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시선(詩仙)·시성(詩聖)… 살아선 떠돌이로 중국 전역을 배회해
⊙ 1200년 전 난세에 만난 두 사람의 짧은 인연… 서로를 그리는 여러 시편 남겨
⊙ 이백과 두보, 누가 더 위대하냐 두고 논란… 우열을 따지는 게 무의미
⊙ 1200년 전 난세에 만난 두 사람의 짧은 인연… 서로를 그리는 여러 시편 남겨
⊙ 이백과 두보, 누가 더 위대하냐 두고 논란… 우열을 따지는 게 무의미
〈노군동석문송두이보(魯郡東石問送杜二甫·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며)〉
- 이백
醉別復幾日(취별복기일·이별의 술자리, 벌써 몇 날 째인가.)
登臨偏池臺(등림편지대·물가의 높은 전각 빠짐없이 다 돌았네.)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언제가 될까, 이 석문 길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다시 우리가 술 단지 뚜껑을 열 날이.)
秋波落泗水(추파락사수·가을 물결은 사수로 떨어지고: 泗水는 중국 산둥성 쓰수이 강을 뜻한다.)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바닷빛은 조래산을 밝히는구나.)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바람에 달리는 쑥처럼 우리 헤어져 있으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거나하게 술이나 마시자꾸나.)
〈몽이백(夢李白·이백의 꿈을 꾸고)〉
- 두보
死別已呑聲(사별이탄성·죽어 이별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데)
生別常惻惻(생별상측측·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
江南瘴癘地(강남장려지·그대 간 강남은 더위병 많은 고장인데,)
逐客無消息(축객무소식·쫓겨난 그대에겐 소식도 없네.)
故人入我夢(고인입아몽·그대 내 꿈속에 나타났으니)
明我長相憶(명아장상억·나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 생각했겠는가.)
恐非平生魂(공비평생혼·평소의 살아있는 그대 혼백은 설마 아니겠지.)
路遠不可測(노원불가측·길이 멀어 알 수가 없도다.)
魂來楓葉靑(혼래풍엽청·혼이 나를 참아옴에 단풍나무 숲이 푸르고)
魂返關塞黑(혼반관새흑·혼이 돌아감에 관산 변방도 어두워지네.)
君今在羅網(군금재라망·그대는 지금 잡혀 있으니)
何以有羽翼(하이유우익·어찌 날개가 있으리오.)
落月滿屋梁(낙월만옥량·지는 달빛 집 안에 가득한데)
猶疑照顔色(유의조안색·이 달빛 그대의 얼굴도 비추고 있을까)
水深波浪闊(수심파랑활·물은 깊고 물결은 넓으니)
無使蛟龍得(무사교룡득·부디 교룡을 조심하시오.)
천재가 천재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서로는 서로를 알아볼까.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701~ 762)과 두보(杜甫·712~770)는 동양 시문학을 대표하는 천재다. 후대 중국인들은 이백을 시선(詩仙), 두보를 시성(詩聖)으로 꼽지만 당대 두 거장의 생애는 불운과 절망, 도피와 발버둥이 점철돼 있다. 평생 떠돌이로 중국 전역을 배회하며 술과 시로 지냈다.
그러다 둘이 딱 마주쳤으니 744년 당(唐)나라의 부도(副都) 낙양(수도는 장안)에서였다. 그때 이백은 44세, 두보는 33세였다.
11살 차이는 천재들에겐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다만 시기적으로 이백은 절정의 시심이 솟던 무렵이었고, 두보는 막 시의 세계에 입문한 상태였다. 훗날 두 사람의 조우를 두고 중국 호사가들은 “태양과 달의 대면”이라 칭했다.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것 같이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라는 것이다.
난세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인연을 이었지만, 만남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이백의 시 〈노군동석문송두이보(魯郡東石問送杜二甫)〉는 짧은 만남 뒤 두보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사구성하기두보(沙邱城下寄杜甫·사구성 밑에서 두보에게 주다)〉라는 시도 후배 두보에 대한 선배 이백의 각별함이 담겨 있다.
我來竟何事(아래경하사·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왔을까.)
高臥沙邱城(고와사구성·이 사구 마을에 한가로이 누웠네.)
城邊有古樹(성변유고수·성벽 곁에 오래 묵은 나무)
日夕連秋聾(일석연추성·해질녘마다 가을바람에 우는구나.)
魯酒不可醉(노주불가취·노나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齊歌空復情(제가공복정·제나라 노래를 불러도 다만 감정이 복받쳐 올 뿐)
思君若汶水(사군약문수·그대 생각은 문수의 흐름과 같이: 汶水는 산둥성 남서부 다원허 강을 뜻한다.)
浩蕩寄南征(호탕기남정·남쪽으로 도도히 흐르고 흘러 그치지 않네.)
