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40년 서양철학에 천착한 철학자가 공자(孔子)에 빠진 이유

실존주의, 공자를 만나다 

 

생각의 나무들이 비록 모양은 각각 다르나, 하나의 숲속에 있는 똑같은 나무라는 걸 왜 모를까? 하이데거의 ‘세계’와 공자의 ‘천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공자의 ‘사람’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걸…!

‘철학사’라는 숲길에서 만난 모든 나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가다듬던 그는 공자라는 나무 앞에서도 그의 언어들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 언어가 보석처럼 빛났다. 진주알을 모으듯 공자의 그 가치들을 하나씩 가슴에 담았다. 50개가 모아졌다. 그것으로 하나의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책이라는 보석함에 담아 세상으로 내보냈다. <공자의 가치들>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하이데거에 천착했던 서양철학자 이수정 창원대 교수는 건너편 산기슭에 외외하게 서 있는 공자라는 나무를 만나 그의 가치를 소개하는 책을 쓰게 됐다. / 사진·중앙포토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40여 년 전, 18세? 19세? 그는 신록처럼 푸른 삶의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들어갔다. 숲이었다. 그곳은 참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괸 세계랄까? 시간이 빛으로 빛나는 세계랄까? 아무튼 시간의 종착지 그 너머였다. 그런 가운데 오직 그의 시간만 흘렀다. 알게 모르게 아주 천천히, 구름보다 더 천천히.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거목이 가득했다. 생각하는 나무들이었다. 그리고 말하는, 아니 말로 된 나무들이었다. 이파리 하나하나가 말을 들려줬다. 그 말들은 울림이 컸고, 진리의 향기를 뿜고 있었다. 백합향보다, 장미향보다 더 은은했다.

존재라는 별을 가리키는 하이데거와의 만남

▎‘철학’이라는 ‘직선의 길’에서 <공자의 가치들>의 저자 이수정 교수는 수많은 나무를 만나고, 바라보고, 멈추었고, 흔들렸다. 왼쪽부터 하이데거,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니체. / 사진·중앙포토
거기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이데거라는 나무였다. 엄청난 크기였다. 그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고, 정면으로 그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흔들렸다. ‘만남이란 그런 거란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마치 바람처럼 속삭이듯. 마르틴 부버였던가? 다른 나무들도 미소지었다. ‘나도 그랬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건 그 나무들이 아직 걸어 다닐 때였고, 시간이 흐르던 세상에서였다. 그렇게 아낙시만드로스는 밀레토스에서 탈레스를 만났고, 파르메니데스는 세상 끝에서 진리의 여신을 만났다. 특히 아테네에서 그런 만남이 많았다.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만났다. 그리고 키어케고어는 베를린에서 셸링을, 비트겐슈타인은 런던에서 러셀을,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을 만나기도 했다. 시간과 장소를 건너뛴 만남도 당연히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다. 모두 그렇게 만났고, 멈추었고, 바라보았고, 흔들렸다. … 그렇게 들었다.

하이데거라는 나무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 나무의 정령과 함께 사유라는 날개를 달고 존재라는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은 40년도 넘는 긴 여정이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리고 아마 그 자신이 그 숲의 나무가 될 때까지 계속될 운명적 여행이 되고 말았다.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그 의미를 묻고 있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집요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존재라는 단어 하나를 100권이 넘는 책으로 풀어냈다. 그것은 존재라고 하는 저 [아니, “이”] 유일절대적 세계에 대한 보고서랄까, 그 뒷골목까지 누비는 여행기랄까 그런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아는 모든 언어를 총동원했다. 그래서 그것은 참으로 다양한 말로 설명되었다. 시간, 현상, 사태, 진리, 세계, 퓌시스, 로고스, 트임, 자체적인 것, 단순한 것, 오래된 것, 위대한 것, … 그리고 발현(Ereignis). 하이데거는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재주가 비상했다. 탁월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언어 그 자체에 이름표를 달았다. 때로는 현상학, 때로는 해석학, 혹은 철학, 형이상학, 초월, … 그리고 사유. 그 모든 말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향해 발신되었다. 어두운 눈, 어두운 귀였다. 그것은 마치 모두 잠든 밤의 어둠 같은 무지였다. 하이데거의 생각과 말은 바로 그 ‘모두 잠든 밤’, 홀로 깨어나 어둠을 밝혀주는 ‘달’과 같은 것이었다. 존재라는 태양의 밝은 빛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그렇게 세 개의 갈래, 세 개의 ‘문제영역’이 있었다. 태양, 지구의 밤, 그리고 달. 그러니까 저 존재·시간·현상·발현… 등이 태양의 빛이었고, 존재망각·기술, 계산적 사고… 등이 지구의 밤이었고, 철학·현상학·해석학·형이상학·존재론·사유… 등이 바로 달이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라는 별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었고, 존재라는 선반 위의 꿀단지를 내리기 위한 사다리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라는 세계를 돌면서 그 모든 것을 공유했다. 존재란 참으로 놀라운 세계였다. “있다!”는 놀라운 이 현상! 그리고 그 오묘하기 짝이 없는 양상들! 그 앞에서 그는 경탄했다. 그런데 그 너무나 엄청난 사실의 한복판에 존재하면서도 사람들은 의외로 그 존재에 무심했다. 그게 너무 가깝고, 너무 흔하고, 너무 당연해서일까? 혹은 먹고 살기에 너무 바빠서? 마음이 온통 딴 데 가 있어서? 돈이나 출세에 여념이 없어서?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살면서 언젠가 한 번쯤은 ‘불안 속에서’ 혹은 ‘권태 속에서’ 혹은 ‘죽음 앞에서’ 저 경이로운 존재의 신비를 체감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도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의 빛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령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두툼한 책도 두 권이나 썼다.

