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엔 신선들이 모인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40분가량 가면 ‘부하 마히’라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고요한 이 마을에 수풀이 보기 좋게 우거진 장소가 눈에 띕니다. 새로운 사람이 낯설지 않은지 반갑게 지저귀며 맞이해주는 새소리를 따라 걷다보면 건물 하나가 보입니다.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는 이곳은 세계적인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모여 연구하는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IHÉS) 입니다. 

프랑스 파리 남부에 위치한 고등과학원(IHES).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필즈상 수상자였던 장 피에르 세르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수학자들이 다녀간 곳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문제’와 관련된 업적을 남긴 김민형 옥스퍼드 수학과 교수도 다녀간 곳이며, 지난해 대한수학회 논문상을 수상한 박지훈 포스텍 수학과 교수도 올해 한 달간 방문했다.-  조혜인 기자 제공

신선들이 모이는 곳, IHÉS 

IHÉS는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이한 기관으로, 미국 프린스턴 고등과학원과 함께 세계 최고의 연구 기관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한 달을 기준으로 50~60명이, 1년으로 따지면 200명 정도의 수학자와 과학자가 각국에서 이곳을 찾아옵니다.

수많은 연구기관과 대학이 몰려 있는 파리와 가까워 유능한 학자들과 교류가 쉬운 것이 이곳의 장점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지요. 연구소 로비나 다과를 먹는 응접실에는 칠판이 걸려 있는데, 칠판에는 누군가 최근 고민 중인 듯한 문제를 던져 놓았습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책 읽듯 배우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과 대화하고 떠드는 학문이지요. 얘기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서로 토론하면서 얻게 되는 게 훨씬 많아요.”
엠마누엘 윌모 연구소장은 2013년부터 IHÉS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을 비롯해 중국과 브라질 등 다양한 국가의 과학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2006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는 ‘엘리 카르탕상’을 받았다. - 조혜인 기자 제공
엠마누엘 윌모 IHÉS 연구소장의 말을 들으니 학자들이 서로 이곳에 오려는 이유를 알겠습니
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니, 각국의 유능한 학자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과 토론하면 서로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까다로운 심사 조건에도 매해 IHÉS에 방문하고 싶어 하는 연구원은 끊이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문화적으로 수학을 연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수학에 대한 개념부터 계산 기술까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세계 연구자들이 모여 이에 대해 토론하면 더 풍부한 토론이 되고 서로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IHÉS는 ‘뛰어난 연구자들의 완전한 자유로운 연구’를 지향한다. 자연이 어우러진 좋은 환경에서 연구자들끼리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걸 독려해서인지 실제로 연구실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연구자가 많았다. - 조혜인 기자 제공
이런 운영 방식은 IHÉS 설립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교수의 영향이 컸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과학원 출신의 오펜하이머 교수는 그곳에서 외국인을 초빙해 세미나를 여는 방식을 배웠고,이것을 IHÉS을 세울 때도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설립 초기에 IHÉS는 미국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IHÉS의 화려한 번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로텐디크의 대수학 강의

지금은 한 해 수백 명이 오고가는 연구소지만, 처음 연구소를 설립할 때는 교수가 4명뿐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1966년 필즈상을 수상한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교수였습니다. 그로텐디크 교수는 IHÉS에서 대수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세미나는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뒀습니다.

독특한 형식의 세미나에서 그로텐디크의 기발한 수학적 아이디어는 금세 입소문이 퍼졌고, 수많은 사람이 그로텐디크의 세미나를 듣기 위해 IHÉS로 찾아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IHÉS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로텐디크는 IHÉS는 기초과학 연구소가 군사 연구비 지원을 받는다는 게 본인의 신념과 맞지 않다며 IHÉS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로텐디크의 세미나 내용은 당시 같이 교수로 있던 장 디외도네의 주도하에 책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때 시작한 IHÉS 학술지는 지금까지도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IHÉS 여기저기에는 칠판이 있고, 칠판에는 수학자들이 고뇌한 흔적이 있다. - 조혜인 기자 제공
그런데 이 학술지의 내용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내용이 담긴 책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프랑스 수학자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집단 ‘니콜라 부르바키’에서 만든 책입니다. 니콜라 부르바키는 20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수학 단체로, 1935년 만들어졌습니다. IHÉS 설립 초기 교수였던 그로텐디크와 디외도네를 비롯해 이후 교수로 임용된 클루드 셰밸리, 필즈상 수상자 장 피에르 세르가 모두 부르바키 회원이었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수학을 다루는 비슷한 두 조직에 모두 몸담고 있었으니 의도가 어쨌든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후에 IHÉS 교수로 온 수학자 피에르 카르티에는 “그곳에 이미 부르바키의 정신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장 디외도네가 시작하며 만들어진 학술지는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세미나를 정리해 놓은 책이다. - 조혜인 기자 제공

● 니콜라 부르바키 가입 조건

부르바키 회원은 보통 10명 내외였습니다. 최고 중의 최고 수학자만이 들어갈 수 있던 부르바키 회원이 되는 과정은 어땠을까요?

부르바키는 50살이 되면 은퇴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쯤, 1세대 설립자들은 나이가 꽤 들었고, 영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젊은 수학자 영입을 준비해야 했지요. 그래서 10대~20대 젊은 수학자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카르티에 교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니콜라 부르바키 회원이었던 수학자 피에르 카르티에. - 조혜인 기자 제공
부르바키 초대 멤버 앙드레 베유와 앙리 카르탕 밑에서 공부한 부르바키 2세대 피에르 카르티에 교수에게 기간을 두고 두 번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카르티에 교수는 19살 때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고, 이때 부르바키 회원 제안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르바키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부르바키 조직은 몇 년간 카르티에 교수를 더 지켜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식 제안을 해서 부르바키 회원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부르바키는 사실상 해체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초창기 40년 동안 매년 한 권씩 책을 발행하던 것과 달리 최근 30년간은 세 권 밖에 발행하지 않을 정도이니 활동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정기적으로 세미나는 열고 있답니다.

 수학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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