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영어교과서 달달 외우고 늘상 공부하는 아버지 등 보며 자라


세상에서 제일 쉽고 편한 일은 공부였어요

"영어교과서 달달 외우고
늘상 공부하는 아버지 등 보며 자라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56·) 교수는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영어교과서의 대표저자다. 생후 한 살 무렵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불편하지만 신체적 어려움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책을 읽게 만들었고 '언어적 감(感)'에 일찍 눈뜨게 했다.

선친인 영문학자 장왕록(前 서울大 명예교수·1994년 작고) 교수와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살아 있는 갈대' 등을 공역한 일도 있다. 또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톰소여의 모험' 등 수필집과 번역서를 펴내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문학의 숲(聖林)'의 안주인이다.

기자는 지난 2006년 5월 월간조선에 재직할 무렵,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열공특강'을 진행하며 다시 만났다. 암투병 탓에 많이 야위어 보였다.

"저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살아남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천만다행인 것은, 이 세상에서 허락된 단 한 가지 일이 바로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쉽고 편한 일이 공부라고 생각했죠."

학창시절, 장 교수는 늘 반에서 1, 2등을 다퉜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성적관리 잘하는 '아주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어차피 신체검사에서 떨어질 것을 왜 구태여 시험을 보느냐'는 식이었다. 선친은 이 학교, 저 학교 찾아다니며 탄원하는 것이 일과였다. 당시 선친이 서울대 사범대 교수인 덕에 겨우 서울사대부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3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를 포함, 모든 대학들이 그녀에게 입학시험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선친은 여러 대학을 전전한 뒤 당시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던 브루닉 신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제발 딸이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신부는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선친은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서강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과 같아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바로 원석을 연마해 보석을 만드는 일이죠. 여기저기서 돌멩이라고 차버리는 장영희를 서강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이지요."

선친이 영문학자이니 당연히 영어를 잘했을 법하지만 장 교수는 아버지께 영어를 배워본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선친은 늘 학교일로 바빴고 6남매를 키우기 위해 번역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실 그 자체셨지요. 제게 한번도 공부하라 말씀하신 적은 없었지만 몸으로 실천하셨어요.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의 등짝을 보고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 방이 두 개밖에 없었을 때 저희는 늘 아버지가 공부하시는 안방에서 놀았어요. 그러면 아랫목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두고 뒤돌아 앉으셔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뭔가를 계속해서 읽고 쓰고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은연중에 '인간은 태어나면 저렇게 공부를 하는 게 본연의 모습이로구나' 생각하며 자랐지요."

그녀는 이런 기억도 떠올렸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일입니다. 펄 벅의 '대지'를 번역하시면서 끝없이 교정을 보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언니·오빠가 원고 정서에 매달려 정신이 없었어요. 그때 심심해 하는 제게 등장인물인 '오란' '왕릉' 등 몇 개의 이름을 적어주면 저는 흉내내어 그 글자를 써 보곤 했어요. '대지'를 비롯해서 스무 권에 가까운 펄 벅의 작품을 번역하셨던 아버지 덕에 펄 벅은 이웃집 할머니처럼 친숙한 이름이었지요. 훗날 제가 영문학도가 돼 원서로 읽은 첫 작품도 '대지'였어요."

'구둣방 아들이 맨발 벗고 다닌다'고, 그녀는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알파벳 대소문자를 아는 정도였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영어학원이나 과외를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영어성적은 언제나 잘 나왔다.

"무조건 교과서를 외웠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영어교과서는 'This is a book. That is a pen'으로 시작했지요. 중1 교과서 첫문장부터 고3 마지막 연습문제까지 암기했고, 그것이 제 영어의 기초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글이나 시를 보면 따로 적어 놓고 암기를 했지요. 말하기도, 글쓰기도 처음엔 '모방'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남이 쓴 말을 반복하고 남이 쓴 좋은 글을 자꾸 읽다 보다 보면, 영어적 '센스'가 생기지요."

그녀는 말하기의 유창성만 강조하는 세태를 꼬집으며 "문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은 영어교육에 역행하는 것처럼 인식돼 안타깝다"고 했다.

"영어교과서를 쓸 때 늘 지키려는 원칙이 있습니다. 본문내용이 학생들의 지식과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과 문법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요즈음은 너무나 말하기를 강조해서 유창성만 얘기해요. 하지만 영어로 말을 잘하면 배낭여행 갈 때는 도움이 되겠지만, 고급정보를 표현하거나 유학을 해서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은 결국 글쓰기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영어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언어를 배우는 데는 왕도가 없지요.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영어에 노출이 되는 게 중요하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자신이 한 달 동안 열심히 했는데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생각해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늘게 마련입니다. 하루 한 문단이라도 영어로 된 좋은 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책을 덮고 그 글을 기억만으로 다시 써보고, 원문과 비교해 보는 것도 글쓰기의 좋은 연습입니다."

장 교수는 현재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누구나 늙어지면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다고 하지요? '좀 더 참을 걸, 좀 더 베풀 걸, 좀 더 즐길 걸' 이랍니다. 더 늙기 전에 나중에 후회를 덜 하도록 좀 더 참고, 좀 더 베풀고, 좀 더 삶을 즐기는 법을 연구하는 색다른 '연구년'을 만들려고 하지요.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가르칠 수 있다면 아주 중요한 공부가 아니겠어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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