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4일 수요일

우주의 거대한 역사를 담고 있는 별빛

역사는 철학, 문학과 함께 인문학을 대표하는 핵심 분야다. 우리는 조상의 손때와 숨결이 남아있는 기록, 유물, 유적에서 읽어내는 인간의 역사만이 진정한 역사라고 믿어왔다. 우리 인간만이 기억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바람과 파도가 자연에 남긴 흔적이나 아스라이 반짝이는 별빛은 진한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역사가 담겨 있는 대상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자연에 남아있는 거대사(빅히스토리)가 오히려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주고, 훨씬 더 오묘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별빛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밤하늘에 무심하게 반짝이는 별빛은 누구에게나 깊은 감동을 준다. 알퐁스 도데와 윤동주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별빛이 주는 감동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점성술사와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의 별에 자신들의 신화를 새겨 넣기 위해 애를 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별자리의 이름은 대부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근거로 붙여진 것이다. 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자리에 의미를 담기 위해 애를 썼다. 신화와 이야기를 담은 별자리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별똥별과 혜성을 미래의 운명을 알려주는 신호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대 사회의 지배 수단이었던 신탁(神託)도 대부분 신비스러운 천문 현상에 의존한 것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별의 세계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으려 했던 철학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별빛에 담겨있는 진실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별빛에 담긴 우주의 장구한 역사를 읽어내는 실마리를 처음 제공해준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별빛이 매우 빠르기는 하지만 유한(有限)한 속도로 전달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감성적인 감동의 대상이면서 신비스러운 예언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던 밤하늘이 엄격하고 논리적인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승격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250만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안드로메다.
250만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안드로메다.
우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별빛

밤하늘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모든 별이 둥근 천구(天球)에 붙어있을 것이라던 우리의 상상은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햇빛은 약 8분 전에 태양을 출발했고, 태양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켄타우르스 알파성의 별빛은 4.3년 전에 출발한 것이고, 정북에 위치한 북극성의 별빛은 무려 800년 전에 빛난 것이다. 한 점으로 보이는 안드메다의 별빛은 빛의 속도로 250만 년이나 가야 하는 엄청난 거리에 위치한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쏟아내는 것이다. 까마득한 137억 년 전에 빛났던 별빛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사실은 138억 년에 이르는 정말 장구한 우주의 역사의 특정한 순간을 보여주는 별빛들로 가득 채워진 역사책이었던 셈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 있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거대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별빛에서 읽어내는 우주의 거대사도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다. 우주의 거대사에는 우주의 구성과 작동 원리에 대한 소중한 정보도 함께 담겨 있다. 우주의 역사와 정체,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의 운명에 대한 정보가 모두 별빛 속에 비밀스럽게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생명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DNA.
생명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DNA.
생명 진화의 흔적이 담겨진 DNA

자연의 거대한 역사가 별빛에만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세포 속에 들어있고, 생명의 모든 신비를 담고 있는 ‘생명의 책’(book of life)으로 알려진 DNA에도 생명 진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은 A, T, G, C로 표현되는 4종류의 알파벳을 이용해서 생명 정보를 저장한다. 특히 3개의 알파벳을 하나의 묶음으로 하는 ‘코돈’(codon)이 64진법의 암호를 만들어낸다. 코돈으로 암호화된 유전 정보가 생명체의 생존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닮은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DNA에 담겨 있는 유전 정보의 암호화 된 저장 형식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과연 그렇게 정교한 생명 정보 저장 체계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밝혀내는 일이 생명 탄생의 비밀을 밝혀내는 열쇠가 될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DNA의 역할이 단순히 생존과 유전에 필요한 유전 정보의 저장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DNA의 염기 서열에는 생명 진화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정보도 함께 담겨 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과 생태 환경에서 생명체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명체 스스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종(種)은 결국 자연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한 역사적 경험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DNA에는 그런 변화의 순서를 짐작할 수 있는 희미한 흔적이 남겨져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모두 600만 년 전 아프리카 남부의 초원 지대에서 살았던 7명의 ‘이브’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DNA에 남겨진 흔적 덕분이었다.

결국 지나온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닌 셈이다. 바다나 강바닥에 쌓여있는 퇴적층과 비바람에 깎여져 나간 바위에도 소중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메르 사람들이 남긴 점토판이나 고대 중국인이 남긴 갑골 기록을 읽어내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듯이 별빛이나 DNA에 남겨진 거대사를 읽어내는 일에도 특별한 노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역사를 읽어낼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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