그러나 그에게 하이데거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하이데거의 주변에 서식하는 다른 나무들도 다 만나봤다. 키어케고어·니체·야스퍼스·마르셀, 사르트르…. 누군가가 그 부근에 ‘실존주의’라고 적힌 말뚝을 박아놓았다. 사르트르 외에는 다들 그 이름을 불편해 했지만, 뭐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부른다면 그걸 억지로 철거할 필요도 없었다. 그 이름이 아우르는 어떤 공통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큰 품으로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 혹은 ‘자기의 존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는 것’ ‘소유가 아닌 존재의 신비’, 삶의 모든 관심의 축인 ‘실존’이라는 것, ‘상황, 특히 한계상황이라는 것’, ‘자유’와 ‘선택’의 무게…. 그들의 그 모든 주제가 곧 그의 주제들이기도 했으니까. 그 모든 주제의 의미랄까, 중요성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공감한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실존주의자로 불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하게는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론자·현상학자로 불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르지만 같은 하이데거와 공자

▎실존주의자로서 이수정 교수는 하이데거라는 나무의 정령과 함께 사유라는 날개를 달고 존재라는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을 정리한 총서. / 사진·중앙포토
그게 다도 아니었다. 거기서 멈춰버리기에는 그 숲이 너무 넓었고 아름다운 나무가 너무 많았다. 너무나 다양했고 각양각색으로 그 자태를 뽐냈다. 초록색·빨간색·노란색…. 침엽수·활엽수·교목·관목…. 그는 욕심을 내서 그들을 다 만나봤다. 40년이 걸렸다. 특히 탈레스에서 헤겔까지 50개의 거목을. 그리고 쇼펜하우어에서 하버마스까지, 콩트에서 세르까지, 벤담에서 로티까지 50개의 거목을. 모두 합해 100개의 거목을. 그들이 한 줄로 늘어선 그 숲길엔 ‘철학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는 그 직선 길도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잎새 하나하나, 그 생각과 말들은 얼마나 진지했던가. 그는 그 모든 나무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더러 쓸데없이 다투는 나무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그 다툼을 뜯어말리면서 각각의 의의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도록 중재했다. ‘피 튀기게 싸우며 어느 한쪽의 절멸로 끝나기보다 모순인 채 공존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일원론과 다원론, 경험론과 이성론, 창조론과 진화론, 그런 대립들을 중재했다. 그는 ‘철학적 공화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다녔다. 때로 그는 좌파와 우파를 넘나들며 ‘겸파(兼派)’ 혹은 ‘주파(周派)’를 자처했다. 부정(tollere)과 보존(reservare) 어느 한쪽만 고집해서는 고양(ellevare) 될 수 없는 거니까. 정(These)도 반(Antithese)도 합(Synthese)을 향해 지양(Aufheben)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러던 그가 이번엔 ‘공자’라는 나무를 만났다. 숲속 계곡을 지나 건너편에 있던 그 나무는 특별히 외외(巍巍)했다. 사실 그는 그 숲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그 나무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엔 [그곳은 지금도 ‘살아있는 조선시대’로 유명한 곳인데, 그래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는 곳인데] 집집마다 그 공자라는 나무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우러러보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그 실상을 잘 모르는 부분도 의외로 많았다. ‘에헴’ 하며 수염만 쓰다듬는 꼰대나무로 잘못 아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공자라는 나무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말이 통했다! 철저하게 공감했다. 숲 밖으로 나와 있을 때 어떤 친구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넌 하이데거니 야스퍼스니 하는 실존주의자들과 친하더니 이번엔 또 웬 공자야?’ 그 시선이 좀 따갑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혼자 중얼거리듯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자네들은 좁은 틀에 갇혀 바깥을 내다볼 줄 모르는군. 저 나무들이 비록 모양은 각각 다르나 하나의 숲속에 있는 똑같은 나무라는 걸 왜 모를까. 하이데거의 ‘세계’와 공자의 ‘천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공자의 ‘사람’이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진리도, 철학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걸 말이야. 칼 포퍼는 과학철학과 사회철학에서 모두 거장이었고,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대부분 다른 인접학문에 양다리 혹은 문어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네.”

