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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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숙(怏宿)들 합쳐 근대국가 세운 사카모토 료마의 대망(大望)

도쿠가와 막부 말기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로 시작, 가쓰 가이슈(勝海舟) 만나 세계정세에 눈떠
⊙ 앙숙이던 조슈와 사쓰마 사이 중개해 삿초동맹 결성,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길 열어
⊙ 새 정부 디자인하고서도 본인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해외무역하겠다던 무사(無私)의 지사(志士)

고정일
1940년 출생.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비교문화학전공 석사. 동서문화사 설립, 대표 발행인. 동인문학상 운영위원회 집행위원장.
삿초동맹을 성사시켜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을 연 사카모토 료마.
  보수는 지리멸렬! 진보는 일사불란! 이래서야 어찌 대한민국 지켜 내겠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감옥에 있고, 국회 부의장은 대통령을 내란죄·국가기밀누설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김정은은 미사일 쏘아 올리며 희희낙락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 너무 어지럽다. 이 난국을 뚫고 나갈 영웅은 우리에게 정녕 없단 말인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 1868)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1867년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가는 길을 연 일본 최고의 영웅이다.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일본 1000년 역사인물’ 여론조사에서 료마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물리치고 당당 1위에 올랐다.
 
 
  현대 일본을 만든 거시경영자
 
  1835년 시골 무사 아들로 태어난 료마는 시대변혁의 물결에서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조국을 구해 냈다. 그 청춘의 삶에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눈물 흘리며 책장을 넘긴다. 료마의 끝없는 자기 혁신 의지가 천황을 정치세력 중심에 올려 메이지 유신이 가능하게 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료마는 인간적 능력이나 세속적 배경에서 전혀 돋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메야마(龜山) 조합 결성-삿초(薩長) 동맹-해원대(海援隊) 설립-도쿠가와 정권 타도-대정봉환(大政奉還) 등을 거치면서 메이지 유신기획에 성공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33살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친 료마.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와 실천적 행동력, 강력한 리더십으로 일본 개화기 정치적 소용돌이를 헤쳐 나간 료마는 현대 일본 100년을 기획한 거시(巨視) 경영자로 평가된다.
 
  료마가 세상에 맞섰던 도전과 응전의 모습은 남달랐다. 그즈음 일본은 국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저마다 이해타산에 눈멀어 어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나라를 똑바로 세울 만한 설계자가 없었다. 한마디로 위기에 처한 일본은 구세주가 필요했다. 그때 료마가 나타났다. 료마를 만들어 낸 것은 칼로써 총과 대포를 당할 수 없다는 생각, 그래서 무장(武將)들이 세운 도쿠가와 정권의 일본으로는, 흑선(黑船)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료마는 바다 너머 세계를 동경하는 청년이었다. 료마가 고향 도사(지금의 고치)를 떠나 에도(江戶·도쿄)로 유학한 것은 검술 수련을 위해서였다. 이 에도 유학이 료마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료마가 에도에 머물던 1853년 6월, 우라가(浦賀)에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 함대가 쳐들어 왔다. 막부는 우왕좌왕했다. 그때까지 일본은 서양의 앞선 문명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흑선 내항을 계기로 일본이 매우 뒤처졌음을 깨달았으리라. ‘이대로는 안 된다’고 자각하게 된 혈기 왕성한 청년이 가슴속에 세계를 품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54년 흑선 함대가 우라가에 다시 들어왔을 때, 조슈의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그 배를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쇼인의 스승인 마쓰시로의 번사(藩士)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도 이 일에 연루되어 자신의 고향에서 칩거 처분을 받았다. 쇼잔 밑에서 포술(砲術)을 배우고 있던 료마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그해 료마는 에도 유학을 마치고 고향 도사로 돌아왔다.
 
  도사 번은 양이론(攘夷論)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료마는 미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나카하마 만지로(中濱萬次郞)에게 들은 서양정보를 책으로 펴낸 화가 가와다 쇼료(河田小龍)를 만나 자문을 했다. 료마는 그를 통해 ‘양이론을 지켜 가기는 어렵다. 개국(開國)을 전제로 한다면 해군력을 증강하고 항해술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흑선 소동으로 잠시 중단했던 검술 수련을 다시 시작하고자 료마는 1856년부터 5년간 에도 유학을 했다. 검술의 유파인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면허개전(免許皆傳)을 받은 것이 그즈음이었다. 아직 료마의 열정은 천하의 정세보다 검술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도사 근왕당
 
