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개척 어려워 대입 ‘스펙’ 쌓기 치중 / 입시 부담감 일반 학교와 다르지 않아 / 내신 경쟁 치열해 ‘사교육’ 전전하기도 / 국가 지원 이유로 의대 진학 시 불이익 /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한다” 반발도 / 전문가 "이공계 처우 개선 등이 해결책"
영재교육 대상자 중에서도 상위 1%에 속한다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과정인 영재학교에 다닌다. 이들은 영재교육과 입시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의대 진학 시 불이익을 주는 등 이공계 중심으로 진출하도록 짜인 현행 영재교육 시스템에 갇혀 있다.
◆“입시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구조”
29일 세계일보 취재진이 영재학교 학생들과 한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영재교육 과정에 대해 후하게 평가하면서도 한결같이 입시부담을 호소했다. 특히 입시와 대입 이후의 진로에 대해선 전적으로 영재 개인에게 떠맡긴 채 직업 선택의 자유만 ‘사회적 책무’라는 명목으로 차단해 놓은 데 대한 불만이 많았다.
영재학교 역시 대학입시에 매달려야 하는 건 일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도권의 한 영재학교에 재학 중인 송모(18)군은 “보통 2학년 말부터 입시 준비를 시작하는데, 내신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성적이 안 좋은 애들은 수업을 안 듣고 그냥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에 몰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른 영재학교 2학년 최모(18)군은 “워낙 잘 하는 애들끼리 모여있다 보니 몇 명은 내신에서 밀려서 서울대를 못 가게 된다”며 “학교 자체가 입시에 도움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털어놨다.
영재학교 학생들은 또 “학교 수업은 수업대로 하면서 입시나 내신을 위한 사교육을 따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몇몇 교사는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다는 걸 알아서 아예 수업을 하지 않기도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영재교육원이나 영재학급에 다니는 학생들의 경우 수업이 토요일 등 휴일에 진행되는 탓에 입시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다. 정규 교과과정이 아닌 일종의 과외 수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대입 준비를 시작하는 고교 1∼2학년 단계에서 영재교육이 끊기게 된다.
학부모 대다수는 혹여 자녀에게 피해라도 갈까봐 말을 아꼈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이도 일부 있었다. 영재학교 2학년 아들을 둔 김모(43·여)씨는 “아이가 학교를 재밌어 하는 것 같아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면서도 “영재교육을 받는다는 것보다는 애가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하는 게 부모로서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영재들의 입시와 맞물린 쟁점의 하나가 의대 진학이다.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것이다. 이공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교이니 의대 진학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과 사춘기 시기에 아이의 인생 진로를 국가가 강제로 정해버리는 건 폭력적이란 지적이 맞서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내놓은 ‘생애주기별 맞춤형 영재교육 지원체제 구축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영재학교 졸업생의 9.5%가 의·약학계열 학과(부)에 진학했다. 졸업생 10명 중 1명꼴로, 이공계열(82.1%)에 비교하면 극히 적지만 영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사회철학에 따라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송인수 대표는 “과학기술이나 국가 발전에 기여하라고 키워 놓은 인재들이 의대로 가는 상황은 영재학교가 대입을 위한 하나의 통로로 변질됐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반면 영재학교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해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이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주아 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소장은 “이공계 영재라고 해서 꼭 교수나 연구원만 돼야 하느냐”며 “영재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부는 영재학교나 과학고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할 경우 불이익을 주고 있다. 지난해엔 영재학교들에 ‘의대 진학 시 추천서를 써 주지 않으며 장학금과 지원금을 회수한다’는 내용을 학칙과 모집요강 등에 명시하는 등 제법 강경한 대책을 내놨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의대 진학을 고려 중인 영재학교 학생은 여전히 제법 많다. 취재진이 인터뷰한 학생들은 하나 같이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면서도, 주변에 부모의 권유 등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급우가 여럿 있다고 조심스레 밝혔다. 추모(17)군은 “의대에 가고 싶어서 일반고로 전학가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대책 자체도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단 추천서를 요구하는 의대가 많지 않은 데다 장학금이나 지원금 회수를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가 없어 강제성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또 학생이 장학금과 지원금을 반환하고서라도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하면 막을 방도가 없다. 실효적 대책이라기보단 일종의 엄포에 가까운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기순 인천대 창의인재개발학과 교수는 “(의대에 진학하는) 아이들 탓만 할 게 아니라 왜 그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상대적으로 열악한 이공계 전문 인력의 처우 개선이나 영재 선발 과정의 모순 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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