이 한시는 ‘노나라 술이든 제나라 술이든,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두보에 대한 그리움만 강물처럼 흐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보 역시 이백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오죽 보고 싶었으면 이백이 등장하는 꿈을 꾸고 시 〈몽이백〉을 지었을까. 〈몽이백〉 중에 ‘死別已呑聲(죽어 이별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데) / 生別常惻惻(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는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또 다른 두보의 시 〈동일유회이백(冬日有懷李白·겨울 어느 날 이백을 생각하다)〉 역시 기약 없이 헤어진 이백과의 만남을 그리워한다.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寂寞書齋裏(적막서재리·서재 안은 적막하고)
終朝獨爾思(종조독이사·아침이 다 가도록 홀로 그대만 생각하네.)
(중략)
裋褐風霜入(수갈풍상입·해진 베옷으로 서릿바람 스며들고)
還丹日月遲(환단일월지·선약은 도무지 만들지 못했나 보다.)
未因乘興去(미인승흥거·마음 가는 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空有鹿門期(공유록문기·헛되이 녹문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鹿門은 옛날 은둔자와 관련된 지명이다.)
짧은 만남에도 이백이 두보를, 두보가 이백을 그리워하는 시는 여러 편에 이른다. 세상이 둘을 외면해도 둘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천재는 천재를 통해서만 빛이 나는가 보다. 하지만 당대 두 사람은 집권 문벌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주변인이었다.
누가 더 위대할까
이백은 중국 쓰촨(四川) 태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족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실크로드의 서역에서 태어나 쓰촨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또 쓰촨이라 불린 옛 ‘촉(蜀)’의 땅은 중국 중원과 비교해 산간오지나 다름없다. 그런 ‘벽촌’ 태생의 이백을 당의 문벌 귀족들이 용납하긴 어려웠으리라.
이 점 두보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 정치무대는 사족(士族)들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서족(庶族) 출신 두보는 귀족 문벌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이런 출생의 한계나 정치적 좌절이 더욱 시심을 물들게 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중국 시문학사에서 양대 거봉이다. 그런데 어느 쪽 봉우리가 더 높은지는 논란이 있다. 서울대 중문학과 이영주 교수는 “두보의 시는 반듯하고 모범적인 시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발전이 있지만 이백의 시는 흉내낼 수 없고 (시의) 길이 없는 천재성이 담겨 있다”고 평했다.
두보의 시가 이백보다 ‘위’라는 견해도 있다. 중국 송나라의 문호 소철(蘇轍) 같은 이는 두보와 이백을 비교하며 “이백은 견식이 천박하고 십중팔구 여자와 술에 대한 시가 대부분”이라 폄하했다. 이런 평가에는 이백이 밑바닥에서 올라가 선비의 세계에 끼어든 태생적 한계가 담겨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백과 두보, 어느 쪽이 위라고 정하기 어렵다’거나 ‘둘의 우열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분명한 점은 동양 시문학을 대표하는 두 명의 천재가 난세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백과 두보는 오랜 전란(안녹산의 난)과 무기력한 문벌의 타락을 지켜보며 시대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게 됐고 이를 ‘한시’란 문학 장르로 화려하게 완성했다.⊙
- 이백
醉別復幾日(취별복기일·이별의 술자리, 벌써 몇 날 째인가.)
登臨偏池臺(등림편지대·물가의 높은 전각 빠짐없이 다 돌았네.)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언제가 될까, 이 석문 길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다시 우리가 술 단지 뚜껑을 열 날이.)
秋波落泗水(추파락사수·가을 물결은 사수로 떨어지고: 泗水는 중국 산둥성 쓰수이 강을 뜻한다.)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바닷빛은 조래산을 밝히는구나.)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바람에 달리는 쑥처럼 우리 헤어져 있으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거나하게 술이나 마시자꾸나.)
〈몽이백(夢李白·이백의 꿈을 꾸고)〉
- 두보
死別已呑聲(사별이탄성·죽어 이별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데)
生別常惻惻(생별상측측·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
江南瘴癘地(강남장려지·그대 간 강남은 더위병 많은 고장인데,)
逐客無消息(축객무소식·쫓겨난 그대에겐 소식도 없네.)
故人入我夢(고인입아몽·그대 내 꿈속에 나타났으니)
明我長相憶(명아장상억·나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 생각했겠는가.)
恐非平生魂(공비평생혼·평소의 살아있는 그대 혼백은 설마 아니겠지.)
路遠不可測(노원불가측·길이 멀어 알 수가 없도다.)
魂來楓葉靑(혼래풍엽청·혼이 나를 참아옴에 단풍나무 숲이 푸르고)
魂返關塞黑(혼반관새흑·혼이 돌아감에 관산 변방도 어두워지네.)
君今在羅網(군금재라망·그대는 지금 잡혀 있으니)
何以有羽翼(하이유우익·어찌 날개가 있으리오.)
落月滿屋梁(낙월만옥량·지는 달빛 집 안에 가득한데)
猶疑照顔色(유의조안색·이 달빛 그대의 얼굴도 비추고 있을까)
水深波浪闊(수심파랑활·물은 깊고 물결은 넓으니)
無使蛟龍得(무사교룡득·부디 교룡을 조심하시오.)
