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1일 화요일

과학기부의 효시 ‘솔베이 회의’(하) 건설적인 비판과 논쟁 속에서 성숙‧발전

     
 

역대 솔베이 회의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 했던 회의는 1927년에 열린 5차 회의였다.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와의 세기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양자역학의 입지가 분명해졌다. 29명의 참석자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모임이었다. 앞줄 제일 가운데가 아인슈타인, 그리고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보어다.    ⓒ 위키피디아

역대 솔베이 회의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 했던 회의는 1927년에 열린 5차 회의였다.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와의 세기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양자역학의 입지가 분명해졌다. 29명의 참석자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모임이었다. 앞줄 제일 가운데가 아인슈타인, 그리고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보어다. ⓒ 위키피디아
국제솔베이물리학화학협회가 세워지는 데는 1911년에 성공적으로 개최된 ‘솔베이 회의(Conseil Solvay, Solvay Conference)’의 영향이 컸다. 1911년 가을,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솔베이 회의 주제는 ‘방사능과 양자(Radiation and Qunta)’에 대한 것이었다.
방사능 과학과 양자역학이 태동하는 발판 마련
회의를 주재한 과학자는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학자로 당시 레이던 대학의 교수인 헨드릭 안톤 로런츠(Hendrik Antoon Lorentz)였다. 그는 7차 회의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원자론을 전자기이론에 도입한 학자로 당시 물리학계의 거목이었다.
이로 인해 20세기의 새로운 과학, 즉 핵분열과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이 태동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리 퀴리, 앙리 푸앵카레와 같은 유명 회원들이 참석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참석자 가운데서 두 번째 어린 물리학도였다.
최연소 물리학자는 영국 출신의 프레데릭 린드만이었다. 아인슈타인보다 7살 아래다. 그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과학고문으로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역사의 벽에 가려져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과학자이기도 하다.
유럽 각국의 유명 과학자들이 모이는 이 회의는 당연히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2차 회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이때의 주제는 ‘물질의 구조(The Structure of Matter)’였다. 그러나 1차 대전(1914~1918)으로 유럽 전체가 포화 속에 휩싸이자 솔베이 회의도 열리지 못했다.
지금은 물리학학회와 화학학회로 분리돼 열려
1921년 3차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독일 과학자들은 초청이 금지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 회의에 불참했다. 그는 대전 책임자인 독일에 대해서는 못마땅했지만 새로 재건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서는 지지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 과학자들의 입국이 불허된 마당에 혼자 갈 명분도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면 3년을 주기로 회의가 열렸다. 그 후 솔베이 물리학 회의, 솔베이 화학 회의로 분리 개편되면서 모두 불규칙하게 열리고 있다.
가장 최근의 솔베이 화학학회는 2013년도에 열렸다. ‘New Chemistry and New Opportunities from the Expanding Protein Universe’라는 주제로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스위스 연방공대의 쿠르트 뷔트리히(Kurt Wuthrich) 교수가 의장직을 맡았다.
솔베이 물리학회는 올해 열렸다. ‘Astrophysics and Cosmology’라는 주제로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로저 블랜포드(Roger Blandford) 교수가 의장직을 맡았다. 블랜포드 교수는 블랙홀, 우주론 등 이론천체물리학의 여러 주제에 대해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현재 이론천체 물리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대가라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세기의 논쟁 벌어져
아마 역대 솔베이 회의 가운데서 아주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회의는 1927년 8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회의라는데 이견이 없다. 물리학계의 두 거목의 불꽃 튀는 학문적 설전(舌戰)도 그렇지만 20세기의 거대 과학인 양자역학이 기존의 이론들을 물리치고 자리매김한 회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세계 과학 역사상 가장 주목 받을만한 이 물리학 토론은 양자 역학에 대한 토대를 명확히 하였다. 이 토론에서 주축이 된 인물은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과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역학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였다.
토론의 주제는 ‘광자와 양자(Electrons and Photons)’로 당시 양자물리학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보어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해석이 양자 물리학에 대한 소위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으로 현재 양자 물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해석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해석을 체계화했다.
양자역학의 입지를 분명하게 한 회의
그 논의의 중심이었던 코펜하겐의 지명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하여 코펜하겐 해석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하이젠베르크는 이 업적으로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코펜하겐 해석의 내용은 이미 1년 전 이탈리아 코모에서 열린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 서거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도 발표되었던 터라 회의에 참석했던 물리학자들은 그 내용을 이미 많이 알고 있었다.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인 보어(왼쪽)와 아인슈타인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인 보어(왼쪽)와 아인슈타인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위키피디아
따라서 이 회의는 양자 물리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의 성공을 확인하고 축하하는 회의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보어의 발표가 끝나자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해석을 조목조목 날카롭게 반박했다.
아인슈타인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회의는 축제에서 토론으로 바뀌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complementary principle: 보어가 불확정성원리에 의한 양자역학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한 철학적 개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논리는 우연과 불확정성이며, 미래의 상태는 확률적인 예측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자연현상은 확률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엄격한 인과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맞선 것이다.
“신은 주사위놀음으로 우주를 만들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지배하는 기본법칙에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미래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양자역학 이론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하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네. God does not play dice.”는 말을 남겼다. 어떤 일정한 법칙 없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러자 보어가 이에 맞서 또 유명한 이야기로 응수했다. “아인슈타인, 신에게 명령 하지 말게나. 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 다윗 보어가 아인슈타인 골리앗에게 한방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토론은 몇 일이나 계속되었다. 보통 아침식사 시간에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에 분명히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사고실험을 제안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사고실험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그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아인슈타인의 시도는 번번이 빗나갔다. 비슷한 논쟁이 며칠 동안 계속되자 과학자들은 점차 두 사람의 끈질긴 논쟁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방식에 지루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는 아인슈타인에게 “당신은 당신의 적들이 상대성이론에 반대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양자이론에 반대하고 있습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친절한 충고마저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당대 최고로 존경 받는 지도자로 솔베이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사람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그는 아직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초기연구로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점차 구시대의 물리학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솔베이 회의를 끝으로 물리학계와 결별한 것은 아니다. 동료들도 여전히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치에 항거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최고의 대접을 받는 최고의 물리학자로 존경 받았다.
모든 이론은 건설적인 비판과 논쟁 속에서 성숙해지고 발전해 나간다. 5차 솔베이 회의에 참가했던 29명의 참가자 가운데 17명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이었을 정도로 이 회의의 주제와 토론 내용은 당대 물리학과 화학 연구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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