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知人의 3가지 핵심, 中·誠·庸

中·誠·庸이란 - 목표 한가운데 맞히려 열렬하게 애를 쓰고 그 자리 지키려는 것
'대학연의'의 통찰 -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의지가 있고 없음이 사람을 가르는 기준



적어도 '논어'의 범위에서는 배운다[學]고 하면 문(文), 즉 애씀이나 애쓰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그래서 '논어'에서는 묻고 배우는 학문(學問)과 달리 늘 애씀을 배우는 학문(學文)이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지를 알아냈다고 해서 학(學)을 둘러싼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크게 보면 두 가지다. 배움의 뜻이 자발적이어야지 주변의 강압에 의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배우려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자처럼 뛰어난 스승이라도 아무런 가르침을 전할 수 없다. 이 점은 공자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 배우지 못해 애태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가르칠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저자 진덕수에 따르면 여기서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도 당연히 사람을 알아보는[知人] 실마리가 되는 개념이다. 참고로 여기서 애태우는 마음이라고 해서 징징거리거나 안달복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딴 길로 샌다. 어떤 일에 임할 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자신의 뜻을 다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스스로 배우려는 열의로 가득 찼다고 해도 배움의 방법을 모른다면 결국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는 애씀이나 애쓰는 법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공자는 '논어'에서 배움의 길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다.

'대학衍義 리더십' 삽화

"배울 때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혹시 겨우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 굴러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여기서는 불가피하게 원문의 일부를 살펴봐야 뜻이 분명해진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불급(不及)이고,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은 실지(失之)다. 배울 때에는 정확히 원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한번 이르렀으면 다시 원위치로 굴러떨어지지 말고 그 지점을 잘 지켜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기존 한문 번역이 만들어놓은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중용(中庸)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연히 균형, 가운데 정도로 이해하면서 좌와 우의 중용을 취한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한다. 오역이다. 중용(中庸)은 명사가 아니라 중(中)하다, 용(庸)하다라는 두 동사다. 중은 가운데 중이 아니라 화살로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힌다고 할 때의 그 중(中)이다. 용(庸)은 상(常)이다.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말이다.

눈 밝은 독자는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실 사람을 아는 것보다 글을 아는 것은 훨씬 쉽다. 글은 눈에 드러나는 것이고, 사람을 아는 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하고 용하다.' 그렇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배움[學]이 그것이다. '중하고 용하다'는 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中]이고, 또 (혹시 겨우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 굴러떨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庸]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不及]도 안 되고, 그것을 지나쳐서도[過] 안 되고, 정확히 원하는 목표 지점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중하는 것이다. 참고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지나침이나 모자람은 둘 다 목표에 적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용(庸)은 말 그대로 그것을 일정하게 잘 유지해 놓쳐버리지[失之] 않는 것이다.

'중용'이라는 책이 사서(四書) 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도 중하고 용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적당히, 균형, 좌우의 가운데 운운하는 중용의 용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중용'이라는 책은 아주 짧은데 그중 3분의 1은 중하고 용하는 것을 풀어내는 것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온통 열렬함에 가까운 성(誠)을 강조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성실, 정성보다는 열렬함이라고 할 때 그 뜻에 가깝다. 중할 때도 열렬하게 해야 하고, 용할 때도 열렬하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거나[不及] 다시 놓쳐버린다[失之]. '중용 20장'의 한 구절이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할 일이다."

기본 바탕[質]은 남보다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열렬하게[誠] 남보다 열 배가 아니라 백 배 애를 쓴다면[文] 못 해낼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백 배 애를 쓸 때 누구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中] 그것을 잘 유지할 수 있다[庸]. 문질(文質) 배움[學]에 이어 당연히 중하다[中] 용하다[庸] 열렬함[誠]도 진덕수가 강조하는, 사람을 알아보는[知人] 핵심 개념들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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