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8일 일요일

대치동 중2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

학교 마치면 학원으로… 밤 10시엔 다시 독서실로
평일이 휴식 시간… 시험날이 오히려 쉬는 날
누가 이들을 '지옥의 레이스'로 내모는가

대치동 중2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 일러스트
남쪽으로부터의 꽃소식이 화사하다. 곧 거리 곳곳이 매화를 시작으로 벚꽃과 목련, 개나리와 진달래로 물들 것이다. 그러나 상위 0.1% 대치동 중2에겐 화사한 봄날이란 없다. 그들은 이 계절을 '악마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아침에 깨울 때가 가장 안쓰러워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쓰러져 잠든 아이를 달래가며 깨우고, 축 늘어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하루를 시작하죠." 고3 학부모 얘기가 아니다. 영재고, 과학고를 준비하며 학원 다니는 대치동 중2 우등생 학부모 얘기다.

이들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자. 학교를 마친 후, 오후 5시 30분부터 10시까지 1차 학원 수업을 받는다. 학원 심야 영업 금지 조치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이 시간까지다. 그러면 여기서 끝나는가. 이후엔 지정된 독서실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계속한다는 게 정설이다. 2차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새벽 1시 전후. 이런 일상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된다.

이 아이들의 시간 개념은 일반 아이들과 다르다. 방학이 아니라 개학이, 시험 끝났을 때가 아니라 시험 기간이, 연휴나 국공휴일이 아닌 평일이 휴식 시간이다. 방학 때는 오전부터, 개학 후에는 방과 후부터 밤늦게까지 학원 수업이 이어지지만 시험 대비 기간엔 학원 수업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된 후로는 명절 연휴나 공휴일을 누려본 적이 없다. 특강이 빼곡하게 잡혀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들에게 3월부터 5월까지는 '지옥의 레이스'가 펼쳐지는 시기다. 3월은 4월 초부터 시작되는 영재고 원서 접수(자소서, 추천서 등) 준비로 바쁘다. 4월엔 과학의 달 행사와 중간고사가 있다. 5월엔 수행평가와 동아리 등 체험활동이 이어진다. 하반기에 치르는 영재고 2차 면접과 중등수학올림피아드(KMO) 응시도 이달에 예정돼 있는데, 작년엔 이 두 개가 하루 차이로 진행됐다. 영재고와 과학고를 준비하는 대치동 중2는 이렇게 살고 있다.

축제의 계절을 악마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을 만큼 영재고와 과학고가 그렇게 매력적인 학교인가? 2018학년도 고교별 서울대 진학 실적표를 살펴보자. 상위 10개교 중 서울과고, 경기과고, 대전과고 등 6개 영재고와 과학고가 진입해 있다. 거의 싹쓸이를 한 셈이다. 이런 결과표를 보면 대치동 엄마들은 '미쳐 버린다.' 그래서 이런 혹독한 입시 레이스로 자녀를 몰아가는 것이다.

상위 0.1%의 중2 입시 준비생이 되기 위해선 영·유아기 때부터 단련이 필요하다. 놀이수학, 실물수학으로 시작해 초3부터 본격적인 수학 '속진'으로 나아간다. 초6 하반기에 고1 수준까지의 선행 학습을 마쳐야 이 레이스에 합류할 자격이 주어진다. 초6 'KMO'반 레벨 테스트에 통과하기 위해 초등 저학년 때부터 수학 속진과 심화 다지기를 한다. 특정 유명 학원에 합격하기 위해 학원 강의와 개인 과외를 병행하며 주 5회 이상 사교육을 받는다.

영재고와 과학고 입시를 치르는 중3까지의 수학·과학 사교육비를 계산해보니 2억원에 육박했다. 2억은 낯선 액수가 아니다. 국제중과 특목고 바람이 초절정에 이르렀던 2000년대 중반 당시 고3까지의 영어 사교육비가 2억원에 이르렀다. 영어의 자리를 이제 수학이 차지한 셈이다. '사교육 잡기는 두더지 게임'이란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
이공계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취지로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 놓은 영재고와 과학고를 가기 위해선 거액의 사교육비를 써야 한다. 물론 이 아이들 상당수는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도 상위 0.1%에 들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헛돈을 쓰는 것도 대부분 강남 부모라는 게 조금은 위로가 되려나. 학원에 갇힌 열다섯 살 중2 아이들의 봄날이 잔인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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