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개교 10주년 맞는 '예비 의사 양성' 거창국제학교

고교 학력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진 경남 거창에는 독특한 대안학교가 있다. 글로벌 의학 영재 교육을 표방하는 거창국제학교다. 이 학교 함승훈(60) 이사장은 서른넷에 아내와 사별하고 27년을 홀아비로 살아왔다. 그가 혼자 키운 두 아들은 한국과 독일에서 의사가 됐다. 그런 자식 농사 경험과 오랜 유학·교수 생활을 바탕으로 10년 전 만든 게 거창국제학교였다. 이 학교 입학생은 전원 헝가리 국립 데브레첸 의과대학에 진학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받는다. 약 10%가량이 성적 미달 또는 개인 사정으로 다른 길을 갈 뿐, 나머지는 전부 헝가리 의대에 진학한다.
헝가리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3명 배출하고, 국경 마을 쇼프란은 '임플란트의 도시'로 유럽 의료 관광객을 상대로 1조원을 버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거창국제학교 교정에서 함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거창국제학교에서 길러낸 나의 또 다른 자식들이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글로벌 NGO를 만들어 세계 구석구석에 귀한 의술을 펼치는 국제 의사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눈가가 촉촉해졌다.
오는 3월 1일 개교 10주년을 맞는 거창국제학교의 함승훈 이사장(가운데 안경 쁜 사람)과 재학생들. 함 이사장은 "의사는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좋은 직업이자 세계 곳곳에 수요가 많은 직업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의사 되기가 너무 힘들다"면서 "환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골라 글로벌 무대를 누비는 훌륭한 의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부인과 사별한 그는 혼자 아들 둘을 키워 한국과 독일 의사로 만들었다. /김종호 기자
醫大갈 점수가
조금 모자라도
열정이 있다면
훌륭한 의사 될 수 있어
―유학, 교수, 학교 이사장… 교육과 인연이 많군요.
"아버지 고향이 이북입니다. 증조할아버지가 함경남도 홍원군에 보통학교를 세웠고 할아버지도 이사장을 했어요. 교육자 집안인 셈입니다. 가족들이 1·4 후퇴 때 흥남에서 배 타고 피란 왔답니다."
―어려서 유학을 갔던데.
"한국에서 독일인학교를 다니다 고교 과정부터 독일에서 했어요. 도르트문트 공대 도시공학과를 다녔습니다. 석사·박사학위 모두 그곳에서 땄지요."
―사별한 부인은 독일에서 만났습니까.
"아니요. 한국에서 유학 준비 중에 알게 됐습니다. 이후 아내는 데트몰트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장인이 가난한 유학생이 뭐 볼 것 있느냐고 결혼을 반대해서 연애만 7년 했습니다."
―부인을 무척 사랑하셨던 모양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내가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이었지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한국말로 얘기하고 같이 밥 먹고 하는 순간들이 너무 행복했었습니다."
1983년 결혼한 함 이사장 부부는 맏아들 창화(31)와 둘째 창수(29)를 낳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짧았다. 결혼 6년 만에 부인은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충격이 컸겠습니다.
"1989년 겨울이니까, 제 박사 학위 1년 정도 남았을 무렵입니다. 학업을 마친 아내가 아이들과 먼저 귀국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아내가 귀국 전날 배가 몹시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근처 독일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 같다고 했는데, 한국 가서 정밀진단 받아보니까 위암 말기라는 겁니다. 서른두 살 젊었던 만큼 암 진행 속도도 빠르더군요. 이듬해(1990년) 2월 28일 숨을 거뒀습니다. 제 생일이었지요."
 
재작년 헝가리 데브레첸 국립 의대를 졸업한 함창화(왼쪽)씨와 함창수(오른쪽)씨로 함승훈(가운데) 이사장의 두 아들이다. /거창국제학교 제공
어머니 없지만 강하게 키워
보호자 없는 5세·3세 아들이
직접 독일로 오기도
재혼 포기, 아들 둘 직접 키워
―두 아들이 다섯 살, 세 살 때군요.
"아내가 죽자 저는 어른들과 엄청 다퉜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화장(火葬)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땅에 묻으면 더 아내를 잊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어른들은 재혼을 염두에 뒀던 것입니다. 남자 혼자 어떻게 아이 둘 키우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요?
"아내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든 제겐 너무 가혹한 요구였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라는 권유엔 화가 나더군요.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 키우자고 재혼하면 그 여자는 보모나 가정부밖에 더 됩니까. 재혼할 여자에게도 미안할 일이고 죽은 아내에게도 면목없는 짓이지요. 화장도 안 되고 재혼도 안 된다고 버텼더니 부모님이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시 제 능력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벽제공원묘지였습니다. 우연히도 아내와 처음 만난 곳도 벽제공원묘지 인근 외국인 학교였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학위가 급했던 제가 먼저 독일로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계속 부모님에게 맡겨둘 수 없더라고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양육 방식에 원칙도 없고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이 응석받이로 자라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힘으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독일로 데려왔나요?
"어른들이 완강하게 반대했지요. 하지만 제 뜻이 워낙 확고해 독일로 애들을 데려다 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것도 싫었습니다. 엄마 없이 아빠 혼자 키우게 됐으니 아이들도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이 둘만 비행기 태워 보내라고 했어요."
―독한 아버지였군요.
"'보호자 없는 어린이' 카드를 목에 건 다섯 살 창화가 세 살 창수 손을 잡고 김포공항 출국장 안으로 방금 들어갔다는 동생 전화를 새벽에 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입국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얼마나 초조하던지, 무모한 짓 한 건 아닌지 별별 생각 다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승객 다 나오는데 아이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지요. 잠시 후 공항 탁아소에 아이가 있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어찌나 기쁘던지."
―두 아들과의 독일 유학은 어땠습니까.
"사정이 딱해 보였던지 지도교수가 작은 연구실을 내줬어요. 작은 원룸에서 아침밥 해 먹이고 아이들을 학교 연구실로 데려왔습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교수님들이 집에 있던 장난감을 잔뜩 갖다 주고 그랬습니다. 집중이 필요한 공부는 아이들 일찍 재우고 새벽에 했지요." 
 


