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4일 토요일

21세기 지식 혁명으로 번지는 진화론[다윈 탄생 200주년 기념 '다윈이 돌아왔다'

다윈 탄생 200주년 기념 '다윈이 돌아왔다

"그처럼 단순한 시작(So Simple a Beginning)으로부터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수많은 모습의 생명들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니!"

우리는 감탄한다.

"이 엄청난 생명다양성의 진화가 그처럼 단순한 이론(So Simple a Theory)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니!"


<1> 21세기 지식 혁명으로 번지는 진화론



1859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의 존 머레이 출판사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판매용으로 찍은 1170권의 초판은 꺼내놓기가 무섭게 당일로 몽땅 다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우며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탄생이 창조주의 은총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 결과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엄청난 도발이었다.

2000년 서양 역사의 사상적 기반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영원불변의 전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전형으로부터의 변이(變移)는 진리의 불완전한 투영에 불과하다. 금이 은으로 변할 수 없듯이 생물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다윈은 플라톤이 진리의 불완전한 그림자로 지정한 변이야말로 이 세상에 실존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다름이 곧 아름다움이며 삶의 새로움을 잉태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다윈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윈의 진화론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론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50년간 끊임없이 계속된 담금질로 인해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생명의 의미와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이론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진화론은 이제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과학사학자들은 이들 두고 '다윈 혁명'이라 부른다. 일찍이 유전학자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대공황의 공포로 밀어 넣는 요즘 경제학의 지평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경제의 주체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과 심리에 관한 과학적 분석이 결여된 경제학이 논리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법학도 드디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 거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홀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먼 훗날 훨씬 중요한 연구 분야들이 열릴 텐데, 심리학은 전혀 새로운 기초 위에 놓일 것이다." 요즘 각광 받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정신도 엄연히 진화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들과 진화생물학을 통섭(統攝)하고 있다.
▲ 다윈이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거북이‘해리엇’. 2006년 6월 호주의 한 동물원에서 176세에 세상을 떴다(왼쪽), 탄생 200주년을 맞아 21세기의 사상가로 되살아나는 찰스 로버트 다윈(오른쪽). /조선일보 DB사진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12년 후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자연선택론에 덧붙여 성선택론(性選擇論)을 소개하며 남성중심의 사회질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에서 내가 전개한 호주제 논의는 다름아닌 다윈의 성선택론의 연장이었다. 지극히 기계론적인 현대의학도 진화생물학과 손을 잡고 조금씩 다윈의학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어린 시절 밤 늦게 다윈 토론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고 한다. 문학비평에도 다윈의 입김이 뜨거워지고 있다.

다윈이 돌아왔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바다출판사)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우리 시대를 주저 없이 '다윈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는 근대를 대표하는 세 석학,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중에서 다윈만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그의 이론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모름지기 훌륭한 이론은 간결하고 쓰임새가 다양하며 우아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은유와 유비로 가득 찬 아름답고 탁월한 이론이지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이론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감탄한다. "그처럼 단순한 시작(So Simple a Beginning)으로부터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수많은 모습의 생명들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니!" 우리는 감탄한다. "이 엄청난 생명다양성의 진화가 그처럼 단순한 이론(So Simple a Theory)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니!"



2009년 찰스 로버트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는 다윈주의를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의 모임 '다윈 포럼'과 함께 '다윈이 돌아왔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오늘날 경제학, 심리학, 법학, 문학, 종교, 예술, 여성 등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 새롭게 21세기 지식의 담론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상을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차례로 집필한다



<2> "경제는 균형이 아니라 진화"
"두려움의 진화가 現 글로벌 경제위기 불러…
균형 정상으로 치는 '뉴턴표 경제학'은 한계
변수·선택 강조하는 '다윈표 경제학' 뜰 때"
김창욱 삼성경제연구소 복잡계센터장




올해는 19세기 생물학자 찰스 다윈(Darwin·1809~1882)의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을 맞는 해다. 다윈의 진화론을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국내 학자들의 모임 '다윈 포럼'이 '다윈이 돌아왔다' 시리즈를 주간 연재한다. 지난 1일자의 첫 회 '21세기에 되살아나는 다윈'에 이어 제2회 '다윈과 경제'를 싣는다.

