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외계인이 우리 존재 알고 있다면?

우리는 흔히 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머리 속에 떠올릴 때 우리 쪽에서 뭔가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하지만 양쪽의 만남에서 늘 우리가 아쉬운 쪽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외려 우리보다 외계인 쪽에서 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커뮤니케이션 하려는 의도가 강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이럴 경우에는 양자의 소통이 한결 쉬워질까 하는 점이다.
존 스칼지(John Scalzi)의 ’조의 이야기 (Zoe’s Story; 2008년)’에 등장하는 오빈 종족은 이러한 물음에 힌트를 던져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오빈들은 점진적인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외부 개입으로 단번에 높은 지능을 갖게 된 외계인들이다.
아서 C. 클락의 ’2001년 우주 오디세이; 1968년’에서 300만 년 전 고도지성의 외계인들이 지구에 찾아와 짐승 수준의 호미니드를 지성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로 단번에 가속 진화시켰듯이, ’조의 이야기’에서는 ‘콘수’라 불리는 선진 외계종족이 어느 가스행성의 작은 달에 사는 하등 짐승들에게 유전자변형을 통해 높은 지능을 부여했으니 이들이 바로 오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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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칼지의 ‘조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외계종족 오빈의 모습. 과학기술은 매우 발달했지만 감정이 없이 공허한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문화를 만들기 위해 오빈들은 인간 소녀 조에게 집착한다. 그 결과 오빈들은 인류의 모든 문화와 정신적 가치들을 조의 시선을 통해 걸러서 받아들이게 된다. (source: Tor Books)
문명을 일으킨 오빈들은 마침내 우주에서 아무도 얕볼 수 없는 강성한 힘을 보유하게 되는데, 그 근본 비결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빈은 지능은 높지만 감정이 없다. 그래서 두려움도 모른다. ’2001년 우주 오디세이’의 이름 모를 외계인들은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며 지능만 높여주었지만, 오빈은 워낙 하등동물이었는지 콘수들은 오빈에게 풍부한 감정까지 주지는 못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오빈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바는 자신들을 최강의 전투종족으로 만들어준 감정의 백지상태를 졸업하고 다른 지적 생물들처럼 개체로서의 자의식을 얻는 것이다. 오빈이란 명칭 자체가 (의식을) ‘박탈당한 자들’이란 뜻이다. 한 마디로 영혼이 빠진 피노키오라고나 할까.
오빈들의 행동양식은 타 종족들이 보기에 거의 기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빈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놀라운 지성과 전투능력을 겸비한 우주 최강종족 중 하나지만 개체의 의식이 모여 의미 있는 총합을 만들어내지 못하다 보니 문화적으로는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지적으로 뛰어나다한들 이성(理性)만으로는 반쪽짜리 생명이라 절감하기에 오빈들은 인공적으로라도 의식을 넘겨받을 수 있다면 종(種)의 명운을 걸고 어떤 대가든 치를 태세다.
오빈들이 과학자 샤를 부탱과 그의 딸을 제외한 인간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버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지켜주지 않은데 분노한 이 인간 과학자가 인간이란 몹쓸 종을 죄다 없애주면 오빈들에게 개체마다 의식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빈들에게는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기 전에 샤를 부탱 박사가 죽고 만다. 이제 남은 대안은 그의 딸 조이와 늘 함께 하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고등유기체의 감정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길뿐이다. 조이의 보호자를 자임하는 두 오빈  히카리와 디코리는 일상에서 그녀가 겪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고향행성의 모든 오빈들과 고스란히 공유함으로서 느리기는 하지만 천천히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나간다.
오빈들의 사례에서 보듯, 인간의 감정을 영작문 단어 외우듯 꼼꼼히 배워나갈 정도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외계인들이라면 우리와 의사소통하는데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이질적인 쌍방 간에 의사소통 성공의 관건은 상대방의 언어를 숙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상대방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절실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입장에서 오빈 같은 외계인 유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인간보다 높은 과학기술수준을 지녔지만 문화적으로는 척박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감정 없는 존재들의 내면세계는 과연 어떠할지 상상이 가는가? 만약 오빈 같은 존재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루고 나아가서 행성 단위 생태계를 이룬다면, 이들의 우주 진출은 인류를 포함한 다른 외계 종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아울러 반대로 오빈 종족 자신은 다른 종족들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을까? 우리가 오빈과 같은 처지인양 마음을 비우고 어떤 외계인 종이든 상대방에 관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커뮤니케이션 성과가 훨씬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
광고판 E.T.
펩시콜라 광고에 등장한 외계인. 영화 가 크게 히트했을 때 방영된 패러디다. 외계인에 대한 상상은 역사시대 초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존재가 단지 사회풍자의 대상이 아니라 실재 존재할지 모른다는 개연성을 두고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전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다. 천문학과 생물학 그리고 우주론에서의 지속적인 발달은 이 우주에 지구만 생명의 충만한 유일한 곳이라는 독선을 버리게 했다. 아울러 과학소설과 SF컨텐츠들은 이러한 생각이 대중문화 속에 널리 스미게 하는 기폭제 노릇을 해왔다. (source: Pepsi)
이제 연재를 오므릴 시간이다. 이제까지 과학소설들이 열거한 인간과 외계인의 커뮤니케이션 장벽들과 나름의 해법들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공감하는가? 나아가서 이러한 예시들이 실제로 얼마나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일찍이 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한 가지 기준을 내놓은 바 있다. 양자 간의 기술문명 격차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연재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1971년 아르메니아의 뷰래컨에서 열린 외계지성 학술대회에서 추산된 바에 따르면, 우리보다 기술문명이 천년 이상 앞선 상대와의 쌍방향 통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기준 역시 실제 외계인을 표본 집단에 포함시키지 못하는 한 과학자들의 자의적인 추론에 불과하다.
다만 천년이란 기술문명 격차의 상한선이 유효하다면, 동시대에 존재하는 고만고만한 기술문명들 간의 실질적인 조우가 얼마나 천문학적으로 희귀한 확률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우주 깊숙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정말 외계인들과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구체적인 상대가 손짓발짓하면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휴머노이드 외계인 유형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심지어 우리가 그러한 존재들과 만나고 있다는 자각을 미처 하지 못할 만큼 뜻밖의 상황에서 조우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규소생물과 극저온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 에너지 생물 그리고 우리와 물리적 상호작용이 쉽지 않은 암흑물질로 신체가 구성된 생물 등에서와 같이 우리의 상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기이한 외계인들이 얼마든지 존재할지 모른다. 심지어 생각하는 바다와 행성 그리고 성운 같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지적 존재들은 우리 인간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기회가 설령 생긴다 하더라도 동문서답하거나 프레드 호일(Fred Hoyle)의 ’검은 구름 (The Black Cloud; 1957년)’에서처럼 우리를 한낱 미물 따위로 여긴 나머지 대응조차 귀찮아 할지 모른다.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과학소설에서의 상상이 현실의 물리세계에서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사고실험들은 인류가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앞으로도 얼마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가를 암묵적으로 시사한다는 점에서 외계인의 실재여부와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 하겠다.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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