가메야마사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료마의 초상과 유품들. 료마는 서양식 부츠를 신고 권총을 찼다. 사진=배진영
  료마는 1861년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와 오이시 야타로(大石彌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도사 근왕당(勤王黨)에서 첫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온 료마는 그곳이 양이론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꼈다. 또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대립도 드러나고 있었다. 에도에서 다케치 한페이타가 하급 무사를 중심으로 도사 근왕당을 결성했을 때, 도사 번에 있는 하급 무사 중 가장 먼저 참가한 이가 료마였다. 사실 료마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료마와 같은 하급 무사 세력을 이용하고 싶어했던 한페이타가 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도사 근왕당의 목적은 양이사상과 그 운동을 촉진하고 지지하는 데 있었다. 도사 번은 양이운동에서 조슈(長州)나 사쓰마(薩摩)보다 움직임이 훨씬 늦었다. 조급해진 한페이타는 번내 요인 암살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료마는 도사 근왕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 결정이 그의 인생을 뒤흔들 수많은 만남들로 연결되는 것이 흥미롭다.
 
 
  가쓰 가이슈와 료마
 
막부의 중신으로 료마의 스승이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
  1863년, 고베 해군조련소 모체가 되는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사숙(私塾)에서 료마는 문하생들 우두머리로서 조직 운영 비법을 익혀 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그가 고베에서 지낸 시간은 짧았다.
 
  1863년 가쓰가 해군조련소 설립으로 분주할 때 료마도 그 일을 도왔다. 해군조련소는 이듬해 1864년 5월에 완성됐다. 그러나 고작 3개월 뒤 아이즈 번(會津藩)과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파(公武合體派·교토의 천황 중심의 조정과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의 합작을 주장하는 세력)가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들어 서양세력에 맞서자는 파)를 교토에서 추방한, 이른바 8월 18일 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가쓰가 전국에서 받아들인 사숙 문하생들에게도 혐의가 씌워졌다. 가쓰는 같은 해 10월 군함봉행(해군장관)에서 해임됐다. 고베 해군조련소도 해체 조짐을 보였다. 료마도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료마는 에도에 올라오자마자 좋은 인맥을 쌓아 올리긴 했으나, 이제 남은 것은 가쓰의 제자라는 명함 한 장뿐이었다. 자신의 독자적 견식과 그 부가가치를 걸고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다.
 
 
  가메야마사추
 
나가사키에 있는 가메야마사추의 유적. 료마가 사쓰마번의 지원으로 만든 상업조합이다. 사진=배진영
  거리를 헤맬 뻔했던 료마와 그를 따르는 낭인(浪人)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있는 사쓰마 번이었다. 해군조련소를 세울 때 료마는 가쓰와 함께 사이고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쓰마 번도 해군력 증강을 급선무로 생각했기 때문에, 고베 해군조련소 출신이며 가쓰의 제자인 료마와 그 낭인들을 흔쾌히 맞아들였다.
 
  사쓰마가 나가사키에 파견한 기관의 형식으로 1865년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라는 조합이 설립됐다. 료마가 그 운영을 맡았다. 료마는 가메야마사추의 유용성을 서둘러 사쓰마 번에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1865년 5월, 료마는 조슈 번 양이파의 중심 인물인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후일 기도 다카요시로 개명)와 만났다. 그는 5월에 사쓰마에서 상경 예정인 사이고와 시모노세키에서 회담 약속을 한다. 같은 시기, 료마의 동료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도 사쓰마로 가서 사이고와 만나고 가쓰라와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1864년 도쿠가와 막부의 제1차 조슈 정벌 뒤 조슈 번은 해외로부터의 무기 조달이 금지되어 있었다. 군비 재정비 문제는 가쓰라에게도 고민거리였다. 사쓰마 번에서 무기가 제공된다면 그 고민에서도 벗어나고 대립 관계로 인한 긴장도 누그러질 터였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거래는 이루어졌다.
 