다윈과 경제: 경제 위기의 순간에 다윈을 찾다 세계경제가 위기다. 서브프라임 부실의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과 실물경제가 침체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 그냥 놔두면 시장경제는 알아서 잘 작동할 것이라던 믿음이 깨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많은 경제학자들이 놀라며 당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경제에서 위기와 급변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1929년 대공황 이래 지난 세기에만 우리는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을 이미 여러 차례 겪었다. 문제는 기존의 경제학이 이러한 경제현실을 설명하는 데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것이다. 그 훌륭한 경제학자 중 누구도 이들 사태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그들의 경제 원리를 가지고 이를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은 1970년대 세계경제가 오일쇼크로 인한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경제학의 위기'를 외쳤는데 30여년 만에 또다시 경제학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균형에 관한 헛된 믿음을 버려라기존 신고전파 경제학이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근본이유는 그것이 뉴턴 역학에 입각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뉴턴표(標)' 경제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뉴턴 역학의 체계를 차용하고 있다. 이는 균형을 정상상태로 생각한다. 경제는 스스로 조절하며 마찰 없이 돌아가는 '자동제어장치' 같아서 항상 균형 상태에 있으며, 외부 충격에 의해 균형에서 벗어나더라도 상쇄하는 힘의 작용에 의해 다시 균형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내생적인 불안정성이나 급격한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경제현실은 경제학이 그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다양성의 확대와 새로운 것의 끊임없는 출현', '예상치 못한 변화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격변의 소용돌이',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경제 현실이다. '뉴턴표' 경제학으로는 이러한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이제 경제학은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변화를 정상 상태로 하는 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의 경제현실을 보면서 다윈을 다시 찾는 이유이다.
▲ 금융 위기의 충격에 사로잡힌 뉴욕증권거래소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다윈주의자들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진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조선일보 DB사진
◆슘페터, 베블렌이 생각한 경제 속의 진화다윈은 변이와 선별, 이 두 가지 간단한 개념의 결합을 통해 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혔다. 비록 다윈은 자신의 개념을 생물의 진화에 적용하였지만 이 원리는 생물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개념을 확장하면 세계의 보편적인 변화 원리가 될 수 있으며 경제에도 훌륭히 적용될 수 있다. 《부의 기원》(2007)을 쓴 바인하커(E. Beinhocker)는 진화야말로 "세계의 모든 질서, 복잡성, 그리고 다양성을 설명해 주는 공식"이라고 하였다.

경제현실에서 변이는 새로움의 지속적 창출을 의미하고 선별은 변화의 누적적 증폭 과정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의 내생적 변화는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이것이 누적적 증폭 과정을 통해 확산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를 강조한 슘페터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누적적 변화'를 강조한 베블렌 등은 진화론적 관점을 경제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초의 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는 두려움 때문에 진화한다?금번 경제위기도 진화 패러다임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이는 작은 국지적 요동이 누적적 증폭과정을 통해 확산된 것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대출자의 연체가 금융기관의 연쇄적인 부실로 이어졌다. 금융기관의 대출 중단과 회수는 자산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이것이 자금 사정을 악화시켜 대출 중단 및 회수 행동을 더욱 강화시킨다. 가계와 기업 역시 지출을 줄이면 고용과 이윤을 감소시키고 이것이 다시 지출 축소 행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야말로 두려움이 현실을 악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두려움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한쪽 방향으로 선별이 일어나 그것을 확산시킴으로써 글로벌 경제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경제는 갈수록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급변이 빈발하고 있다. '뉴턴표' 경제학은 이제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진화론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설명하는 적합한 패러다임이다. 이것이 경제위기의 순간에 다윈을 찾는 이유이다. 이제는 경제학의 기초에 진화론이 들어와야 한다. '다윈표' 경제학이 부상할 때가 된 것이다.



<3> 선악(善惡) 없는 사활 건 대결구도 보여줘

문학에 끼친 영향

정과리·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 현대 여성의 생존경쟁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다윈 진화론에 따르면 생존경쟁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는 것이다. 조선일보 DB 사진
1980년 노벨상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미워시(Milosz)는 "만물에게 공통된 이치"를 밝혀낸 다윈의 공적을 기린바 있다. 자연과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를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의 삶에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정신의 기름을 주유(注油)하게 되었다. 변화가 진리라면 존재의 불완전성은 불행이라기보다 차라리 특권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 볼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윈은 "비비원숭이가 철학자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했다. 먼지 덩어리에서 아메바를 거쳐 영장류로 커지다가 마침내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 감히 불멸을 꿈꾸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시각각의 삶은 온통 경이로운 변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다윈의 생각은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진화론과 문학은 특히 두 측면에서 만난다. 우선, '적자생존'의 측면. 다윈이 '악마의 신학'이라고 부른 진화의 무대는 권선징악의 무대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살아남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싸우는 무대이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것도 다 절실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통찰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주인공과 그의 적을 동등하게 대접하고 그 둘 사이의 치열한 대결을 핍진(逼眞)하게 그린다. 그럴 때만이 주인공은 자신의 덕성에 안주하지 않고 책임과 능력을 몽땅 바쳐 상황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다음, 분자생물학은 진화를 '적응'이 아니라 '우연'과 '돌연변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했듯, "진화의 결과는 그 원인 시점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우연과 돌연변이는 인간의 상상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 변종은 기형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변종이 오히려 정상이다. 인간의 몸에 낯선 요소들이 추가됨으로써 인간은 점차로 포스트-휴먼으로 바뀌어간다.