이백 |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701~ 762)과 두보(杜甫·712~770)는 동양 시문학을 대표하는 천재다. 후대 중국인들은 이백을 시선(詩仙), 두보를 시성(詩聖)으로 꼽지만 당대 두 거장의 생애는 불운과 절망, 도피와 발버둥이 점철돼 있다. 평생 떠돌이로 중국 전역을 배회하며 술과 시로 지냈다.
그러다 둘이 딱 마주쳤으니 744년 당(唐)나라의 부도(副都) 낙양(수도는 장안)에서였다. 그때 이백은 44세, 두보는 33세였다.
11살 차이는 천재들에겐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다만 시기적으로 이백은 절정의 시심이 솟던 무렵이었고, 두보는 막 시의 세계에 입문한 상태였다. 훗날 두 사람의 조우를 두고 중국 호사가들은 “태양과 달의 대면”이라 칭했다.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것 같이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라는 것이다.
난세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인연을 이었지만, 만남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이백의 시 〈노군동석문송두이보(魯郡東石問送杜二甫)〉는 짧은 만남 뒤 두보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사구성하기두보(沙邱城下寄杜甫·사구성 밑에서 두보에게 주다)〉라는 시도 후배 두보에 대한 선배 이백의 각별함이 담겨 있다.
我來竟何事(아래경하사·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왔을까.)
高臥沙邱城(고와사구성·이 사구 마을에 한가로이 누웠네.)
城邊有古樹(성변유고수·성벽 곁에 오래 묵은 나무)
日夕連秋聾(일석연추성·해질녘마다 가을바람에 우는구나.)
魯酒不可醉(노주불가취·노나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齊歌空復情(제가공복정·제나라 노래를 불러도 다만 감정이 복받쳐 올 뿐)
思君若汶水(사군약문수·그대 생각은 문수의 흐름과 같이: 汶水는 산둥성 남서부 다원허 강을 뜻한다.)
浩蕩寄南征(호탕기남정·남쪽으로 도도히 흐르고 흘러 그치지 않네.)
두보 |
두보 역시 이백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오죽 보고 싶었으면 이백이 등장하는 꿈을 꾸고 시 〈몽이백〉을 지었을까. 〈몽이백〉 중에 ‘死別已呑聲(죽어 이별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데) / 生別常惻惻(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는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또 다른 두보의 시 〈동일유회이백(冬日有懷李白·겨울 어느 날 이백을 생각하다)〉 역시 기약 없이 헤어진 이백과의 만남을 그리워한다.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寂寞書齋裏(적막서재리·서재 안은 적막하고)
終朝獨爾思(종조독이사·아침이 다 가도록 홀로 그대만 생각하네.)
(중략)
裋褐風霜入(수갈풍상입·해진 베옷으로 서릿바람 스며들고)
還丹日月遲(환단일월지·선약은 도무지 만들지 못했나 보다.)
未因乘興去(미인승흥거·마음 가는 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空有鹿門期(공유록문기·헛되이 녹문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鹿門은 옛날 은둔자와 관련된 지명이다.)
짧은 만남에도 이백이 두보를, 두보가 이백을 그리워하는 시는 여러 편에 이른다. 세상이 둘을 외면해도 둘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천재는 천재를 통해서만 빛이 나는가 보다. 하지만 당대 두 사람은 집권 문벌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주변인이었다.
누가 더 위대할까
중국 쓰촨성 청두 외곽에 있는 두보의 초당(草堂). |
이 점 두보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 정치무대는 사족(士族)들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서족(庶族) 출신 두보는 귀족 문벌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이런 출생의 한계나 정치적 좌절이 더욱 시심을 물들게 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중국 시문학사에서 양대 거봉이다. 그런데 어느 쪽 봉우리가 더 높은지는 논란이 있다. 서울대 중문학과 이영주 교수는 “두보의 시는 반듯하고 모범적인 시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발전이 있지만 이백의 시는 흉내낼 수 없고 (시의) 길이 없는 천재성이 담겨 있다”고 평했다.
두보의 시가 이백보다 ‘위’라는 견해도 있다. 중국 송나라의 문호 소철(蘇轍) 같은 이는 두보와 이백을 비교하며 “이백은 견식이 천박하고 십중팔구 여자와 술에 대한 시가 대부분”이라 폄하했다. 이런 평가에는 이백이 밑바닥에서 올라가 선비의 세계에 끼어든 태생적 한계가 담겨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백과 두보, 어느 쪽이 위라고 정하기 어렵다’거나 ‘둘의 우열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분명한 점은 동양 시문학을 대표하는 두 명의 천재가 난세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백과 두보는 오랜 전란(안녹산의 난)과 무기력한 문벌의 타락을 지켜보며 시대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게 됐고 이를 ‘한시’란 문학 장르로 화려하게 완성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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