  본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맞선 서군(西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쓰마 번이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를 차츰 깊게 해 나갔다. 반면에 조슈 번은 에도시대 내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았다. 1863년 8·18 정변과 1864년 ‘긴몬(禁門)의 변(變·8·18정변으로 교토에서 축출됐던 조슈가 세력 만회를 위해 교토의 황궁을 점거하려다가 실패한 사건) 때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삿초동맹
 
삿초동맹을 체결하는 모습을 재현한 드라마. 왼쪽부터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帶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하지만 막부 편을 들던 사쓰마 번도 그들이 강하게 주장하던 공무합체론을 막부가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타도 막부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 결과 ‘적군의 적은 아군’이라는 생각 아래 사쓰마 번 안에서는 사이고를 중심으로 조슈와 손을 잡으면 막부와 비등해져 군사력과 발언권이 비약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의견이 오갔다.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 오월동주(吳越同舟)는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다. 한편 조슈 번에 몸을 두면서 사쓰마와의 동맹을 모색하던 인물, 나카오카 신타로가 있었다. 도사 번 출신인 그는 8·18 정변으로 양이파 탄압이 시작되면서 조슈 번에 망명했다. 이후 그는 조슈 번에서 자신처럼 망명한 지사들 사이를 조율해 주는 존재가 됐다. 그가 삿초(薩長·사쓰마와 조슈)동맹을 구체적으로 그려 나가면서 양쪽 타협이 시작되었다.
 
  1866년 3월 7일 가쓰라 고고로, 사이고 다카모리,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帶刀), 사카모토 료마 네 사람이 근위가 화원 저택에 모여 앉았다. 그 자리에서 나눈 의견을 바탕으로 몇 가지 약속이 구두로 맺어졌다. 이는 사쓰마와 조슈 유력자들 사이의 신사협정과도 같았다. 다음 날 가쓰라 고고로가 회담 내용을 6개 조항으로 정리하여 기록했다. 가쓰라는 그 기록을 료마에게 보내 잘못된 내용이 없다는 확인과 그것을 증명하는 배서(背書)를 요구했다. 본디 이 배서는 동맹 체결의 발안자이며 계약 체결을 위해 가장 많이 뛰어다닌 나카오카가 그 영예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나카오카는 사정상 회담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맹 계약 내용을 담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회담 자리에 참석한 료마에게 그 역할이 돌아간다. 료마가 삿초동맹에 기여한 것은 양쪽 번이 회담 자리에 앉기까지의 준비 역할이었다. 나카오카에 버금가는 위치의 유력자를 설득하고 움직이는 데 있어 료마의 뛰어난 화술(話術)이 빛을 발한 것이다.
 
 
  선중팔책(船中八策)
 
  료마는 사쓰마·조슈 번과 막부와의 관계, 더 나아가 일본의 미래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미래상은 1867년 6월, 도사 번의 배 ‘유가오마루(夕顔丸)’를 타고 나가사키에서 효고(兵庫)로 가는 길에 완성된 선중팔책(船中八策)으로 드러났다. 선중팔책은 막부에 대정봉환(大政奉還·막부가 천황에게 통치의 대권을 반납함) 건의를 촉구하기 위해 료마가 도사 번 참정(參政)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에게 설명한 내용을 그 자리에 함께했던 해원대 대원 나가오카(長岡謙吉)가 문서로 정리한 것이다. 도사 번 내에서 쇼지로와 료마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나, 쇼지로는 료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같은 해 10월, 도사 번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대정봉환을 건의했다. 막부 말기 사현후(四賢侯) 중 하나이자 료마에게 가쓰 가이슈를 소개한 마쓰다이라 가쿠(松平春嶽)도 이 건의를 지지했다.
 
  이미 영향력이 떨어진 막부가 정권에 집착한다면 내전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한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교토에 모인 40개 번의 번주와 중신들을 니조성(二條城)으로 불러 자문을 받은 뒤 대정봉환을 결정했다.
 
  천황의 조정은 처음에 이를 보류했지만 고마쓰 다테와키 등이 강한 입김을 불어넣자 마침내 수락했다. 한편 료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나카오카 등과 함께 무력 봉기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무력으로 뜻을 펼치는 사회가 바로 료마가 그린 일본의 미래상이었던 것이다.
 
 
  료마의 꿈 이루어지다
 
6개조 맹약 뒷면에 삿초동맹의 증인인 료마가 내용을 보증하기 위해 붉은 색으로 쓴 글.
  막부 독재에 반대하면서도 막부를 쓰러뜨리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사쓰마 번과, 타도 막부를 일찍 염두에 두었던 조슈 번 사이를 주선한 일로, 료마는 막부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료마가 명확히 막부의 적이 된 것은 1866년 3월 9일 데라다야(寺田屋) 사건부터이다. 료마가 주선한 삿초동맹이 성립되고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교토 후시미(伏見) 데라다야에 숨어 있던 료마를 후시미 봉행소(奉行所) 포졸들이 덮쳤다. 료마는 권총으로 포졸들을 사살하고 도주했다. 료마는 관리를 죽인 범죄자로서도 막부에 쫓기게 됐다.
 
