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일 토요일

목적 없는 입시 스펙은 '빛 좋은 개살구'

입학사정관제의 도입과 함께 학생들 사이에 가장 유행한 말은 '스펙'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영어의 specification(사양)을 줄여 'Spec'이라 한 것으로 취업 희망자들이 이력서를 낼 때 자신의 학력이나 학점 그 외에 어학 성적 등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을 학생들이 비교과 영역 활동이나 성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텝스 몇 점이면 대학에서 가산점을 얼마를 주고, 올림피아드 상이라도 상의 등급이나 규모 등에 따라 가산점의 점수가 다르며, 심지어 입학사정관전형 준비는 '스펙 쌓기'라는 인식으로까지 확대됐다.

스펙이 다양하고, 규모가 크고, 등급이나 점수가 높고, 해외 봉사활동과 같이 화려한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사실 입학사정관제 도입 초기에 대학들이 이런 요소들을 학생 선발에 적극 반영한데서 기인한다. 당시 교과 등급은 낮은데 스펙에서 차이가 나 뒤집은 사례를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입학사정관제는 스펙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이러한 초기의 스펙 중심 선발의 여파로 지금까지도 많은 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

입학사정관전형에서 스펙에 대한 평가 관점이 2010년 대입부터 변하기 시작해 2011 대입에서는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양(量)보다는 질(質)로 그 평가기준이 변했다. 전교 총학생회장을 했느냐보다는 동아리회장이라도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했는가'로, 해외봉사활동을 갔느냐보다는 동네에서 하더라도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했느냐'로 관심이 변하고 있다. 그것보다 더 큰 관심은 모집단위에 들어와 성공적으로 학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에 있다.

지난 해 수시 면담 때 리더십인재전형으로 서울의 K대학 생물학과를 지원하려는 L군이 찾아왔다. 학생부 비교과영역의 엄청난 양(학생부 출력물이 25쪽 정도)에 한번 놀라고, A4 5장의 개인 포트폴리오의 서류목록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엄청난 양에 비해 정작 필요한 것은 없었다. 과학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지만 생물과 관련지을만한 대회나 수상은 없었고, 400여 시간의 봉사활동 대부분은 한 시간 단위의 학교 도서관 청소, 교내 정화활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교과 성적도 반영 교과 성적은 전교과 성적보다 오히려 낮았으며, 모집단위와 관련된 교과 성적은 이보다도 더 낮게 나왔다. 자기소개서 지원 동기에 '나는 어려서 생물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에만 몰두했다'고 했는데 참가한 경시대회는 천체관측·발명·기능경진·모형비행기 날리기 분야였고, 동아리는 시사토론·농구·천문관측동아리였다. 이 학생이 1학년 때 얻은 정보가 양(量)으로 평가받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하게 볼 수 있지만, 그 뒤 대학에서 '학생의 진로목표에 맞는 스펙으로 관심을 바꾸겠다'는 정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막 쌓은 돌은 단지 돌무더기에 불과하다. 종교적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쌓은 돌만이 탑이 되어 그 의미를 인정받게 된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도 'S대학 국어교육과에 갈려면 텝스, 토플, 토익 외에 무엇을 더해야 하지요?'라는 상담 전화를 받았다. 현재 상황의 입시에서 스펙은 대학과 모집단위나 전형에 맞는 액세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무조건 화려하고 비싸다고 좋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내 몸에 잘 맞는 길거리 가판대의 머리핀 하나가 나를 더 아름답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액세서리보다는 모집단위에 필요한 학업능력을 기르는데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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