외과 의사가 됐습니까.
"어려서 노벨상 타는 게 꿈이었어요. 그럼 연구를 해야 하는데, 제가 의과대학 다니던 시절엔 연구비란 게 없었습니다. 스스로 벌어서 투자해야겠다 싶어서 약리학을 하려고 했어요. 예과 시절에 종로 한약재상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약재로 개발할 게 없을까 실험을 해보느라고 안 먹어본 약재가 없어요. 그러다 몸을 상한 적이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약리학으로 그런 꿈을 이루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곧 포기하고 흉부외과로 갔지요. 그때는 심장수술 하면 두 사람 중 한 명이 죽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미국으로 갔지요."
―'시험의 달인'이시라면서요?
"예과 1학년 때 아버지가 의대엔 수재들만 모이니까 제가 공부를 잘 못하는 것 같다고 공부 좀 하라고 하시기에, 녹음기로 강의 녹음하고 칠판 사진 찍고 잘 정리한 노트를 다 복사해서 달달 외워 모두 A학점 받았지요. 아버지께 마음먹으면 언제든 1등 할 수 있으니까 공부하란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저는 성적을 위해 공부한 적은 없어요. 관심 있고 흥미를 느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공부를 즐기는 체질입니다."
―앞으로 꿈꾸시는 건 뭡니까?
"의사로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해 수백, 수천 명을 살리는 연구도 중요합니다. 지금 새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 10가지 정도 됩니다. 심장 치료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삶의 목표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새로운 걸 발명하고 허가를 받고 그러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젠 성과를 거둘 때가 됐지요. 국제적인 상 하나는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명근 교수는?
송명근 교수는? 1992년 11월 국내 최초로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이후 초저체온 대동맥 수술, 심장과 신장 동시 이식, 대동맥 판막 성형술 등을 국내 최초로 성공시키면서 심장수술 분야의 신기록을 경신해왔다. 부천 세종병원, 서울아산병원에 근무하다가 작년 평생 병원장급으로 대우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건국대 병원에 스카우트 됐다. 심장수술용 대동맥 인공판막의 반값 정도밖에 안 되는 판막기능 보조장치 'SS-ring'을 개발해 2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의사의 길을 가는 1남1녀에게 전세금 등으로 각각 3억원씩 물려주고 나머지 돈은 다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오리건대 부속병원 전임의, 베일러대 병원 임상조교수를 지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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