재혼은 왜 안 했습니까.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아내와 함께했던 지난 일들이 너무 또렷해 도저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추억력'이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이유는 아이 양육에 대한 제 나름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흔히 아빠와 엄마가 각각 50%의 정성을 들여 자식을 키웁니다. 저희 가정은 50%가 사라졌지요. 하지만 새로운 여자가 오면 저의 50%마저 아이들에게 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가정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20%를 더해 70%를 아이들에게 주자고 생각했지요. 모자란 30%는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승훈 이사장과 재학생들. 
재혼 않고 키운 두아들이
한국과 독일서 의사로 성장
"나눔과 베풂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함 이사장은 박사 학위를 받고 계명대 건설시스템공학부 교수가 되어 두 아들과 귀국했다. 교수 시절엔 학교 앞에 집을 얻어 첫째는 초등학교로, 둘째는 어린이집으로 등교시키고 출근했다. 점심 시간엔 다시 집으로 가서 두 아들 밥 챙겨 먹이고 연구실로 데려왔다고 한다. 이웃 아줌마들은 '한참 손 많이 가는 애들을 어떻게 키우느냐'고 놀라워하지만, 그는 "알아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가방 챙기고 방 청소하는 등 아이들 스스로 엄마의 공백을 메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모습을 지켜본 그는 도저히 수험생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어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두 아들은 독일에서 중등 과정을, 영국 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치고 헝가리 데브레첸 의대로 진학했다. 맏아들은 한국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현재 고려대병원 인턴으로, 둘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있다.
―자식 의사 만든 '바짓바람'이 거창국제학교의 밑거름이 됐군요.
"전 세계적으로 의사 수요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극소수 학생에게만 의사의 길을 열어 놨습니다. 의학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창의력을 발휘하기보다 이미 완성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니까요. 영어 수학 점수 좀 모자라도 남에게 애정과 관심 많은 아이가 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 국내 의대 진학 점수는 모자라더라도 열정과 꿈을 가진 학생을 받아 글로벌 국제 의사로 키우려고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17일 거창국제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있는 모습. 
왜 헝가리인가?

영어권 국가 학교보다
저렴한 학비로
영어교육 받을 수 있어

의대 교수진이
1년에 두 번 방문해
커리큘럼 점검
―거창국제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됩니까.
"2년 6개월 과정을 마치면 전원 데브레첸 의대와 치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의학기초과정 한국캠퍼스인 셈이죠. 데브레첸 의대 교수진이 1년에 두 차례 와서 학과목 커리큘럼 등을 꼼꼼하게 점검합니다. 생물·화학 등 중요 과목은 데브레첸 교재로 수업하지요.
―데브레첸 의대는 다른 나라에도 캠퍼스가 있나요.
"우리 학교가 유일합니다."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맺었습니까.
"두 아들을 여기 보내 보니, 의사 되고 싶은 다른 한국 학생들도 데브레첸 대학에 진학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본부에 찾아가 한국 인재들을 책임지고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도 황당해하다가 저의 계획을 들어 보더니 흔쾌히 허락하더라고요. 요즘은 데브레첸 교수들로부터 고맙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우리 학교 출신들이 다른 나라 학생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합니다."
―왜 헝가리 대학이었습니까.
"유럽에 있는 의대 중 영어로 강의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모두 자기 나라 말로 가르치는 대학뿐이죠. 하지만 헝가리 국립의대 4곳 모두 영어 교육 코스를 운영해요. 데브레첸 의대는 헝가리 대학 평가에서 늘 선두권이고, 졸업생들의 미국 의사면허시험(USMLE) 합격률도 90%에 이릅니다. 물론 영국 의대는 영어로 학생들을 가르치겠지만, 학비가 미국 의대처럼 너무 비쌉니다. 헝가리 의대는 미국 학비의 20% 정도지요. 노르웨이·독일·이스라엘 등 유럽 전역에서 유학생들이 몰린답니다."
―나라마다 의사 뽑는 조건이 다른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연합(EU)은 소속 국가에서 발급한 의사 면허를 공유합니다. 데브레첸 의대를 나와 헝가리 의사 시험에 합격하면 유럽 의사 자격을 얻게 되지요. 하지만 의사로 근무하려면 그 나라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프랑스 의사가 되려면 프랑스 어학시험에 합격해야 하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학교 출신들은 영어를 잘해 미국 진출에 강점이 있습니다. 현재 졸업생 3명이 미국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 진료하고 있지요. 다른 한 명은 미국 치과 의사가 됐고, 또 다른 한 명은 뉴질랜드에서 개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외국 의대 나온다는
나약한 마음 가지면
졸업하기 힘들어

