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윤리적 자원을 잘 활용하자

윤리와 도덕은 어떤 다른 철학적 종교적 명제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다. 종교적 가르침이 도덕과 윤리를 훼손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SF 작가이자 미래학자인 아서 클라크는 “이 시대의 최대 비극은 종교가 도덕을 납치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손봉호 고신대학 석좌교수 ⓒScience Times
그러나 종교는 분명 사람들을 도덕으로 이끄는 중요한 윤리적 자원이다. 우리의 관심 속에서 점차 사라지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마련한 석학인문강좌가 21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손봉호 고신대학 석좌교수(철학)는 현대사회에서 도덕과 정의확립을 위한 시도로 ‘윤리적 자원’이라는 주제를 갖고 그의 세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손 교수는 무엇보다 도덕성 회복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음은 손 교수의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도덕성 회복 위해 윤리적 자원 활용하자
물론 여기서 제시하는 것 외에도 역사적으로 물론 수많은 윤리이론들과 의견들이 제시되었고 그것들에 대한 찬, 반 논의들이 다양하게 이뤄졌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인류의 항구적인 유산으로 남아서 두고두고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설득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이론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윤리적 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경험과 지혜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원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하고 이용하여 개인들과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향상하는 것이 윤리학이 감당해야 할 임무일 것이다.

그런 자원들과 제안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론적으로 좀 엉성하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윤리적 실천에서는 그런 것에 너무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모두 한 가지 이론에 근거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이론이나 주장에 설득 당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원칙을 무시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그런 것이 주로 비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용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 강의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자원 몇 가지를 골라 논의하고자 한다.

윤리적 규범들 상당부분이 종교에 뿌리를 둬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역시 종교였고 사회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상당할 정도로 행사하고 있다. 전 인류가 수용하고 따르는 윤리적 규범들과 가치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매킨타이어(A. Macintyre)가 오늘날 보편적 가치로 존중되고 있는 기본인권 사상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세속화 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당시 사람들이 추종하고 있었던 도덕을 ‘노예도덕’(Sklavenmoral)이라 불렀고 그것은 유대-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는 비록 그 주민들의 신앙적인 열정이 그렇게 강하지 않더라도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윤리의 성격과 수준을 상당할 정도로 결정한다. 서양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중동에서는 이슬람교가,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윤리를 포함한 가치관을 결정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속종교와 조선조에 지배적이었던 유교가 아직도 우리의 가치관과 행위방식 형성에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한 번 형성된 가치관은 비록 그 종교의 세력이 약해지고 사회가 세속화되어도 그렇게 쉽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론 자연과학의 발달로 세계 문화가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마법에서 벗어나고’ (Entzauberung)) 있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력은 과거와 같이 크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이 세계 문명을 기독교권, 이슬람권, 불교권, 유교권 등으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종교의 유산이 아직도 상당할 정도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종교인구가 전체의 59%로 무신론자를 포함한 비종교인보다 많다.

도덕적 질서를 위한 종교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종교가 차세중심적 (此世中心的)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 있다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지금의 세상을 전부로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유교가 과연 종교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성적인 사고는 중요한 윤리적 자원이다.
구체적인 개인과 사회의 윤리문화에 실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종교와 종교에 바탕을 둔 관습이나 전통이었다면 윤리 이론에 가장 많이 동원된 윤리적 자원은 이성이었다. 한 때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을 동일시 한 때도 있었다.

▲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했다. ⓒ위키피디아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학문이 종교를 대체한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성이 신을 대체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종교는 사라져도 윤리는 불가결하므로 윤리에서는 이성이 신의 자리에 서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다 할 수 없다.

서양 사상에서 이성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었다. 가장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이해는 이성이란 논증적 (論證的, discursive) 사고능력이란 것이다. 주어에 함의된 것을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는 분석적 판단의 능력이며 수학적 계산과 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가끔은 이성이 불변하는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으로도 이해되었다. 전제에 함축되어 있는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이성이지만 전제가 참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 전제가 참이란 것을 보증하는 것도 역시 이성이란 믿음이 서양 사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직관적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A=A를 참이라고 보장할 수 있다.

나아가서 서양 사상에는 이성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란 생각도 상당할 정도로 깔려 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구별하는 능력을 건전한 상식, 혹은 이성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자존심이 있어야 윤리적인 판단도 선다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산다.”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존심은 있다.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자존심이 있고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히고 목숨까지 내 놓으면서도 명예를 지키려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자존심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자존심이 결여되면 정상적인 생활뿐 아니라 생존의욕도 위축된다. 이렇게 중요한 자존심과 자존심의 요구는 매우 중요한 윤리적 자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람에게 어느 정도라도 자존심이 있으면 우선 비겁하고 야비한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에 “배운 사람(識者)이 착한 사람(賢者)”이란 생각이 생겨난 것도 배운 자가 자신과 사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이 좀 더 많기 때문이다.

서양 전통에서는 쉽게 겁을 먹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것 못지않게 강자에게 약하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용기라 하여 높이 평가하고 따라서 비겁함은 매우 역겨워한다. 동양문화에서는 용기에 대한 찬탄과 비겁에 대한 역겨움이 상대적으로 약하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자존심이 매우 중요한 윤리적 자원일 뿐 아니라 그런 자존심의 형성도 윤리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자존심이란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중요하지만 그 평가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이뤄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기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큰 돈, 명예, 권력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정심, 그리고 위선도 윤리적 자원이 된다
맹자가 인성이 본래 선하다고 주장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보고 건져내어 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런 동정심이 있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심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실제로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고통당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훨씬 더 강한 동정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의 경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인격적 자원이 될 수 있다.

타자중심적 윤리에서는 위선(僞善)도 도덕적 자원으로 인정될 수 있다. 주체중심적 윤리에서는 위선은 그 자체로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역겹고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악하기는 하지만 위선적이기 때문에 그 악한 동기가 노골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 있고 그 때문에 타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그만큼 줄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위선도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할 수 있다. 속마음과 숨은 동기는 그렇게 깨끗하거나 고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행동하면 사회에 악이 넘쳐나는 것이 어느 정도 저지될 수 있고, 그것에 속아서 다른 사람도 도덕적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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