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5일 월요일

우애수 그리고 오일러의 공식

우애수 그리고 오일러의 공식 이보다 수학을 사랑할 수 있을까<br>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출처: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란 영화가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주인공은 오로지 수를 통해 바깥 세계와 소통한다. 아름다운 수의 세계에 빠진 그의 맑은 영혼과 만나보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2004년 요미우리 소설상과 제1회 서점대상을 수상한 일본의 베스트셀러다. 그 뜨거운 인기에 2006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주인공은 64세의 수학박사. 나이는 많지만, 그의 시간은 47세에 멈춰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 동안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80분이 지나면 뇌가 리부팅 되면서 그동안의 기억은 사라져버린다. 소설은 그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28세의 가정부 교코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영화는 교코의 아들 루트가 중학교 수학교사가 된 이후 회고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우애수 220, 284로 이어진 우리는 특별한 관계

박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수는 바깥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인 셈이다. 작품에는 그만큼 다양한 수학 개념이 등장한다.
박사는 교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는다. 그녀가 24라고 답하자, 박사는 “4의 계승(4×3×2×1)이기 때문에 고결한 수”라고 말한다. 교코가 전화번호가 576-1455라고 하자, 박사는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가 5761455개이기 때문에 대단한 전화번호”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소수는 어떤 수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 고고한 수이기 때문에 밤하늘에 떠있는 닿을 수 없는 별과 같이 영롱한 존재이고, 또 소수는 별과 같이 무수히 많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렇듯 똑똑한 박사이지만, 기억의 한도가 80분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교코를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줄 알고 신발 사이즈와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정부 쿄코의 생일을 세자리 수로 쓴 220과 자신의 시계 뒷면에 쓰인 284가 우애수임을 알려주는 장면. 220의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284의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된다. <출처: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박사는 “교코의 생일인 2월 20일을 세 자리 수로 표시한 220과 내 시계에 새겨진 학장상의 번호인 284가 ‘우애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손길로 인연을 맺은 특별한 관계”라고 말한다. 우애수가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는 박사와 교코의 관계를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애수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서로 상대수가 되는 두 수를 말한다. 220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1, 2, 4, 5, 10, 11, 20, 22, 44, 55, 110을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284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1, 2, 4, 71, 142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된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수학자 페르마는 우애수 (17296, 18416)을, 데카르트는 (9363584, 9437056)을 찾아냈다. 1866년 이탈리아의 16세 소년 파가니니는 (1184, 1210)을 찾아냈다. 이는 (220, 284) 바로 다음의 우애수로, 영화 속에서 박사는 위대한 수학자들이 지나쳤던 우애수를 찾아낸 것이다.
우애수와 유사한 것으로 ‘부부수’가 있다.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서로 상대수가 되는 두 수로, 우애수는 자기 자신만 약수에서 제외했지만 부부수는 1과 자기 자신을 모두 제외하고 더한다. 예를 들어 48의 약수 중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2, 3, 4, 6, 8, 12, 16, 24를 모두 더하면 75이고, 75의 1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 3, 5, 15, 25를 모두 더하면 48이 된다. (140, 195), (1575, 1648)도 부부수다. 이 수들은 항상 짝수와 홀수의 짝이 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부부수란 이름이 붙었다.
박사는 교코의 아들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의 머리 모양이 제곱근 기호인 루트 √와 같이 평평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를 품는 제곱근의 관대함과 공평함을 닮으라는 박사의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박사는 루트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도와주고 수학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루트가 수학 교사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박사는 루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루트는 그런 박사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낀다.
수학 이외에 박사와 루트를 매개해주는 것은 야구다. 두 사람 모두 한신 타이거스의 열혈팬인데, 물론 박사의 기억은 사고가 발생한 1975년에서 멈췄기 때문에 박사와 루트가 생각하는 팀은 다르다. 박사의 기억에 저장돼 있는 야구 선수들은 이미 은퇴한지 오래다.
루트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교코와 함께 야구장을 방문한 박사는 좌석 번호 7-14, 7-15로부터 ‘루스-아론 쌍’을 떠올린다. 전설적인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가 1935년 홈런 714개로 세운 기록을 1974년 행크 아론이 715호 홈런으로 깬 바가 있다. 그 이후 714와 715와 같이 소인수의 합이 같은 연속된 두 수에 루스-아론 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각각을 소인수분해하면 714=2×3×7×17, 715=5×11×13 이고, 소인수의 합은 2+3+7+17=29=5+11+13으로 서로 같다. (8, 9)와 (15, 16) 역시 루스-아론 쌍이다.
①루트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러 간 박사는 좌석 번호를 보고 루스-아론 쌍을 떠올린다.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②)는 1935년 홈런 714개를 기록했는데, 행크 아론(③)이 1974년 715호 홈런으로 이 기록을 깼다. 이후 소인수의 합이 같은 연속된 두 수를 루스-아론 쌍으로 부른다.

