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간(學際間) 연구

과학으로 무장한 인문주의자를 기다리며

인문학의 위기는 최근 사회적 관심사가 됐지만 물론 어제 오늘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인문학 위기의 타개책 중 하나로 흔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간(學際間) 연구가 강조되고 있다.

2004년 정부기관인 인문사회연구회가 펴낸 인문정책연구총서를 보면 “학제간 연구는 인문학이 보다 높은 현실적합성을 가지면서 자연과학과 함께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지난달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들이 발표한 ‘인문학 선언’에도 “참신한 학제간 연구방법론의 개발에 소홀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간 연구로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복잡성과학 등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컴퓨터의 정보처리 개념에 입각해 마음을 연구한다.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 여섯 개 학문이 뇌와 마음의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공동 연구를 한다. 초기에는 인공지능이 연구를 주도했지만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지 못함에 따라 1980년대부터 신경과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생물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진화심리학은 진화생물학과 인지심리학의 학제간 연구로서 마음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전제한다. 마음의 주요한 특성들, 이를테면 언어, 폭력성, 짝짓기, 이타주의 등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산물임을 밝혀내는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복잡성과학은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컴퓨터과학의 세계적 학자들이 복잡적응계를 연구한다. 복잡적응계란 사람의 뇌나 생태계 같은 자연현상, 주식시장이나 세계경제 같은 사회현상처럼 단순한 구성요소가 수많은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자발적으로 질서를 형성하는 체계이다. 요컨대 복잡성과학의 목표는 복잡적응계에서 질서가 창발하는 원리를 밝히는 데 있다. 복잡성과학 중에서 복잡계경제학, 인공생명, 네트워크과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 네트워크과학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로 간주하고 그 공통점을 탐구한다.

최근에는 뇌의 연구 성과를 인문학에 접목하는 신생분야가 관심을 끈다. 신경신학, 신경철학, 신경경제학이 흥미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학제간 연구로는 분자생물학으로 인류 기원을 추적하는 분자고고학, 수리물리학을 금융시장 분석에 적용하는 경제물리학, 인류학의 연구대상을 인간에서 사이보그로 확대하는 사이보그 인류학, 휴대전화 기술과 생활방식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동사회학 등 한두 분야가 아니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의 출현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전통적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다른 것 같다. 우선 인문학자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아예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기술을 노골적으로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다. 게다가 몇몇 학제간 연구는 대학과 교육당국의 뒷받침이 미흡해 시늉만 하는 형국이다. 가령 인지과학은 서울대 등 몇몇 대학에 협동과정이 설립돼 있으나 크게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이다. 복잡계경제학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중심에 서고 대학교수들이 동참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주객이 바뀐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화심리학은 아직 씨앗조차 뿌리지 못한 실정이며 인문학자들은 여전히 사회생물학의 구닥다리 이론에 매달려 있다. 과학기술이 현대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감안해볼 때 이처럼 학제간 연구가 부실한 국내 여건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인 것 같다.

2005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 문화기술 대학원이 설립됐다. 문화기술은 예술에 첨단기술을 접목시켜 문화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기술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이 다른 인문학 분야에도 시도된다면 과학기술을 인문학적 상상력 속에 녹여 현실적합성이 높은 연구활동을 전개하는 인문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인문학 위기 타개에 일조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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