  그 사이 양이파의 선봉이었던 조슈 번마저 긴몬의 변과 시모노세키 전쟁(조슈 번과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연합군 간의 전쟁)을 통해 군사정비 근대개혁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사쓰마 번 또한 사쓰마·영국 전쟁에서 지고 난 뒤에는 영국과 협력관계를 쌓기 시작했다. 일본을 근대국가로 바꾸지 않으면 나라의 존속도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쪽 지방 세력들의 결심이 료마와 고토가 계획한 대정봉환과 만났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에 응하면 도쿠가와 장군 가문도 지금 가진 영지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이묘(大名·제후)로서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력을 내려놓게 된 일부 막부 지지파의 분노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료마의 여자들
 
료마의 아내 나라사키 료(楢崎龍). 이 무렵 전 해원대 지사들의 원조를 받아 2년 뒤 가나가와(神奈川)의 요정 다나카야(田中屋)에서도 일했다.
  료마의 아내 오료(お龍)는 1841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둘은 1864년, 료마가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 히가시야마에 은둔처를 짓고 부엌데기로 오사다라는 여성을 고용했을 때 만난다. 이 오사다의 딸이 바로 나라사키 료, 즉 오료이다. 그때 24살이던 그녀 또한 도쿄 7조신지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료마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녀의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862년 그녀는 뚜쟁이에게 속아 매춘부로 팔려간 동생을 구하고자 단도를 품속에 챙겨 동생이 있는 오사카로 쳐들어갔다. 그러고는 야쿠자들에게 “죽일 거면 죽여라!”라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외치고 나서 동생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런 담대한 성격에 료마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무언가를 느꼈으리라. 둘은 곧 깊은 사이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료마는 그녀와 부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66년 데라다야 숙소 습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 오료였다. 목욕 중이던 그녀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계단을 뛰어올라가 남편 료마에게 위급한 상황을 전해 목숨을 구했다.
 
  료마 마음속에서 가장 큰 존재였고, 그를 감싸 안은 여성으로서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인물은 셋째 누나인 오토메(乙女)이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나서는 오토메가 료마의 어머니 역할을 다했다. 료마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끼친 여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료마는 오토메에게 온갖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오토메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토메에 대한 료마의 애착과 사랑은 상당했다고 짐작된다. 키 174cm의 큰 몸집과 기가 센 대담한 성격의 오토메 모습과 오료는 닮은 곳이 많았다. 오료를 아내로 삼은 료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나이 이상적 꿈 원대한 국가관
 
  사욕을 버리고 진력한 료마 덕분에 앙숙인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가 손을 잡았고, 에도(도쿄) 함락을 앞두고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신인 가쓰 가이슈와 유신 주역인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간에 평화로이 성문을 열기로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일본 역사 최대 성공작 메이지 유신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료마는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그 꿈을 이뤄 주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에 무너진 사람들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꽃 역할을 했다. 료마는 좌절한 사람들을 어찌 대해야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또 고통을 주지 않고 그들의 생각과 자질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열등감을 하나로 모아 최대 결과물을 이끌어 내는 수완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료마는 뛰어난 정치적 지도자이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경영자요, 일본 역사상 다시 없을 대물(大物) 경세가(經世家)였다.
 
  애초에 양이론자였던 료마는 막부의 개국론자 가쓰 가이슈를 제일의 적으로 삼고 그를 처단하려 했다. 가쓰를 찾아가 만난 료마는 짐짓 세계정세와 그 대책을 놓고 의중을 떠보았다. 여기서 료마는 가쓰의 해박한 지식과 애국적 마음에 그만 큰 감동을 받았다. 료마는 마음속 칼을 거두고 가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료마는 자신의 학식과 식견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의 뛰어난 생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거듭한다.
 
  료마가 장차 새 정부에서 활약할 인물들의 이름을 적어 냈을 때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동지들이 “아니 자네 이름은 왜 없는가?”라고 묻자 료마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상선을 꾸려 세계를 누비며 무역을 하겠네.”
 
  ‘대망(大望)’을 이루려면 자기를 버려라! 국민은 나라를 구할 ‘대물’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 위대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자기 희생의 가시밭길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버릴 줄 알아야 참 영웅으로 역사에서 우뚝 설 수 있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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