실력의 절대평가 주의,
우수하면 월반도 가능

데브레첸 의대 졸업시
의료환경 열악한 곳에서
활동하길 권장해
글로벌 누비는 국제 의사 양성해야
―우리나라에선 의사 활동이 가능합니까.
"한국 의사가 되려면 미국처럼 의사국가시험(국시)에 합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외국 의대 출신들은 보건복지부 허가를 받아야 국시 자격을 줍니다. 재작년 보건복지부와 전문가 5명이 헝가리에 가서 실사했습니다. 우리나라 의대 수준에 미달하는 외국 의대엔 국시 자격을 주지 않습니다만, 데브레첸 의대는 무난하게 심사를 통과했지요."
―졸업생 중에 한국 의사가 있나요?
"올해 처음 국시에 응시한 4명 중 3명이 합격했습니다. 제 맏아들이 고려대 병원 인턴으로 갔고, 나머지 두 졸업생은 군의관 입대 예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자들에게 한국으로 올 생각 말고 미국이나 유럽 아니면, 아프리카 등 의료 환경이 열악한 나라에 가서 활동하라고 권유합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라는 거지요."
거창국제학교 전교생은 모두 60명이다. 한 학년 정원은 20명이고, 교사는 13명이다. 학생이 늘어나면 교육의 질이 떨어져 정원을 늘리지 못한다고 한다. 함 이사장은 "우리 학교는 공부 싫은 학생들이 가는 대안학교가 아니라 의사 되려고 공부하려는 학생만 오는 대안학교"라고 했다. 학생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의대 진학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보니 학생들을 상대 평가 하지 않고 일정 수준 학력 도달을 위한 절대 평가 방식으로 성적을 관리한다.
―어떤 학생들을 뽑습니까.
"중등 졸업 이상 학력자를 상대로 시험과 인성 면접을 봅니다. 데브레첸 의대는 졸업이 무척 어렵습니다. 유급·제적당하는 학생이 절반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우리 학교 출신 중에서도 열 명 중 한두 명은 유급이나 제적당합니다. '외국 의대 나와 의사 해볼까' 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온 아이들은 돌려보냅니다."
―조기 졸업 학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수한 학생은 과감하게 월반을 시킵니다. 저희 과정이 2년 6개월인데 1년 만에 졸업한 학생도 있습니다. 현재 스물세 살로 미국 의사자격시험 1차에 합격한 최현덕군은 8년 전 청심국제중학교에 다니다 자퇴하고 우리 학교에 찾아왔지요. 환자의 정신적 고통까지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야무진 의지에 반해 입학을 시켰습니다. 독하게 공부하더니 월반을 거듭했고 열여섯 살에 데브레첸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난민 돌보는 국제 의사가 되는 게 자기의 꿈이라고 하더군요."
―널리 알려진 학교가 아닌데, 어떻게 알고 찾아옵니까.
"주변 소개로 찾아오는 의사 학부모들이 많은 편입니다. 우리 학교엔 남매, 자매, 형제들이 전체 학생의 30%가량 됩니다. 첫 아이 입학시키고 몇 년 뒤 둘째 아이도 보내는 그런 가정이 많은 거지요. 다른 국제학교보다 학비가 비싸진 않지만 정규 학교보다는 학비 부담이 크다 보니 가정 형편이 대부분 넉넉한 편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너희는 축복받은 거다, 혜택을 본 만큼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입학이 불가능합니까.
"반드시 그렇진 않습니다. 지금도 재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몇몇 학생은 학비를 내지 않거나 아주 적은 비용만 부담합니다. 그 학생들은 저와 모두 계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돼서 학비를 갚되 제게 주는 게 아니라 장학금으로 기탁해 자기처럼 형편 어려운 후배들의 학자금으로 쓰자고 했지요."
거창국제학교는 재작년부터 엄홍길 휴먼재단에 의뢰해 네팔의 똑똑하지만 가난한 학생을 선발해 데브레첸 의대에 진학시켜 모든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3월 1일 개교 10주년을 맞는 이 학교의 교훈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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