진리도, 철학도 단수 아닌 복수이니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으로 말미암았고, 공자는 그걸 바로잡아 조금이라도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 부심했다. 이수정 교수가 공자를 경청하게 된 이유다. / 사진·중앙포토
물론 하이데거와 공자는 그 언어의 잎사귀가 달랐다. 침엽수와 활엽수처럼 달랐다. 하이데거에게는 ‘인격적 가치’를 말하는 ‘윤리학’이 없었고, 공자에게는 존재의 자기현시 앞에 경탄하는 ‘존재사유’가 없었다. 하이데거가 인간 현존재의 분석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를 논하는 반면, 공자는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며 아예 그 주제를 옆으로 밀쳐놓는다. 하이데거는 특히 존재[자연]의 빛을 바라보는 반면, 공자는 인간[세상]의 현실을 바라본다.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달랐다. (물론 “서자 여사부, 불사주야/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는 공자의 말과 하이데거의 시간론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고,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라는 공자의 말을 하이데거의 존재 내지 로고스와 연결해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런 것을 찾는 비교철학은 무의미하다. 하이데거는 하이데거, 공자는 공자로 각각 따로따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애당초 출발점도, 귀착점도 다 다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나? 그는 친구들의 비아냥을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와 공자가 같은 숲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도, 공자도 인간과 세상을 논했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진지하게 논하는 것이라면 그런 언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철학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성적 혹은 가치적 생각과 언어,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설명 혹은 개선의 시도” 그런 거라면 다 철학인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저 부처와 예수의 언어도 그는 다 철학으로 간주했다. 그러니 그가 공자라는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철학과’에서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고대-중세-근세철학과 현대철학을 아울러 가르치고 배운다. 그것을 다 하는 것은 오히려 의무다.) 더욱이 공자의 윤리주의는 실존주의를 좋아했던 그에게 하나의 필연적 보완이기도 했다.