포스트-휴먼의 등장과 더불어 문학적 상상력은 폭발한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비롯해, 우리는 인류의 육체적 변화를 맹렬히 탐구하는 작품들로 포화되어 있다. 다른 한편 첨단 과학으로 인류를 조작하고 관리하는 '생명관리공학'을 경고하고 반성케 하는 문학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모형을 제공했다면, 오늘의 문학은 그 지배체제 자체가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다다른 상황을 자주 그린다. 최근의 화제작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얼마간은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

문학적 상상은 진화론의 발전에 따라 더욱 천변만화하며, 역으로 진화론의 과학적 진보를 위해 새로운 힌트를 제공한다. 다윈의 착상에 직접 영감을 불어넣어준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인 시인 에라스무스 다윈이었다. 진화론과 문학은 직계가족이다.

시인이던 할아버지가 진화론 영감 줘

▶다윈과 문학
생명과 종의 변화에 대한 생각은 이미 그리스 시대의 아낙시만드로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생각에 직접 영감을 준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이었다. 의사이자 동시에 시인이었던 에라스무스 다윈은 당시 과학의 대중화를 가장 앞서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손자에 앞서, "세계는 아주 미미한 것으로부터 발생해 고유한 활동에 따라 점차적으로 성장하여 위대해진다"(《주노미아 혹은 유기적 생명의 법칙》)는 다윈 진화론의 근본 원리를 설파하였다. 또한 《식물들의 사랑》에서는 린네의 분류에 따라 암술과 수술의 다양한 사랑 행위를 묘사하였다. 이처럼 그의 시는 대부분 자연의 법칙을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4> 신은 어떤 존재인가

"창조냐 진화냐" 넘어 "종교도 진화의 산물" 주장

장대익·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다윈 무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이 성당에 묻힌 것은 흥미롭다.
장례식이 진행 중인 무덤 앞에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젯밤 생사의 기로에서 숨을 헐떡이는 어린 딸의 소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그였다. 그는 한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고, 신앙인인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숨졌고 그는 사랑하는 딸을 빼앗아간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찰스 다윈, 그에게 신의 존재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꾼 과학자 중에서 다윈만큼 종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 이도 드물다. 그는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이 문제와 씨름했다. 창조론이 대세였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그의 생각은 이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장롱 속으로 숨어버렸다. 비밀공책에 "신에 대한 사랑이 단지 두뇌 작용의 산물일지 모른다"고 끼적였고, 후배와의 편지에서는 자신이 마치 살인을 자백하는 자처럼 느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낙인 찍히는 게 두려웠던지 《종의 기원》 2판부터는 '창조자에 의해'라는 구절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는 "마흔 살에 기독교를 버렸다"고도 했지만, 드러내놓고 무신론을 옹호한 적은 없었다. 대신 하루에도 수십 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택했다.


도대체 왜 진화 혁명을 이끈 다윈마저도 신의 언저리를 맴돌았던 것일까? 혹시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유전자나 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신앙을 가진 이가 진화 역사에서 더 큰 이득을 봤기 때문에 여태까지 종교가 건재한 것은 아닐까?
최근 학계에서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종교 현상을 설명하려는 흐름이 두드러지고 있다. 신을 믿는 행위 자체가 독 있는 음식을 피하는 행위처럼 하나의 적응적 행동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인간이 우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과(因果)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을 진화시키다 보니 신을 최종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다는 입장도 있다. 이 두 입장에 따르면 신은 인간과 공동 운명체다.

하지만 유신론적 종교가 박멸되어야 할 '정신 바이러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의 과학자 도킨스는 저서 《만들어진 신》을 한 손에 들고 '신이 있다는 망상'으로부터 인류가 탈출해야 할 이유를 역설한다. 그는 자신의 복제만을 위해 인간 숙주를 무차별 공격하는 감기 바이러스를 보라고 말한다. 종교도 그 자체만을 위해 작동하는 정신 바이러스일 뿐이라는 것이다.
▲ 영국 런던에 이어 스페인으로 확산된 무신론 버스 광고.‘ 아마도 신은 없을 거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라는 문구가 스페인어로 적혀 있다. /DB사진
물론 종교를 통해 삶의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이들에게는 황당한 얘기다. 하지만 체제 유지에 급급한 제도권 종교와 광기 어린 신앙으로 시끄러운 우리네 상황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이처럼 종교와 진화론의 접점이 최근에는 단지 '진화냐 창조냐'라는 해묵은 논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 현상 자체를 진화론적 관점으로 해부하려는 시도들로 진화해 가고 있다.

● 현대 진화론의 두 목소리

"종교, 과학과 다른 영역" "神은 인간 이후에 탄생"

다윈의 후예들이 종교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도킨스와 함께 현대 진화론 계보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굴드(1941~2002)는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말한다. 요컨대 과학은 '사실'의 영역,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에서 봉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진화론과 종교는 애당초 충돌할 이유가 없다.반면 도킨스는 신의 존재 여부가 과학의 문제라고 되받아친다. 세계관을 가진 유신론적 종교가 어찌 '사실의 문제'에 함구하고 있겠냐면서 과학자의 눈으로 유신론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 비판 중에서, "신이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라면 인간의 진화 이후에야 나온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압권이다.하지만 이들이 종교에 관해 합창하는 대목도 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사이비라는 데 두 사람 모두 동의한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