π가 e곁으로 와 수줍은 i와 악수하고 1을 더하자 세계가 전환된다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4.15~1783.9.18)
이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는 박사와 형수의 로맨스다. 박사가 대학 연구소에 취직할 무렵 형이 사망하고, 그로부터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사와 형수 사이에 애정이 싹튼다. 소설에서는 박사와 미망인인 형수 사이의 관계가 젊은 시절 둘이서 찍은 사진을 통해 암묵적으로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둘의 관계가 좀 더 자세히 조명된다. 이 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인 오일러의 공식이 이용된다.
오일러의 공식 eπi + 1 = 0에는 0과 1, 자연로그의 밑 e, 원주율 π, 허수 i와 같이 중요한 다섯 가지 수가 덧셈, 곱셈, 거듭제곱, 그리고 등호로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사실 e와 π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닌 무리수이고 허수 i 역시 제곱해서 -1이 되는 가상의 수인데, 이런 신비한 수들이 모두 등장해 간단명료한 식으로 표현된다. 이런 면에서 오일러의 공식이 가장 아름다운 수학 공식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이 수식을 묘사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매우 감성적인 문장으로, 필자가 보기에 다소 과잉 해석한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하늘에서 π가 e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박사가 젊었을 때 형수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일러의 공식이 eπi = -1로 적혀있다. 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둘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상실을 의미하는 음수를 동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교코와 형수가 다툼을 벌일 때 박사가 오일러 공식을 전달해 형수의 오해를 풀어준다. 이때는 우변의 -1을 좌변으로 이항해 eπi + 1 = 0로 적는다. 이 식의 좌변에 있는 e, π, i, 1이 결합해 완벽한 무()이자 충만의 상태인 0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박사가 교코와 루트의 등장으로 보다 안정적인 상태가 됐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고드프레이 헤롤드 하디(Godfrey H. Hardy, 1877~1947년)
박사는 다양한 대사를 통해 수학의 순수성과 심미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낸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 하디(Godfrey H. Hardy, 1877~1947년)와 비슷하다. 작품 설정에서 박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하디는 이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이라는 저서에서 마치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듯, 엄선된 용어로 수학에 대한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29개의 수필로 구성된 이 책은 페이지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담겨 있는 생각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디는 수학자가 화가나 시인과 같이 패턴을 창조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미술 작품은 색깔과 형태를 통해, 시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수학은 아이디어를 조화롭게 배열해 영속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하디는 실용성에 얽매이지 않는 수학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그런 면에서 쓸모없는 수학이 더 매력적이라고 보았다. 역설적이지만, 수학이 다른 무엇을 위해 구체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더 아름답고 고결하다고 본 것이다.
사실 필자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수학 개념이 다소 개연성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감상할 때는 아름다운 수의 세계에 빠진 박사의 맑은 영혼에 흠뻑 빠져 들었다. 박사의 수학에 대한 순수한 애정은 영화의 엔딩에 흐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 잘 표현돼 있다.
순수의 전조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
Auguries of Innocenc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과학동아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