공자는 그에게 특별했다. 그것은 ‘같은 동양’이라는 어떤 친근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시대엔 동양과 서양의 구별 자체가 이미 무의미하다. 세계는 이미 하나다. 전 세계가 이미 초단위로 연결되는 세상 아니던가. 동양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주석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는 것이 그걸 상징한다. 혹은 하버드 출신의 현각 스님이 화계사에서 승복을 입고 좌선한 것도 그 상징이 될 수 있다. 아니, 서양의 중심인 미국의 아이들이 너도 나도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혹은 미국인의 생활이 온통 ‘메이드 인 차이나’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저팬’ 제품으로 영위되는 것이 더 실감나는 상징일 수 있다. 그렇게 이미 하나다.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공자가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가 철학의 숲을 거닐던 저 40여 년 동안 차츰 어른이 되어갔고, 그 숲 바깥의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세상이 온갖 문제로 가득 차 있고, 그 대부분의 문제가 ‘인간’으로 (특히 ‘인격의 부재’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어떻게든 그걸 바로잡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바로 공자가 그런 문제로 평생 부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리타분하다는 일반의 인상과 달리 공자는 매력 덩어리였다. 공자는 진지했다. 세상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거기선 엄청난 문제들이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했다. 공자의 발언들을 ‘뒤집어 읽기’ 해보니 그런 게 보였다. 느껴졌다. 이를테면 불인·불의·무례·무지·불신·무도·부덕, 군불군 신불신 부불부 자부자(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등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고, 그래서 늙은이들은 편안하지 못했고, 벗들은 서로 믿지 못했고, 아이들은 따뜻하게 품어지지 못했다. 또 사람들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았고, 공손하지 않았고, 너그럽지 않았고, 즐길 줄도 몰랐고, 애쓰지도 않았고, 훌륭하지도 못했고, 정의롭지 못했고, 밝지도 못했고, 묻지도 않았고, 민첩하지도 못했고, 좋은 벗을 사귀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받들지도 않았고, 남의 처지를 헤아리지도 않았고, 선하지도 않았고, 수양도 하지 않았고, 사람을 제대로 볼 줄도 몰랐고, 신중하지도 않았고, 남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고, 따뜻하지 않고 냉정 냉혹했고, 두려워함도 없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용기도 없었고, 의롭지도 못했고, 어질지도 못했고, 아낄 줄도 모르고 헤펐고, 올바르지 못했고, 올곧지 못했고, 가치 있는 것을 따를 줄도 몰랐고, 치우쳐 두루 아우르지 않았고, 무게도 없었고, 알지도 알아주지도 못했고, 곧지도 못했고, 총명하지도 못했고, 진심을 다해 충실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움도 몰랐고, 점잖지도 않았고, 배움에도 뜻이 없었고, 은혜를 베풀 줄도 몰랐고, 좋은 것을 좋아할 줄도 몰랐고, 조화를 이룰 줄 몰랐고, 가치 있는 것에 마음 두지도 않았고, 부모에게 효도할 줄도 몰랐다.…

사람 세상에서 언어는 정신적 대기

▎공자 탄생 2562주년을 맞아 중국 장수성 수저우의 한 사찰에서 열린 기념식. / 사진·뉴시스
오죽하면 공자는 “끝장이구나!”라든지 “에휴~” 같은 한탄을 쏟아냈을까? 그래도 공자는 정치로써 그런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보려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기회를 모색했다. 공자라는 나무 앞에서 그는 그런 언어들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이른바 인의예지니, 도덕이니, 충효니 하는 말들이 그에게는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공자나무의 정령과 함께 수레를 타고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철저하게 공감했다. 그는 마치 진주알을 모으듯 공자의 그 가치들(개·경·공·관·낙…에서 혜·호·화·회·효에 이르기까지)을 하나씩 가슴에 담았다. 50개가 모아졌다. 그것으로 그는 하나의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책이라는 보석함에 담아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게 <공자의 가치들>이었다.

그가 열심히 그것을 쓴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 숲속을 거닐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언어의 중요성이었다. 사람의 세상에서 ‘언어’는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던가. 언어는 세상의 대기와 같은 것이었다. 산소나 수소 같은 물질적 대기에 비견되는 정신적 대기다. 그 언어라는 대기를 호흡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건강을 유지한다. 언어가 탁하면 정신은 혼미해진다. 언어가 맑으면 정신도 온전해진다. 마치 저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파란 언어를 호흡하면 정신도 파랗게 물들고, 빨간 언어를 호흡하면 정신도 빨갛게 물든다. 그는 한국사회에 산소처럼 가치 있는 언어를 공급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었다.

공자는 정말이지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내용도 내용, 자세도 자세이지만, 언어 그 자체도 매력이 철철 넘쳤다.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 ‘주이불비(周而不比)’ ‘태이불교(泰而不驕)’ ‘혜이불비(惠而不費)’ ‘불치하문(不恥下問)’ ‘살신성인(殺身成仁)’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등 묘한 운율이 있다. 글자 하나에 하나의 윤리적 세계를 담아낸다. 언어의 천재다. 재치가 넘친다. 이런 매력적인 철학자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았다. 특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는 일이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는 것은 말을 잃는 일이다” 같은 말은 정말 탄복을 자아낸다. 공자 자신이 바로 그런 ‘더불어 말할 만한(可與言)’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공자라는 사람을 잃는 일이다. 얼마나 아까운 노릇인가. 그러니 <공자의 가치들>은 하나의 대화로서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의 숲속 산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지금 노자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처를, 어쩌면 예수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철학이라는 숲속을 거닐면서 그는 그렇게 또 다른 숲속의 보물찾기를 하고 있다.
 월간중앙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